제162화
[80층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세계수 타기가 종료되었습니다.]
70층 전체에 퍼진 메시지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80층까지 오른 사람이 있다고? 그것도 난도가 대폭 상승된 이번 이벤트에서?
재작년에 이브 일행이 77층에 도달했다는 소문보다 몇 배, 아니 몇십 배는 충격적인 메시지였다.
당연히 70층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였다.
‘80층에 도달한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대부분의 사람이 이번 이벤트를 73~74층에서 포기했다. 심지어 76층 이상을 가본 사람들이 증언하기로는 무려 ‘다크 엘프’들이 보스로 나온다고 들었다.
그 모든 것을 뚫어낸 미친놈은 대체 누구인가.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답을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유일하게 태연한 표정의 사람들이 있었다.
“끝내셨나 보네요.”
“키야, 다크 엘프도 있었다며, 그걸 혼자 클리어했다고? 아, 렐인가 꼬맹이도 있다고 했지.”
“역시.”
어쨌든 친구들인 자신이 봐도 엄청난데, 사람들이 느끼는 충격은 얼마나 클까?
메시지 창이 출력되자마자, 네 사람은 곧장 80층으로 올라갈 채비를 했다. 드디어 석찬과 다시 탑에 오를 생각에 신이 난 그들이었다.
* * *
천계, 천사들의 보금자리인 이곳은 한바탕 난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등에 달린 세 쌍의 날개, 샛노란 머리칼. 천사장 로이르는 수정구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크 엘프 킹은 분명 70층 수준의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녀석인데?’
그렇다. 백작급 악마, 천사로 치면 상급 천사의 강함을 지닌 녀석은 70층은커녕 80층의 인간들이 힘을 합세해도 잡을 수 있을지 미지수인 괴물.
하지만 처음 있었던 동료의 도움을 제외하면, 석찬은 결국에는 홀로 녀석의 목을 따버렸다.
‘괴물 녀석.’
천계 안에는 아직도 석찬을 인정하지 않고, 그를 저지하려는 천사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아예 ‘반(反) 강석찬 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석찬을 방해할 궁리를 세웠다. 마치 예전의 에피르처럼 말이다.
‘이번 작전에는 공을 많이 들였다. 무려 상급 천사 삼십과 천사장 열의 힘을 모았단 말이다!’
절대 소수라고 볼 수 없는 인원이 희생되었고 성공해야 했지만, 역으로 완전히 실패해버린 작전…
‘반 강석찬 연합’의 일원이자 간부인 그로서는 정말이지 최악의 전개라고 할 수 있었다.
‘대천사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힉!’
말을 하기가 무섭게 복도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여덟 장의 거대한 날개, 눈처럼 새하얀 백색의 장발, 조각과도 같은 외모를 지닌 미남자였다.
대천사 아이테르.
수년 전 많은 이의 축복과 함께 일곱 번째 대천사로 발탁된 이였다.
비록 가장 최근에 대천사가 되었지만, 그 무력은 과거 ‘배신자 라우르’도 인정했던 것처럼 대천사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했다.
“아이테르 님? 어찌 이곳에…”
다행히도 그는 ‘반 강석찬 연합’의 대천사가 아니었고, 내심 안도한 천사장의 모습에 아이테르가 씩 웃었다.
“근심이 많은 모양이군요.”
“티가… 많이 납니까?”
“100m 밖에서도 알 정도였어요.”
아이테르는 천사장의 손에 들린 수정구를 보며 그에게 물었다.
“강석찬이라는 인간 때문에 고생인 모양이군요.”
“아.”
그제야 황급히 수정구를 끈 천사장이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저 인간은 그만큼 특별하니.”
“아이테르 님께서 보시기에도 저 인간은 특별합니까?”
“네. 저대로 쭉 성장한다면 아마… 저도 이길 수 있지 않을까요?”
태연한 그의 말에 천사장은 농담이냐며 되물었지만.
“아닌데요? 저는 정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0년? 아니지 5년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지금 성장세라면 말이죠.”
이어지는 그의 말에 침을 삼켰다.
‘강석찬이 그 정도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가 생각해봐도 그랬다. 십수 년 만에 상급 천사급으로 성장한 그를 더 이상 과소평가할 이유가 없었다.
‘새로운 작전을 세워야겠다고 건의해야겠군.’
지금 대천사의 분노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더욱 성장 차이가 벌어지기 전에 석찬을 막아야 했다.
아이테르와의 대화가 없었다면 깨닫지 못했을 일.
“감사합니다, 아이테르 님. 덕분에 정리가 되었습니다.”
감사 인사와 함께 천사장이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벗어난 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본 아이테르가 작게 미소 지었다.
“감사하긴요.”
그가 반 강석찬 연합이라는 사실을 아이테르는 알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도 잘 알았고.
그럼에도 아이테르가 그들에게 석찬에 대한 경각심을 강화해준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 시련을 이겨낸다면, 그는 더욱 강해지겠죠.’
실제로 어려운 퀘스트에는 그만큼 합당한 보상이 따른다. 실제로 이번 세계수 타기도 난도를 급격히 상승시킨 만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질 예정이었고.
그래서 아이테르는 기꺼이 그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들이 더욱 많은 훼방을 놓을수록, 석찬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게 되었을 땐.’
아이테르는 머릿속으로 석찬의 마지막 싸움을 떠올렸다.
흰 머리에 녹안,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똑 닮은 그의 모습에 아이테르는 씩 웃었다.
“그때가 참으로 기대가 되는군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빙긋 웃은 그가 복도를 떠났다. 오랜만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렇게 건물을 빠져나간 순간이었다.
“응?”
정원에 모여 있는 천사들. 인원이 한둘이 아닌 것이 무슨 일이 벌어진 듯했다.
“아이테르 님!”
그때 천사 하나가 아이테르를 알아보며 그에게 인사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모여 계신…”
그때 아이테르의 눈이 그들이 보고 있던 거대 수정구에 향했다.
‘이건…’
수정구 안에 비친 남자를 보며,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긴 백발과 진한 녹안을 가진 그의 몸에서 흐르는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수정구를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흐압!
기합과 함께 주먹을 내지르자, 거대한 용의 날개에 큼지막한 구멍이 뚫렸다. 드래곤의 단단한 육체가 두부처럼 뭉개진다.
하지만 아이테르가 놀란 점은 그 완력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남자의 몸에 흐르는 힘, 그가 사용하는 힘은 신력이었다. 그것도 그가 잘 아는 신력이었다.
“저 모습은….”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저 힘을 쓰는 거지?’
순식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이테르 님?”
“저 남자는 누굽니까?”
아이테르는 당장 그의 신상을 캐묻기 시작했다. 남자의 정체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욱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런 미친.’
욕지거리를 간신히 삼키며 아이테르가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빨리, 최대한 조치를 취해야 해.’
남자에 대한 설명을 들은 순간, 아이테르는 확신했다. 석찬과 저 남자를 마주치게 하면 안 된다.
‘탑에 내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지금 의문에 남자가 향하고 있는 곳은 80층. 그가 석찬과 마주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 * *
“으윽…”
눈을 뜨자마자 느껴진 것은 전신을 찌르는 근육통이었다. ‘마력 + 신력’, 줄여서 신마력쯤 되려나. 어쨌든 신마력의 사용은 육체에 꽤나 심한 부담을 주었다.
‘강마력을 처음 썼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네.’
이 정도 부담에 비하면 강마력 정도야 애교였다.
‘그래도…’
위력 하나는 엄청났다. 만약 부분 강신이 아닌 완전한 강신 상태에서 신마력을 사용한다면? 위력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여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호화로운 방이었다. 천장에는 멋들어진 샹들리에가 달려 있으며, 방 이곳저곳에 척 봐도 비싸 보이는 가구들이 한가득 널려 있다. 그리고 세 명이 누워도 넉넉할 법한 침대 위에는,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이 한 명 누워있다.
이브.
이제는 연인 사이가 된 그녀의 모습에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데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의문에 빠졌다.
‘이브가 왜 여기 있지? 왜 내 옆에서 자고 있는 거고?’
솔직히 말해서 다크 엘프 킹을 이긴 이후로부터 쭉 기억이 없었다.
‘메시지 창도 나타났던 것 같은데… 으음.’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으음… 아저씨?”
침대 아래에서 누군가가 쏙 얼굴을 빼 들었다. 금발에 긴 귀, 렐이었다.
“일어났어요?”
“렐?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여긴 어디고?”
“그게 말이죠….”
렐은 졸린지 눈을 비비면서도 천천히 다크 엘프 킹을 쓰러트린 이후의 일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최후의 일격으로 다크 엘프 킹을 쓰러트린 후, 세계수 타기가 끝났다는 메시지와 함께 석찬과 렐은 어디론가 이동했다.
주변이 온통 검은 공간, 석찬도 잘 아는 G의 공간이었다. 물론 정신을 잃었기 때문에, G를 만난 기억은 없지만 인상착의나 묘사를 들어보면 그가 확실했다.
“G가 뭐라고 했는데?”
“그 아저씨가 그랬어요.”
우선 세계수 타기를 최초로 끝낸 것을 축하하며, 할 얘기가 많지만 많이 피곤한 것 같으니 마을로 보내 주겠다고.
“그럼, 여기가 80층 마을이야?”
“네, 그런 것 같아요.”
석찬은 이브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살폈다.
거대한 벽 밖으로 황폐한 땅과 화산이 보였다.
‘화산이라.’
지형이 달라진 것을 보니 새로운 마을에 온 것은 확실했다.
“어쨌든 사정을 얘기하고 마을로 들어오니까, 이 아줌마랑 아저씨 동료 분들이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아줌마가 아저씨 보더니 걱정 많이 했어요.”
“…그랬겠지?”
예전부터 격렬한 전투 후 다쳐서 오면 걱정을 많이 했던 그녀였다.
“그럼, 여기가 이브네 집이야?”
“네, 그렇다고 들었어요. 여기 건물 전체가 아줌마랑 아저씨들 거래요.”
대충 창밖을 보니 3층 이상은 되어 보이는 건물이었다.
“잠시만 그럼 왜 이브가 나랑 같은 침대를 쓰고 있는 거야?”
건물 전체가 본인 거라면 방도 많을 텐데?
“이제 사귀는 사이니까 마음대로 한다고 해서요, 그래도 혹시 아줌마가 이상한 짓 할까 봐 제가 감시하고 있었어요, 잘했죠?”
“으, 응.”
황당하면서도, 귀여운 이유였다. 막상 이렇게 들으니 진짜 연인이 된 것이 실감났다.
‘그래도 아직 같이 자는 건 조금 이른 것 같은데 말이지.’
[이르긴 개뿔. 얌마, 원래 남자 여자 사이는…]
‘조용히 좀 해요, 제발.’
[답답이 새끼.]
답답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천성이 이런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어쨌든 방을 슬슬 구경하는 사이에 이브도 잠에서 깨 일어났고, 재회의 포옹을 한 두 사람은 밖을 나서 나머지 동료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자식, 축하한다.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축하한다. 여기까지 왔으니, 나중에 대련이나 한번 하지.”
“오메데토.”
그런데 엘리자베스가 건넨 단어가 이상했다.
“오메데토? 엘리, 갑자기 무슨…”
“진현 씨가 그러던데, 축하한다고 표현할 때는 이렇게…”
진현을 째려보니 옆에서 쿡쿡 웃고 있었다.
‘장난질을…’
석찬은 황급히 단어의 뜻과 유래를 가르쳐줬다.
“…….”
진실을 알게 된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제 머리칼처럼 붉어졌다. 그리고.
“진현 님? 잠깐 와 보시겠어요? 도망가지 말고~.”
검은 마력을 뿜어내며 진현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석찬! 헬프 미! 아무나 도와줘!”
급히 도움을 청했지만 당연하게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