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다크 엘프 킹 레이어드. 이름 그대로 다크 엘프들의 통솔하는 ‘왕’이다. 그리고 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는 강했다.
스릉.
척 봐도 묵직해 보이는 장검을 꺼내든 그가 석찬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캉, 캉!
지금까지 마주쳤던 보스들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다크 엘프 전사, 제너럴 그리고 메이지까지 하나같이 전부 강력한 녀석들이었지만 미완성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반면, 이 녀석은 아니었다.
‘완성.’
조금은 과분한 단어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석찬이 볼 때 레이어드의 검술은 완벽했다.
픽!
검 끝이 볼을 스쳐 지나간다.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바라보며, 석찬이 침음했다.
‘제법이야.’
전투력은 자작급 악마를 뛰어넘은 듯싶다. 백작급, 천사로 치면 상급 천사. 몇 주 전에 보았던 로제와 비슷한 강함이었다.
‘배울 점이 많겠어.’
석찬은 신의 눈을 발동해 천천히 레이어드의 검술을 눈에 익혔다. 베기와 찌르기가 고르게 분배되어 있어서 패턴을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잔상처가 다섯 개 정도 늘자, 검격이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렐도 나름 잘해주고 있고.’
피융!
렐은 지금까지 계속 활로 레이어드를 견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화살을 무시하던 녀석도 점점 세지는 강도에 눈살을 찌푸리며 화살을 쳐냈다.
‘지금.’
그리고 그 틈을 노려 석찬은 적절하게 카운터를 꽂아 넣는다.
쿵-
몸이 아니라 바위를 때리는 것 같은 감촉이다. 그래도 강마력을 섞은 공격이라 그런지 짧게 침음하는 녀석을 보며, 석찬이 작게 미소 지었다.
‘생각보다 맷집이 대단하지는 않다.’
기술의 수준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지만, 석찬은 빠르게 부분 강신을 팔에 적용한 뒤 마력으로 근력을 강화했다.
꾸드득-
순식간에 몇 배로 강해진 근력이 레이어드의 몸을 강타한다.
콰직!
확연히 다른 타격음과 함께 레이어드의 몸이 쭉 밀려났다. 이때다 싶은 석찬이 맹공을 이어 나갔다. 게다가 렐의 화살 세례까지 곁들이니 효과는 더욱 좋았다.
그러나 괜히 80층의 보스가 아니라는 듯, 금방 공격을 파훼한 녀석이 무시무시한 난무를 펼쳤다.
‘쳇.’
게다가 녀석의 압도적인 회복 속도에 부분 강신으로 입혔던 대미지가 벌써 완치되어 있었다.
‘허…’
[미친놈.]
라우르 또한 그 말도 안 되는 현상에 침을 삼켰다.
파앗.
그때, 레이어드의 신형이 사라졌다. 목표는 당연히.
“조심해!”
석찬이 마력파로 렐을 밀쳤다. 그녀가 있던 자리로 거대한 장검이 떨어졌다.
쾅!
까딱 잘못했으면 그대로 머리가 반으로 쪼개졌을 거라는 생각에 렐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젠장. 분위기가 달라졌다.’
석찬은 눈에 띄게 변한 레이어드의 마력에 몸을 긴장시켰다.
[그렇게 큰 파워업은 아니야. 후작급까지는 성장하지 못했어. 기껏해야 백작급 중 상위 서열 정도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히 위협이 됐다.
‘젠장, 그걸 한번 써봐야 하나.’
‘그거’라는 단어에 라우르가 놀라 소리쳤다.
[지금 쓰게? 한 번도 성공한 적 없잖아. 잘못하면 골로 갈 텐데?]
‘어쩔 수 없잖아요.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그리고.’
파스스-
석찬의 머릿결이 희게 물들었다.
‘부분 강신 - 반신 ver.’
현시점에서 몸에 별다른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 중 최강의 기술이다. 거기에 더해.
스르릉
석찬이 강마력으로 이루어진 검을 꺼내고 순도 100% 마력의 라우르의 신력을 덧댄다.
고오오—
그 순간.
쾅!
검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 뿜어져 나왔다.
“인…간.”
검에서 풍기는 말도 안 되는 위력에 레이어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말할 줄 알았냐? 근데 왜, 쫄리냐?”
석찬은 장검을 한두 번 빙빙 돌리며 몇 주 전의 일을 떠올렸다.
* * *
“학, 학! 그만… 제발 그만해 주세요…”
렐의 혼이 빠져나갈 때까지 기초 체력을 단련시킨 랜스는 잠시 석찬을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훈련에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너한테 궁금한 점이 있어서 말이야.”
“궁금한 점?”
“아, 별건 아니고. 저번에 나랑 대련할 때 썼던 마지막 일격 말이야. 한 번만 더 볼 수 있을까?”
마지막 일격이라는 것은 필시 얼티밋 피스트에 신력을 덧댄 공격을 뜻하는 것이리라.
“근데 그걸 갑자기 왜?”
“아, 보여달라면 보여줘 봐. 그게 아마 너한테도 이득일 테니까.”
조금은 꺼림직했지만, 간곡한 애원에 결국 부분 강신과 함께 ‘신력 + 얼티밋 피스트’를 재현했다.
“호오…”
랜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강마력으로 이루어진 주먹을 쓱쓱 만져댔다.
“뭡니까? 이걸로 대체 뭘…”
“가만있어 봐.”
그는 ‘신력 + 얼티밋 피스트’를 열심히 뜯어봤다. 상하‧전후좌우로 기술을 훑어본 그는 고민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너, 내가 썼던 거 한번 해볼래?”
“당신이 썼던 거요?”
“이거 말야.”
랜스는 허공에서 마력으로 이루어진 창을 소환해냈다.
석찬도 그에 따라 마력으로 장검을 만들어냈다.
“좋아. 이제 그 위에 신력을 씌울 수 있겠어?”
“신력이요?”
마력에 신력을 섞는다면 모를까, 신력을 씌우라고?
“생각해봐. 우리가 그냥 무기에다 마력을 두르잖아? 이 마력을 무기라고 생각하고 그 위에 신력을 덮어씌우는 거야.”
이론은 간단했지만, 실전은 전혀 아니었다. 마력과 신력을 분리하라니, 기술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실제로도 석찬은 도전에 도전을 거듭했지만, 계속해서 실패를 맛봐야 했다.
“근데, 이게 저한테 도움이 돼요?”
한 200번쯤 실패했을까? 석찬은 랜스에게 따지듯 물었다. 하지만 랜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신력과 마력은 물과 기름 같은 존재야. 그래서 네가 한 것처럼 두 개를 섞으면 위력이 반감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만약 두 힘을 정확히 분리해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면?
“1 더하기 1이 2가 아니게 되는 거다. 그리고 언제까지 무식하게 주먹으로만 싸울 거냐? 너 정도 재능이면 검이나 창 정도는 금방 배울 텐데, 이참에 창술이나 조금 배워서 가라.반드시 도움이 될 거다.”
그 말에 솔깃한 석찬은 마력과 신력을 분리하는 훈련을 진행함과 동시에 창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잠재력이 높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스탯이 높아서 그런 것일까? 창술을 배운 지 아직 일주일이 되지 않았건만, 석찬은 어지간한 창술사만큼 창을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조금은 아쉽네.’
어느새 랜스를 떠나보낼 시간이 되었다. 그동안 마력과 신력을 동시에 사용하며 분리하기 위해 꽤나 노력했지만 아직 목표한 것의 7할도 미처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랜스는 그것마저도 놀랍다는 듯 말했다.
“허어, 벌써 이 정도까지 해낸다고? 너 솔직하게 말해. 인간 아니지?”
“인간인데요. 지구라는 행성의 순수한 인간.”
“순수는 개뿔, 악마도 그렇게는 못 하겠다.”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의 손에 들린 남색 창을 바라보던 랜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뭐, 그래도 힘내라. 만약 네가 정말 그걸 할 수 있다면…”
‘우리 말고는 더 이상 널 상대할 놈은 탑 안에서 존재하지 않을 거야.’라는 뒷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럴 일은 드물겠지만, 녀석이 자만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렇게 랜스와 작별하고, 문제의 세계수 타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시간은 다시 현재로 돌아와….
* * *
석찬은 빛나는 녹안으로 마력과 신력의 검을 둘러보았다.
‘성공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100번 중에 100번을 실패하던 기술이 단박에 성공한 것이다.
기술이 성공한 데는 한 가지 큰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강신의 여부였다.
‘라우르의 눈.’
마력 회로만 읽을 줄 알았던 눈이 신력의 흐름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고, 덕분에 ‘뽀록’으로나마 기술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진짜 ‘뽀록’이네.]
‘뽀록이면 뭐 어때요.’
성공하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힘으로 이기면 된다.
[그래, 맞지. 어디 한번 해봐라. 지면 나한테 먼저 뒤질 줄 알고.]
‘후우…’
석찬은 차분하게 양손으로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검을 휘두르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렇게 검사처럼 싸우는 것은 15년이 넘어가는 탑 인생 중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 두려움이나 떨림 따위는 전혀 없었다.
씨익-
오히려 자신감 넘치는 미소와 함께 검을 크게 내리찍었다.
콰과광!
순간 번개가 치는 듯한 환상과 함께 레이어드의 몸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크으….”
물론 녀석도 나름 보스라고 일격에 죽지는 않았다. 새카맣게 탄 피부와 상처들을 회복하며, 녀석은 검을 고쳐 쥐었다.
곧이어 두 남자가 다시 격돌했다. 하지만 격돌의 세기는 이전과 비교할 수도 없었다.
콰직! 콰광!
한 합마다 주변 지형이 초토화되며, 땅이 무너져 내린다.
“아저씨, 대박.”
일찌감치 멀리 떨어져 있던 렐이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며 몸을 떨었다. 두려움? 공포? 지금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그런 게 아니었다.
‘전율.’
그녀는 지금 전율을 느꼈다. 저 정도 무력이라면 감히 상대할 자가 없을 것 같았는데, 심지어 레이어드는 이를 막아냈다.
“크윽….”
물론 여유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검을 막는 팔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이는 석찬도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몸에 부담이 많이 돼.’
부분 강신으로 강화된 신체가 무기의 힘을 완전히 감당하지 못했다.
[빨리 끝내야겠다. 상처에다가 페널티까지 겹치면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어.]
‘옙.’
석찬은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레이어드처럼 정교하고 완벽한 검술은 아니었지만, 십수 년간 봐온 검술을 나름 따라 하며 무기의 힘으로 그를 찍어 누른 석찬이 단숨에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고오오—
그의 손에 긴 창이 생성되었다.
척, 석찬은 랜스에게 배운 투창 자세를 잡았다. 강마력으로 이루어진 창 위로 신력이 덧씌워진다.
꾸득, 팔의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지만, 애써 무시하며, 석찬은 레이어드를 조준했다.
“인간… 인간!”
그가 검에 검은 마력을 잔뜩 씌웠다. 다음 일격이 녀석의 전력이라는 것을 직감한 석찬도 전력을 다해 창을 던졌다.
그에 맞서 레이어드도 검을 휘둘렀다. 검 주변에 둘러싸인 검은 마력이 단단하게 뭉쳐 창을 향해 쇄도했다.
콰직!
처음은 버티는 듯싶었지만, 검은 마력은 신력이 듬뿍 담긴 창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져 이내 흩어졌다.
“크윽….”
자신의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창을 보며, 레이어드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겸허한 자세로 죽음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다크 엘프 킹 - 레이어드를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최초로 세계수 타기를 전부 클리어했습니다.]
[추가 보상이 지급됩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메시지 창과 함께, 어질어질 현기증이 나면서 석찬은 정신을 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