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세계수 타기의 기한이 줄어듭니다.]
[남은 시간 - 6일 20시간 30분 13초.]
메시지는 워낙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본래 남은 시간이 21일이었으니, 이벤트 기한이 무려 2주일이나 줄어든 것. 그것도 별다른 기별 없이 단번에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일에 그리 큰 불만을 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래, 이번 이벤트 난이도가 그따구인데, 차라리 일찍 끝내라.”
그렇다. 역대 최악이라고 불릴 난이도에 사람들은 오히려 이벤트를 당장 끝내라는 말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찬성하는 이 공지에 불평을 가지는 무리가 있었으니.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뭐에요, 이거?”
석찬과 렐 그리고.
[허허, 이 자식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라우르였다.
특히 석찬은 더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열심히 해서 76층까지 왔는데 갑자기 남은 기한을 이렇게 줄여버린다는 것이었다.
-웅웅
그때, 그의 왼손에 새겨진 천계의 문장이 진동했다.
파앗-
그와 함께 에피르의 형상이 문장 위로 떠 올랐다. 탑에 내려온 것이 아닌 홀로그램 형상처럼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렐이 호기심을 비쳤다.
“에피르? 그 모습은 뭐야?”
“전달해드릴 말이 있을 때마다 탑에 내려갈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원래 이것도 천계 소속이 되면 얻을 수 있는 혜택입니다만… 이제야 써보네요.”
“용건이 뭔데.”
“아마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전에 띄운 공지에 대해서 말인데….”
콰직-
공지라는 말이 나온 순간 석찬이 쥐고 있던 세계수 껍질이 바스러졌다.
“똑바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화가 나신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쪽에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뭔 사정인데. 설마 G가 말했던 그거?”
“…맞습니다.”
에피르는 할 말이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직까지도 천계에서는 당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분이 많습니다.”
“왜 그런 거지?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건 당신이…”
에피르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답답한 듯 명치를 연신 두드렸다.
“후, 잘 들으세요. 지금 당신의 탑 등반 속도는 너무 빠릅니다.”
“응?”
솔직히 석찬의 입장에서는 탑을 너무 빨리 오른다는 것이 자신이 미움받는 이유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탑을 빨리 오르는 것이 왜 죄란 말인가?
“예전에 제가 당신을 견제한 시절도 있었던 것, 기억하시죠?”
“아, 물론.”
10년도 더 전, 마력 날개도 봉인시키고 퀘스트 내용도 이상하게 바꾼 장본인이 에피르였다.
“그때 생각하니까 갑자기 짜증 나네. 그게 왜?”
“그때도 당신의 등반 속도를 낮추려고 그런 일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이유가 뭔데?”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콰직-
그 말에 세계수에 선명한 주먹 자국이 생겼다.
“똑바로 말해라.”
“말씀을 못 드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에피르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석찬 님, 제가 비록 과거에는 당신을 증오했으나, 지금은 당신의 담당 천사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은 제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됐고, 이유나 말해. 왜 탑 등반 속도를 늦추려는 건데?”
“……”
여전히 그 질문에 대해서는 벙어리인 에피르. 석찬은 신경질적으로 통신을 끊었다.
[너무 화내지 말아라.]
‘라우르.’
[솔직히 나도 왜 그런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탑의 등반 속도를 낮추려고 한다니. 허허.]
하지만 이렇게 된 거 어쩔 수가 없다.
[남은 일주일, 전력을 다해 올라야 할 거다.]
‘그래야죠.’
석찬은 남은 거리를 확인했다.
[현재 위치 : 76층 89%]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고 판단한 석찬이 결단했다.
“렐, 업혀.”
“에?”
“빨리.”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을 하면서도, 석찬의 등에 올라타는 렐. 석찬은 과거 마력 날개를 봉인 당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이런 식으로 이브를 메고 다녔었지.’
물론 지금 등 뒤에 탄 사람은 이브가 아니었지만, 상황은 비슷했다.
사아아-
머리색이 하얗게 물들었다. 동공이 녹빛으로 물들었다.
“꽉 잡아.”
꾸드득.
받치고 있던 홈이 부서지고, 석찬의 몸이 공중으로 쇄도했다.
“꺄아악!”
렐의 비명소리와 함께, 석찬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나무줄기를 붙잡았다.
탁.
줄기를 버팀목 삼아 착지에 성공한 석찬이 다시금 위로 날아올랐다. 비행 수단 따위가 아닌, 단순한 점프력이었다.
‘그래, 해보자 이거지?’
이렇게 된 거, 일주일 안에 80층 찍는다. 그렇게 다짐한 석찬이 다시금 하늘을 날았다.
* * *
‘저건…’
석찬과의 통신이 끝난 후, 에피르는 변화한 석찬의 모습을 살폈다. 머리카락이 흰색으로 물든 석찬. 분명 천사의 힘을 쓴 것은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저것이 신의 힘.’
그의 몸 주위로 흐르는 강인한 신력에 침을 삼키는 에피르. 그녀는 알고 있었다. 석찬에게 주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물론 반쯤은 잘못된 정보이지만 말이다.
‘신력… 엄청나게 진하다.’
에피르가 왼손을 펴 신력을 운용해 보았다. 천사장,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강한 그녀답게 신력은 맑고 강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 신력에 비하면 내 것은…’
달빛 앞의 횃불 따위에 불과했다. 그 정도로 석찬의 신력은 어마어마했다.
‘파괴신이 저렇게 강했나?’
파괴신은 신계에서 무력 하나는 최고라 불리는 신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파괴신조차 저런 힘을 가졌을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 이상해.’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파괴신이 아니면 저런 막강한 힘을 화신에게 부여할 수 있는 신도 없었다.
‘끄응…’
생각할수록 머리만 아파와, 에피르는 결국 생각을 비우고 석찬의 행동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하지만.
[쾅! 쾅! 쾅!]
76층의 보스 몬스터를 너무나도 쉽게, 무자비하게 박살 내며 위로 다음 층으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 더욱 큰 두통을 느끼며 화면을 끄는 그녀였다.
* * *
다음 날.
세계수 타기 이벤트가 끝나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고작 5일 13시간.
77층의 보스 몬스터를 박살 내며, 석찬은 78층에 올라설 자격을 획득했다. 이브 일행이 세웠던 최고 기록을 경신한 것은 덤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검은 나무 정령들을 보며, 라우르가 말했다.
[보스가 조금은 달라졌는데?]
‘예.’
77층의 보스는, 지금까지 나타났던 앤트 가디언이나 그 상위종과는 조금 달랐다.
‘엘프.’
그것도 일반적인 엘프가 아니라 잿빛 피부를 지닌, 마치 악마와도 같은 외형의 엘프였다.
시스템은 녀석들을 다크 엘프라고 칭했다. 그리고 다행히 다크 엘프가 어떤 녀석들인지 아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었다.
한 명은 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라우르였다.
[얼핏 기억이 나. 악마한테 제 영혼을 판 버러지들.]
다크 엘프가 악마와 비슷한 겉모습을 지닌 이유는 바로 그들이 악마의 계약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악마와도 계약을 할 수 있어요?’
[물론이지. 천사랑도 계약하는데 악마랑은 못하겠냐? 그리고 악마와 계약하면 그 정도에 따라 천사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얻을 수 있어서 인간 중에서도 악마와 계약하는 녀석들이 많았어. 지금은 모르겠지만.]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그와는 다르게, 렐은 벌레 보는 듯한 표정으로 다크 엘프의 시신을 노려봤다.
“렐, 다크 엘프에 대해 아는 거 있어?”
“역겨운 놈들.”
렐에게 들어보니, 다크 엘프는 엘프들 사이에서도 배신자, 벌레 취급을 받는다고 했다. 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78층으로 올라가는 석찬에게, 라우르가 충고했다.
[앞으로 조심해야 할 거다. 지금보다 더욱 강한 놈들이 있을 테니.]
‘네.’
당연하게도 다크 엘프들은 강했다. 이번에 보스로 나온 녀석은 다크 엘프 전사와 메이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 그런지 신체 능력과 마법 능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수하인 다크 엘프 병사들도 만만치 않았다. 랜스에게 가르침을 받고 강해진 렐을 상대로 4대 1을 거뜬히 해내는 모습에 솔직히 적이지만 감탄하기도 했다.
‘남은 층은 세 개.’
조심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호기심이 일었다. 다음 보스는 얼마나 강할까? 또 자신의 힘이 어디까지 통할까 등등. 오랜만에 호승심이 불타오른 석찬이 세계수를 올랐다. 빨리 다음 보스를 만나고 싶었다.
78층에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 고작 15시간. 보스를 잡는 데 걸린 시간 25분.
다크 엘프 메이지를 수하로 거느리는 다크 엘프 프리스트를 압살한 석찬과 렐은 곧장 79층으로 향했다.
79층 보스룸에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은 13시간. 간만에 투지가 불타올라서인지 등반 난이도가 상승했음에도 시간은 더 줄어들었다.
79층의 보스는 나름 강했다.
다크 엘프 제너럴.
다수의 다크 엘프 전사와 병사들을 거느린 녀석은 인해전술을 비롯한 뛰어난 피지컬과 기술로 석찬과 렐을 압박했다.
본신의 무력이 남작급 악마와 비슷한지라 석찬도 부분 강신 사용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보스를 토벌하는 데 걸린 시간은 1시간 남짓.
게다가 싸움이 끝났음에도 석찬은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80층의 보스를 기대하며 세계수를 올랐다.
그렇게 하루 뒤, 세계수 타기가 끝나기까지는 이제 고작 3일 정도의 시간밖에 남지 않은 상태.
하지만 석찬은 전혀 조급하지 않았다.
[현재 위치 : 80층 휴식 공간]
그렇다. 석찬은 지금 꿈에 그리던 80층에 올라와 있었다. 심지어 근 다섯 시간 정도는 휴식에 열을 다한지라 컨디션도 만땅.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보스와 겨룰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석찬은 기다렸다.
‘조금만 더 있으면…’
그의 눈앞에는 가부좌를 튼 채 명상 중인 렐이 있다. 지금 그녀의 마력은 심히 요동쳤다.
주황빛 마력이 파도가 치듯 넘실거리는 모습에 석찬이 씩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빨라.’
지금 렐은 무려 세 번째 돌파를 앞두고 있었다. 빨간색, 주황색을 넘어서 노랑색 등급의 마력을 만드는데 도전하는 그녀를 보며, 석찬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야, 너보다 빠른 것 같다?]
렐이 이 수준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한 달이 채 안 됐다. 물론, 에피르의 힘으로 얻은 무시무시한 스탯과 랜스라는 희대의 스승의 가르침도 한몫하긴 했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돌파까지 걸린 시간은 극히 짧았다.
‘역시 잠재력 100.’
물론, 석찬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말이다.
2시간 후, 돌파에 성공한 렐이 노란색으로 변한 마력을 이리저리 흔들어 보았다.
“아저씨, 대박이죠?”
“그래, 잘했다.”
적당한 칭찬과 함께 그녀를 진정시킨 석찬이 저 멀리 보이는 한 인영을 응시했다.
“…….”
수 시간째 자신들을 쳐다보는 한 마리의 다크 엘프. 석찬은 저 녀석이 보스라는 것을 단숨에 직감했다.
그리고, 녀석을 향해 나아갔다.
[80층의 보스, 다크 엘프 킹 - 레이어드와 마주했습니다.]
[도망을 권고합니다.]
도망 권고.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메시지 창이다. 석찬은 가볍게 메시지를 치우며 다크 엘프 킹에게 다가갔다.
“안녕?”
“…….”
다크 엘프 킹은 말이 없었다. 그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들 뿐이었다. 석찬도 더 이상 말없이 주먹에 마력을 덧씌웠다.
잠시 후.
휘잉-
후웅-
두 남자가 격돌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