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71층으로 향하는 길.
“와우.”
석찬은 멋들어진 보스방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벤트라서 이런 것일까 아니면 원래 이런 걸까?
자연과 인조 건물이 잘 어우러진 장소에 도착한 석찬은 메시지 창을 읽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보스 룸에 도달했습니다.]
[보스를 처치할 시 71층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현재 휴식 공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휴식 공간?’
탑에 들어와서 처음 누려보는 호사에 이게 웬 떡인가 싶으면서도 시간을 버리지 않기 위해 빠르게 이동했다.
“아저씨, 여기 되게 신기하게 생겼어요.”
“그러게나 말이다.”
조금 전까지 나무를 오르던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평평한 지형을 5분 정도 걸었을까? 저 멀리서 소음이 들려왔다.
“저건….”
시력을 강화해 상황을 살펴보니, 보스 몬스터로 추정되는 거대 몬스터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녀석과 대치하고 있었다.
‘오호? 한번 살펴볼까나.’
호기심이 생긴 석찬은 걸음을 멈추고 싸움을 구경했다. 렐 또한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싸움을 지켜봤다.
“하압!”
선두에 서 있던 수인 남성이 자기 몸집보다 거대한 대검을 휘둘렀다.
“쿠어어!”
그에 맞서, 70층의 보스 몬스터, 앤트 가디언이 다리에서 여러 줄기를 뻗어 사람들을 교란했다.
‘앤트 가디언. 또 너냐.’
세계수 타기의 첫 시작 때도 나타났던 보스 몬스터 앤트 가디언. 이번에 나타난 녀석은 처음에 봤던 놈보다 1.2배 정도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다.
‘그보다, 전전 이벤트에서는 75층 보스였다면서. 이 정도면 밸런스 망한 거 아닌가?’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이벤트를 되돌릴 수는 없는 일. 게다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앤트 가디언 정도로는 석찬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저 녀석들은 꽤나 힘겨워하는 것 같네.”
“그러게요.”
무수히 많은 뿌리를 쳐내며, 선두에 섰던 수인 남자가 짜증 섞인 말을 뱉어냈다.
“이게 무슨! 앤트 가디언은 분명 75층에서… 거기 막아!”
쾅!
말이 끝나자마자 뿌리 하나가 엘프 여성의 가슴을 꿰뚫었다. 결과는 당연히 즉사였다.
“힉….”
그 모습을 본 렐이 살짝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같은 종족이 죽으니 조금은 정신적 타격이 있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네…”
석찬은 마저 싸움을 지켜봤다. 인간과 이종족 6명으로 이루어진 파티는 금세 전멸했다. 아니, 애초에 싸움이란 것이 성립되지 않을 정도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중간에 도와줄까 생각도 했었지만.
[타 파티의 도전 중에는 난입할 수 없습니다.]
이런 메시지와 함께 일정 범위 안으로 진입할 수 없었기에 석찬은 그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봤는데 정신이 평온할 리가 없었다.
“넌 내가 빠르게 죽여주마.”
아직까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보며, 석찬은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쿠궁-
공간이 진동했다. 어두운 기운을 잔뜩 뿜어대는 남색 마력에 앤트 가디언이 흥미롭다는 듯 줄기를 날렸다.
탕, 탕!
하지만 렐의 화살에 전부 저지된 줄기들. 석찬은 마력 무기를 생성해 앤트 가디언에게 날렸다.
“쿠어?”
녀석도 당연히 방어를 위해 줄기들을 엮어 거대한 벽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녀석은 알지 못했다. 저 마력 무기가 일반적인 마력 무기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콰직- 콰지직!
순도 100% 강마력으로 이루어진 창에 나뭇가지 벽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것도 모자라 앤트 가디언의 왼쪽 눈을 정확히 꿰뚫는 창.
“쿠에에엑!”
앤트 가디언이 가냘픈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석찬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 공격해!”
피융!
렐의 화살 세례가 빗발쳤다.
나무에 특효약인 불화살을 끊임없이 퍼붓자, 앤트 가디언의 몸이 불타기 시작했다.
”쿠어억!”
앤트 가디언이 활활 타오르는 팔을 휘둘렀다.
쿵!
거대한 충격과 함께, 바스러진 나뭇가지들에 불이 옮겨붙는다.
화르르-
게다가 주변 자연환경에까지 불이 붙으며, 보스룸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어버렸다.
“렐, 조심해.”
“넵.”
두 사람 다 보호막을 사용할 수 있으니 별 타격은 없었지만, 앤트 가디언은 아니었다.
불을 끄려고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불은 더욱 크게 번지고 다시 몸을 태우기를 반복했다.
10분 정도 흘렀을까?
쿵.
새까맣게 변한 앤트 가디언의 시체가 바닥을 누웠다.
[70층의 수호자 : 앤트 가디언을 처치했습니다.]
[71층 세계수 영역이 개방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예상외로 레벨이 3개나 올랐다. 렐은 레벨이 다섯 개 올랐다며 자랑했다.
한 것은 별로 없긴 했지만, 저도 모르게 쌓인 피로가 있을 수도 있으니 휴식 공간으로 돌아가 한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석찬과 렐은 슬슬 위로 올라갈 채비를 했다.
“위층으로는 어떻게 이동하는 거지? 층 이동?”
[71층으로 이동하겠습니까?]
[주의! ‘세계수 타기’ 이벤트 진행 도중에 세계수 외 다른 지역으로 입장할 수 없습니다.]
“아. 찾았다.”
정말 더는 볼 일이 없어진 석찬이 위층으로 올라가고자 명령어를 말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메시지 창 사이로 한 남자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익숙한 남자였다.
“G?”
안내자 G. 그의 등장에 석찬은 고개를 갸웃하고, 렐은 두 눈을 의심했다.
“안내자? 안내자가 왜 여기에…”
“렐 님이시군요. 천사장과도 대면했던 분이 고작 저를 보고 놀라시다뇨? 하하.”
역시나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농담을 건네는 G.
“갑자기 나타난 용건은?”
“석찬 님, 저희 사이에 단지 얼굴 보는데 굳이 용건이란 게 필요하나요?”
[꺼져라.]
냉정한 일갈에 G가 더더욱 서러운 표정으로 석찬을 응시했지만, 무슨 반응을 기대했는지 몰라도 그가 바라는 반응은 없었다.
“쳇. 재미없는 분들 같으니라고.”
결국 꼬리를 내리며 양복을 가다듬는 G. 그는 슬쩍 렐을 바라보더니 석찬에게 물었다.
“아니, 지금 위에서 난리입니다.”
“무슨 난리.”
“아까 렐 님이 쓰신 그 기술 말입니다.”
“불화살? 그게 왜.”
“원래 앤트 가디언이란 몬스터가 그렇게 불이 잘 붙지 않습니다. 그렇게 쉽게 공략이 가능했다면 보스 몬스터로 분류되지 않죠.”
하긴,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불이라는 간단한 요소로 가볍게 공략이 가능한 몬스터가 무슨 보스 몬스터란 말인가. 그냥 경험치 많이 주는 일반 몬스터지.
하지만 여기서 석찬과 렐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G의 설명대로, 본래 앤트 가디언에는 화염 계통 스킬이 먹히지 않는다.
그런데 스킬이 아닌 다른 메커니즘으로 기술을 사용하는 마력 운용자의 특성상, 화염 스킬 자체에 면역을 가지는 앤트 가디언의 특성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은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마력 운용자의 화염이 제대로 통한다는 것도 아니었다. 천계가 바보도 아니고 마력 운용자의 화염 마법 사용을 예상 못할 리가 없었으니. 그래서 본래 앤트 가디언은 남색 마력 운용자가 쓰는 화염 마법도 거뜬히 견뎌내게 설계됐다.
하지만, 천계에서 정말 예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설마, 그분께 배운 것 때문인가?”
랜스.
알렉산더의 동료였던 그는 현재 90층 마을에 거주하는 탑의 최강자 중 한 명이다. 그리고 지금 G의 눈앞에는 그의 첫 수제자가 있었다.
‘그의 이명은 마력의 대가.’
마법사도 아닌 창술사가 그런 이명을 얻었다는 것도 어이가 없긴 하지만, 실제로 랜스는 마력 자체에 대한 이해도 상당했다.
게다가 수백 년간 마력을 사용하면서 마력에는 거의 통달했다는 평마저 들었으니.
‘새로운 발견을 한 건가.’
그런 그라면 앤트 가디언에게 통하는 화염 마법을 만들었을지도 모르고, 렐이 그 마법을 전수받아 사용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젠장. 이러면 계획이 꼬이는데.’
세계수 타기. 이번 회차에 들어서 갑작스럽게 변경된 난이도 때문에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탑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이벤트다.
이렇게 밸런스가 붕괴된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인간.
최단기간에 탑을 70층까지 뚫어버리고(그 이상의 기록은 동료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성장 속도로 끊임없이 강해진 그는 급기야 천계의 간택까지 받으며 탑의 정상급 강자가 되어버렸다.
‘그 ‘랜스’와의 대련에서 무승부라니.’
다시 생각해도 그때의 대련은 말도 안 됐다. 물론 랜스가 신력을 사용하지 못하고 조금 봐줬다고 하더라도 그는 탑의 최정상급 강자로 수십 년간 군림해온 인간이다.
어쨌든 이러한 밸런스 붕괴급 인간이 나타났으니 천계에서는 골머리를 썩였다. 심지어 이번 세계수 타기 이벤트를 쉬어갈까 생각도 했으니, 그 고민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결국 그들은 결정했다. 밸런스를 오로지 강석찬이라는 인간 하나에 맞춰서 급상승시킨다는 초강수를 두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상당수, 아니 대부분 사람이 죽어 나갔다. 100명 중 90명이 죽거나 탈락하는 역대 최악의 이벤트였지만, 천계 측은 이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석찬을 저지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천사장 에피르가 따지기도 했다. 이미 수년 전에 천계와 계약까지 한 마당에 그렇게까지 그를 견제해야 하겠느냐고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가장 앞장서서 그를 견제하던 녀석이 말이 많구나.’
게다가 몇몇 대천사와 천사장은 그와 계약을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에피르를 무시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여기서 화염 마법이 통한다면.’
기껏 욕먹어가며 짜놓은 퀘스트들이 전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그것을 알기에 천계에서는 G를 파견했다. 석찬을 말리기 위해서.
하지만.
“근데? 그래서 뭐.”
“그 불화살 기술 좀… 어떻게 해주시면 안 되는지…”
“싫은데?”
굳이 녀석들의 눈치를 봐가며 마법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G의 반응을 통해 석찬은 더더욱 자신감을 얻었다.
‘이거, 생각보다 빠르게 80층에 도달할 수 있겠는걸?’
“…저는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G는 결국 별 소득 없이 천계로 돌아갔다.
“천계의 모두가 당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쇼.”
언제나처럼 경고와 함께 자리를 떠나는 그를 뒤로하고, 석찬과 렐은 파죽지세와도 같은 기세로 세계수를 올랐다.
세계수를 타는 중간중간에 나오는 장해물들의 강도가 점점 거세졌지만, 두 사람을 막아 세우진 못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흐르고, 석찬이 76층에 올랐을 무렵. 새로운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