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석찬과 이브. 동료 사이에서 이제는 연인이 된 두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축하 인사는 받았지만.
“축하한다, 새꺄.”
“드디어 해낸 건가….”
“아저씨랑 아줌마 사귀는 거예요?”
렐의 질문에 석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축하드려요.”
“모두 고마워.”
엘리자베스와도 마찬가지였다.
“축하해요.”
그녀는 진심으로 석찬과 이브의 관계를 축하해줬다.
“괜찮아요?”
조심스레 묻는 이브에게, 엘리자베스는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솔직히 완전 괜찮지는 않은데 받아들여야죠, 뭐. 그나저나, 궁금한 게 있는데 이브는 왜 석찬 님을….”
큰 거리감 없이 대화를 나누는 두 여인을 보며, 석찬은 내심 안심했다.
‘예전 같지는 않더라도….’
친하게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건 너무 욕심 같은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자 친구랑 찬 여자보고….]
‘욕심이죠. 그래도, 전 그랬으면 해요.’
[뭐, 두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
“그때….”
“이때는 어땠는데요?”
서로 이것저것 물어보며 웃고 떠드는 이브와 엘리자베스.
“우리는 슬 나가볼까?”
“그래, 석찬아. 바람이나 쐬러 가자.”
두 사람을 위해, 석찬과 남자들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전투의 흔적이 남은 세계수 주변. 진현은 반쯤 박살 난 뿌리 위에 걸터앉았다.
“예전에도 느낀 거지만, 엄청 딱딱하네, 이거.”
“그럼, 세계수의 뿌리가 물렁하다고 생각한 건가?”
“아저씨도 올라와 봐요. 여기 풍경 좋으니까.”
“풍경 따위나 보려고 나온 것이냐?”
“풍경이 뭐 어때서?”
“훈련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훈련성애자가….”
언제나처럼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석찬은 묵묵히 렐을 훈련시켰다.
“대부분은 랜스 님이 잘 다듬어주셔서 괜찮아. 지금 너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살기의 조절이야.”
“살기?”
“그래. 살기로 기선 제압을 하는 법을 알아야 돼.”
이해를 돕기 위해, 석찬이 두 눈을 부릅떴다.
오싹.
그러자, 차가운 기운이 렐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몸이 떨려오고, 다리에 힘이 풀린다.
털썩.
전에도 느껴본 적 있는 기운이었다.
지금 구멍 안에서 하하호호 웃고 있는 아줌마한테서 느꼈었고, 블랙카우의 사람들에게서도 느낀 기운.
“이게 살기예요?”
“그래. 살기를 잘 컨트롤할 수 있게 된다면, 불필요한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고, 싸움에 있어서도 꽤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어.”
물론, 이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살기는 재능과 경험이 전부다. 살기를 잘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사선을 넘나드는 것이 필수다.
‘하지만, 렐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지.’
랜스가 살기를 가르치지 못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싸움도 그렇고, 살기도 그렇고 렐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바로 이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석찬은 더더욱 서둘러 이벤트를 준비했다.
‘이번 세계수 타기로 렐의 경험을 최대한 쌓아야 해.’
한 달, 아니 이제는 한 달도 남지 않은 기간. 부족하다고 느낄 수도 있었지만, 렐의 재능, 100의 잠재력이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진현아!”
“엉?”
어느새 천무진과 주먹을 맞대고 있던 진현이 고개를 돌렸다.
“싸우지 말고, 잠깐 내려와 봐.”
“뭔데? 잠깐 놔보쇼, 아재.”
“나 아재 아니라고.”
천무진의 말은 가볍게 무시하며, 진현이 뿌리에서 뛰어내렸다.
“뭔 일이냐.”
“세계수 타기. 해본 적 있지?”
“물론. 당시 우리 파티가 최고 기록 갱신하고 말이야, 어?”
석찬이 빠진 진현 파티는 2년 전 참가했던 세계수 타기 이벤트에서 77층을 달성, 기존 최고 기록이었던 76층을 넘어 새로운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 전에 76층을 달성했다는 파티가 어디인 줄 알아?”
“어딘데.”
“듣고 놀라지나 마셔. 스승님 파티였대.”
“아.”
알렉산더의 전성기 시절에 세웠던 기록을 깨다니. 꽤나 열심히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 내가 71층에서 말이야….”
갑작스럽게 시작된 진현의 일대기. 쓸데없는 이야기가 한가득했지만, 유익한 정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줄기는 곧게 뻗어 있지만, 특정 구간을 지날 때 변형할 수도 있다라.’
그것 말고도 줄기에서 새로운 가지가 피어올라 공격하거나 몸을 구속할 수도 있다고 한다.
“75층 보스는 진짜 강했는데….”
게다가 한 층을 건널 때마다 보스 몬스터를 상대해야 한다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궁금한 점이 생겼다.
“진현아, 너희가 2년 전에 최고 기록을 세웠다고 했나?”
“엉? 응. 단일 기간에 7층 돌파. 캬, 지리지 않냐?”
“그럼 2년 전에 처음으로 참가했다는 거지?”
“응.”
그렇다면, 과연 자신이 훈련에 들어간 후부터 이벤트에 참가하기까지의 5년은 어디 갔단 말인가?
‘탑을 올랐나? 아니지.’
50층 사건의 보상으로 70층까지 층이 단번에 해금된 것은 석찬만이 아니었다. 이브, 진현, 천무진. 세 사람 다 7년 전에도 70층에 입장할 수 있었다.
‘그럼 5년 동안 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하니, 진현이 비실비실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응?”
“딱 기다려.”
그는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어라, 분명 여기다 넣어뒀는데?”
“뭘 찾는데?”
“기다려.”
몇 분을 더 뒤적인 끝에, 진현은 종이를 하나 꺼내 석찬에게 건넸다.
“이건?”
“읽어 봐.”
종이의 정체는 바로 석찬이 떠나기 전에 남겼던 편지였다. 편지의 중간에는….
[5년 정도 있을 것 같아.]
‘……’
그것을 보니 대충 이해가 됐다.
“5년 동안 기다린 거야?”
“물론이지. 우리라고 너 빼고 우리끼리 오르고 싶었겠냐? 근데 어떻게 사람이 7년 동안 코빼기도 안 보일 수가 있냐?”
[니가 잘못했네.]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 세계수 타기에 참가했지. 만약 다섯 층 이상을 못 오르면 수련을 더 할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층을 많이 오르게 돼서 말이야. 계속 오르게 됐지.”
“미안하다.”
“미안하면 이번에 깨봐. 우리 기록.”
그 말에 석찬이 씩 웃었다.
“물론이지.”
* * *
이틀이 더 지났다. 그 기간 동안 석찬은 준비를 철저히 했다. 진현 말고도 심부름꾼 길드를 통해 이벤트에 대해 대략적인 정보를 파악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을 수 있었다.
‘진현의 정보와 심부름꾼 길드에서 준 정보가 달라.’
둘 중 하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건 또 아니었다. 진현은 말할 것도 없고, 신뢰가 생명인 심부름꾼 길드에서도 지부장이 직접 가져다준 정보다.
‘앤트 가디언이 연관되어 있는 건가.’
세계수 중앙에 나타났던 앤트 가디언, 본래 이 몬스터는 75층의 보스로 출현하는 녀석이라고 하는데, 어째서인지 시작 몬스터로 나왔다.
‘생각해보니 G도 그랬지, 난이도를 올린다고.’
그렇다고 난이도를 이전보다 두세 배씩 올릴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다.
‘뭐, 어쩔 수 없지.’
[난이도 따위로는 막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줘라.]
‘예.’
준비를 마친 석찬과 렐은 곧장 세계수 중앙으로 향했다.
“같이 올라갈 파티원 모집합니다!”
“붕대 싼값에 팝니다!”
그곳은 여전히 사람들도 붐볐다. 첫날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우선 사람 수가 꽤나 줄었다는 것이다. 올라갈 사람들은 올라가고, 아직 팀을 꾸리지 못했거나.
‘낙오한 자들인가.’
몸 이곳저곳을 붕대로 싸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석찬은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세계수를 바라봤다.
“조심해요.”
같이 따라온 이브의 걱정에 석찬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거니까.”
그렇게 말하며, 석찬은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진현, 천무진, 엘리자베스, 로베르트 그리고 이브까지.
“오랜만에 봤는데 생각보다 빨리 헤어지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죠.”
“빨리 올라갈게.”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커플은 다 뒤져야 돼.”
가볍게 포옹하는 두 사람을 보며 진현이 투덜거렸다.
작별 인사를 마친 석찬은 렐과 함께 세계수 앞으로 다가섰다.
“가자.”
“네!”
턱.
세계수에 손을 얹자, 메시지가 들려왔다.
[‘세계수 타기’가 시작됩니다.]
[모든 비행 수단이 금지됩니다.]
[낙오 시 재도전이 가능합니다.]
[현재 위치 - 70층 0%]
현재 위치 창은 사라지지 않은 채 시야 한쪽을 메웠다.
‘그럼 본격적으로 가볼까?’
석찬이 세계수 줄기 사이사이에 난 틈에 발을 걸쳤다. 비행 수단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지 마력은 마음대로 사용 가능했다.
덕분에 석찬은 어렵지 않게 세계수 등반이 가능했다.
휭! 픽!
어디선가 나무줄기와 뾰족한 가지가 날아오긴 했지만 마력 보호막에 막혀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그리고 렐은.
“꺄하!”
재밌다는 듯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줄기를 피하고 있었다. 특유의 말도 안 되는 유연성 덕분인지 별다른 수고 없이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다.
“렐!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
“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렐은 즐거워하며 세계수를 올랐다. 탄력을 받기 시작하니 거리가 끝도 없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저씨, 안 와요? 그럼 먼저 갑니다!”
이제는 자신을 놀리기까지 하는 그녀를 보며, 석찬이 열의를 불태웠다.
“그래, 지금 간다….”
[쩨쩨하게 그거 가지고 삐지냐?]
‘삐진 거 아닙니다.’
[안 삐지긴 무슨, 딱 봐도 삐졌구먼.]
귓가에 대고 실컷 놀려대는 라우르를 가볍게 무시하며, 석찬이 몸에 마력을 한가득 불어넣었다.
“어이, 꼬맹이.”
“엥?”
어느새 렐 옆에 나타난 석찬이 날카로운 나뭇가지를 쳐내며 렐에게 손가락을 뒤집어 내려 보였다.
“아직 팔팔한 나이에 그렇게 느리면 쓰겠어? 조금 더 분발하라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저 멀리 올라가는 석찬. 렐 또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 갑니다, 기다리셔요!”
탁, 탁!
이미 건물들이 점처럼 보일 정도로 높은 높이임에도, 렐은 기꺼이 위쪽으로 몸을 던졌다.
탁.
툭 튀어나온 나무껍질을 움켜쥔 그녀가 석찬을 향해 달려갔다.
“딱 기다려!”
[둘 다 진짜 유치하네.]
물론 때에 따라 더 유치한 신이 하는 말이라 전혀 대미지가 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올랐을까?
“여기가 끝인가.”
세계수는 쭉 이어져 있었지만, 석찬은 알 수 있었다. 지금 그가 도착한 지점이 70층의 끝이라는 것을.
그 증거로.
퉁-
조금 뻗은 손이 무언가에 막힌 듯 튕겨져 나오고.
[현재 위치 - 70층 100%]
[보스 룸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이런 메시지가 생겨났다.
“잡았다, 아저씨!”
곧이어 렐도 끝에 올라왔고, 두 사람은 보스룸으로 이동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