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에피르. 천계에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는 천사장 중 하나인 그녀는 천사장들 사이에서도 단연 으뜸이었다.
천사장 서열 4위.
대천사에 가장 가까운 천사장이라고 불리는 그녀의 등장에, 상급 천사의 표정에 어두운 기운이 엄습했다.
“에, 에피르 님.”
“로제, 다시 한번 말해 보겠어요? 제 계약자께 뭘 한다고요?”
“죄송합니다, 에피르 님. 하지만, 저 인간은 저의 계약자를…”
“그래서요?”
“예?”
에피르는 분노에 차서 말했다.
“당신의 계약자가 제 계약자의 동료를 해하려고 했습니다. 이는 고려하지 않는 겁니까?”
“그중에는 악마, 그것도 엘리자베스와 그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모를 리가 없죠.”
태연한 에피르의 모습에 로제라 불린 상급 천사가 당황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에피르 님의 숙적이란 말입니다.”
“숙적은 맞는데, 석찬 님이 잘 관리해주고 있으니까, 뭐….”
그러면서, 에피르는 석찬을 보며 쿡쿡 웃었다.
“왜…?”
“아니에요. 그냥, 잘되시라고요. 두 분이랑.”
“…….”
아무튼 에피르가 오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우선, 석찬은 정식적으로 로제와 베르톨트에게 사과를 받았다.
“죄송합니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미안…하다.”
베르톨트가 여전히 엘리자베스 쪽을 째려보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일에 참견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보내줬다.
“후….”
“피곤해 보이시네요.”
“응.”
지난밤부터 이 순간까지, 끊임없이 일어난 일들에 정신이 남아날 것 같지가 않았다.
“조금 쉬어야겠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저는 돌아가야죠.”
“그래, 잘 들어가.”
작별 인사는 짧았다. 에피르는 떠났고, 홀로 남은 석찬은 세계수 구멍으로 돌아갔다.
“왔냐?”
진현이 석찬을 맞이했다.
“앞에 있던 놈들은?”
“알고 있었냐?”
“당연하지. 한 놈은 그래도 꽤 세 보였는데, 어떻게 잘했나 보네?”
진현은 말했다.
세계수 타기. 탑의 최대 규모인 만큼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이 기간에는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난다고.
“그래서, 이벤트에 참여하지 않는 인간이 살상 행위를 벌였을 경우 바로 마을에서 추방된다는 모양이야.”
“말이 돼?”
“심부름꾼 길드한테서 받은 정보야. 아무래도 시스템이 직접 개입하는 것 같은데… 베테랑 심부름꾼들이 직접 실험도 해봤다고 하니, 틀림없어.”
“허…”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떨어질 수는 없잖아?”
“맞지.”
그때, 진현이 비실비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석찬아. 중요한 건 따로 있어.”
갑작스럽게 진지하게 변한 그의 모습에 석찬이 움찔했다.
“왜?”
“너, 꿈이 하렘이냐?”
“응? 뭔 개소리야.”
“누님이랑 이브만 해도 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니까 그게 뭔 개소리…”
“아까 미모의 천사분이 두 분 보이시던데….”
“아.”
에피르와 로제를 말하는 것 같았다.
“에피르는 내 담당 천사. 로제는 나랑 싸웠던 녀석의 담당 천사일 뿐이야.”
“다른 건?”
“다른 건 얼어 죽을. 있겠냐?”
“그래, 있으면 네가 몹쓸 새끼지.”
그러면서, 슬쩍 엘리자베스를 쳐다보는 진현. 아직도 그녀에게 진정제를 투여하고 있는 로베르트의 모습에 조금은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엘리의 상태는 어때?”
“괜찮아지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소란이 있던데… 해결하신 겁니까?”
“응. 별거 아니었어.”
“다행이군요.”
로베르트는 폭포처럼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작업을 계속했다.
“……,”
이브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천무진은 명상 중이었다. 렐은, 잠들어 있었다.
“태연하네.”
“저 엘프 애? 그런 것 같더라.”
진현은 구석에 앉으며 자리를 권했다.
“하…”
“뭔 사내새끼가 다짜고짜 한숨이냐.”
“넌 지금 한숨 안 나오게 생겼냐?”
“뭐, 그건 그래.”
그러면서 하하 웃는 진현. 친구 맘도 모르는 무식한 새끼.
“그러고 보니, 너는 사귄 적 있지 않아? 여자 친구.”
“많았지. 고자 새끼였던 너랑은 다르게.”
[역시 넌 고자였군.]
쌍으로 때리는 두 남자.
석찬은 한 귀로 흘리며 진현에게 물었다.
“너였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냐?”
“나도 좋다고 달려드는 여자가 한 번에 두 명이었던 적은 없어서.”
“…….”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야.”
“뭔데?”
“그냥 너의 진심을 말해.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싫어하면 싫어한다고 말하면 되잖아? 지금 상황에 그거 빼고 방법이 있어?”
“……,”
“이해해줄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석찬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린 진현이 구멍을 나섰다.
“오랜만에 바람이나 쐬면서 자볼까?”
“…….”
“…….”
정적이 맴도는 구멍 안. 석찬은 조심스레 바닥에 몸을 뉘었다. 머리가 복잡하다. 일단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 것일까? 잠이 쏟아졌다. 석찬은 수마에 몸을 맡겼다.
“잘…”
완전히 잠에 빠지기 직전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굉장히 피곤했던 탓인지 뭐라고 하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 * *
아침이 밝았다.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동료는 아직 잠에 빠져 있었다.
‘쟤는 맨날 앉아서 자네.’
명상을 하는지 잠을 자는지 구별이 안 되는 천무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딱딱한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커어…”
바람이나 쐬면서 잔다던 진현도 어느새 구석에서 잠든 상태.
“어….”
그 와중에 빈자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로베르트의 옆, 엘리자베스의 자리였다.
휘이잉.
그때 구멍 너머에서 바람에 휘날리는 붉은 머리칼이 보였다.
스윽.
엘리자베스였다.
“…….”
그녀는 석찬을 보고 흠칫했지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표정을 관리했다.
“엘리.”
“일어…나셨어요?”
“몸은 괜찮아?”
“괜찮아요. 로베르트가 봐줘서… 그때 같은 일은 없을 거예요. 정말 죄송해요.”
“다행이다.”
“…….”
그 뒤로 두 사람은 쭉 말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농담이나 마력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빨리 말해야 하는데….’
‘빨리 말해야 하는데….’
두 사람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엘리자베스 쪽이었다.
“좋아해요.”
[오, 드디어 고백인가.]
옆에서 라우르가 흥미롭다는 듯 다가왔지만, 석찬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듣는 거랑 본인의 입으로 듣는 것은 느낌이 아주 달랐다.
“엘리… 대답 전에 물어볼 게 있어.”
“뭔데요?”
“왜 날 좋아하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공작급 악마다. 지금의 석찬을 훨씬 능가하는 무력에, 수없이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그 와중에 분명 그보다 좋은 남자를 많이 봐왔을 것이다.
“음… 그냥?”
“응?”
“처음엔 흥미였죠. 인간치고 뛰어난 재능과 무력. 노예 계약에 순순히 응했던 것도 호기심 때문이 컸어요.”
그러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석찬에게 마음이 생겼다. 왜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저토록 강한 무력을 지녔으면서 다른 것에는 일절 관심을 가지지 않는 뚝심? 아니면 동료에게 보여주는 친근함? 그것도 아니면, 이브에 대한 질투심?
“뭐가 뭔지는 몰라요. 그런데 이거 하나는 확실해요. 지금의 저는 당신을 연모합니다. 진심으로 말이죠.”
“…….”
“그럼, 대답을 들려주시죠.”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들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답, 대답.]
옆에서 라우르가 수없이 재촉해왔다.
‘알았어요, 조용히 있어 봐요!’
“후우…”
크게 숨을 들이쉰 석찬은 엘리자베스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응?”
“미안해.”
쩌적-
순간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유를… 들어도 될까요?”
본인은 최대한 무심하게 묻고 있었지만, 몸이 떨리는 것이 많은 감정이 오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널 싫어하는 건 아니야. 엘리는 내가 본 여자 중에 외모나 성격이나 가장 좋은 축에 속하니까.”
“그럼 왜?”
석찬의 머릿속에 한 여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빛에 비친 새하얀 머리칼과 백옥 같은 피부 사이로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보인다.
“그저,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야. 정말 미안해.”
“그렇군요.”
의외로 엘리자베스의 반응은 덤덤했다. 너무 덤덤해서 뭘 잘못 말했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화, 안 내네?”
“그럴 필요 없잖아요? 뭐, 더 좋아하는 사람이면 당연히 그 아이일 텐데.”
그 말에 석찬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풋풋하네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미안해.”
“괜찮다니까요? 왜 사과해요. 그리고, 좋아하면 빨리 가 봐요.”
“응?”
“저기 뒤에 있잖아요.”
엘리자베스의 손가락을 따라가자, 세계수 뿌리 앞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이브의 모습이 보였다.
“그럼… 가볼게.”
“빨리 가요. 마음 변하기 전에.”
“응.”
그 말과 함께, 석찬은 이브 쪽으로 걸어갔다.
“이브.”
“네.”
“나, 할 말이 있어.”
“엘리자베스 님이랑 얘기하고 있던 거 같은데… 괜찮아요?”
석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할 말이라는 건?”
석찬이 눈을 부릅뜬 채 말했다.
“이브, 나랑 사귀자.”
“네?”
예상외의 대답이었는지, 그녀가 당황해 되물었다.
[고백 멘트 진부한 것 봐라.]
“그동안 너무 오래 기다렸지?”
생각해보면 사소한 부분에서 이브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모르는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걸 이제 알았냐.]
“……,”
그 말에 이브의 볼이 시뻘게지더니, 눈가에 방울이 맺혔다.
“미안해.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살포시 이브를 안은 석찬이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줬다.
“고마워요.”
“고맙긴 무슨, 내가 더 고맙지.”
이브는 눈물을 훔치며 밝게 웃어 보였다. 지금까지 본 미소 중에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석찬 또한 덩달아 미소 지었다.
[그래도, 축하한다.]
* * *
“됐나?”
그 모습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지금까지의 긴장이 전부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
그녀는 말이 없었다. 허탈감? 상실감? 그런 것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저, 아쉬움이 들 뿐이었다.
‘오랜만에 맘에 드는 아이였는데….’
해맑게 웃는 두 사람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서로 맞는 짝이 있는 거야. 아줌마 따위가 괜히 망칠 필요는 없지.”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벗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누님, 어찌 몸은…”
로베르트가 엘리자베스를 향해 날아왔다. 그를 보며,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마침 잘됐네.”
퍽!
“꾸엑!”
로베르트가 바닥을 굴렀다.
“누, 누님?”
“아니야! 이제야 개운하네.”
갑자기 생긴 멍을 쓰다듬으며,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엘리자베스는 씩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