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세계수 타기 2일 차.
사람들은 열심히 세계수를 올랐다. 벌써 다음 층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아직까지 세계수의 절반을 채 오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그들은 세계수를 오르고 있었다. 석찬과는 다르게 말이다.
“흠…”
세계수 뿌리 그 어딘가에서 석찬은 엘리자베스와 로베르트를 옆에 두고 고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엘리가 좋아한다는 거지, 그것도 나를.”
“예. 이쪽과 관련해서 눈치가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정말로 모르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다. 솔직히 반쯤은 설정이나 컨셉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진짜였을 줄이야.]
‘…….’
거짓말 같겠지만 석찬은 정말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좋아하는 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되냐. 너 여자 만나본 적 없어?]
‘예.’
[응?]
그 말에 라우르가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진짜? 한 번도?]
‘네. 제가 거짓말을 왜 합니까?’
탑에 들어오기 전, 강석찬 그는 30년 가까이 되는 삶 속에서 단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훈련 때문에 여자를 만나는 일조차 드물었다. 그리고 그것은 탑에 들어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태 솔로로 살아온 그에게 여자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마력 저장소를 보라색 등급으로 올리는 것보다 힘든 일이라는 말이었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고자는 아니지?]
‘아니죠. 저라고 연애를 안 하고 싶겠습니까?’
석찬도 남자다. 단지 우선순위를 연애보다는 훈련과 강해지는 것에 집중했을 뿐이었다.
“흐음…”
그런 그에게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알게 된 일은 생각보다 큰 고뇌가 따르는 것이었다.
“혼란스럽나 보군요.”
“응.”
“솔직히 이해가 완전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뭐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요. 그래서 설명을 계속하자면.”
질투의 권능을 받은 엘리자베스는 힘 말고도 다른 특이점이 하나 발생했다.
“다른 칠죄종도 마찬가지지만, 권능과 관련된 욕망이 급증하게 됩니다.”
엘리자베스의 질투는 일반적인 악마의 수준을 초월한다.
안 그래도 욕망이 강한 악마인 그녀가 일반적인 악마의 수준을 초월하는 질투를 하게 되었으니, 그 정도가 어떤지 감히 인간은 상상도 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누님은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죠. 이브 님께도 분명 질투심이 들었을 겁니다.”
그 말에 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렐 님을 동료로 합류시킨다고 하니 새로운 라이벌이 생겼다고 생각하신 겁니다. 아마도 참고 있던 게 폭발한 거겠죠.”
‘새 동료? 연인?’
그제야 석찬은 엘리자베스가 일으킨 폭주의 이유를 알아챘다.
‘그렇게 된 일이었구나.’
“누님께는 계속 진정제를 투여할 겁니다. 아마 깨어나셨을 때는 더 이상 폭주하지 않을 테죠.”
“그럼 다행이고.”
“그래도 대답은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알았다.”
로베르트와의 대화는 이걸로 끝이었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보살피는 데 정신을 집중했고, 석찬은 그들을 피해 구멍 밖으로 나섰다.
‘…….’
뿌리 위로 올라선 석찬은 정신없이 세계수를 올랐다.
쿵!
갑자기 뻗어난 줄기가 그의 옆구리를 강타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콱.
오히려 줄기를 꽉 붙잡은 석찬은 마력으로 줄기를 고정했다.
털썩.
줄기 위에 주저앉은 석찬은 생각에 잠겼다.
‘엘리가… 그랬다라… 그리고…’
로베르트의 설명에는 이브에 관한 것도 섞여 있었다.
‘이브에게도 질투심이 들었을 거라고….’
아무리 연애에 지식이 없는 석찬이더라도, 이 말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젠장.’
구애를 받았던 적은 많았다. 지구에 있었던 시절, 워낙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만큼 수많은 유명인이 교제 의사를 밝혀왔지만, 석찬은 모두 거절했다.
‘훈련하는 데 방해돼.’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구에서와는 감정이 또 달랐다.
엘리도 그렇고, 특히 이브는 십 년 가까이 함께 생활한 기억 때문인지 느낌이 더욱 묘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왜 그렇게 시답잖게 구냐? 너답지 않게.]
라우르의 물음에 석찬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러나.”
[나이 들기는 개뿔, 끽해야 40년밖에 안 살아본 녀석이.]
“하하. 지구에서는 40살이면 충분히 나이 먹었다는 말을 듣는걸요?”
석찬은 천천히 가부좌를 틀었다. 흐트러진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명상을 시작했다.
화아아-
그런데 정신이 워낙 혼란스러운 탓인지, 기운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젠장.’
결국 명상하기를 포기하고 줄기 위에 누운 석찬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천장까지 쭉 뻗어 있는 세계수 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는데도, 시간은 훌쩍 흐르고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천장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달이 뜨고, 수천수만 개의 별이 밤하늘을 밝혔다.
‘아름답네.’
평소에는 바빠서 보지 못했지만, 오늘만큼은 뚜렷하게 보였다.
[…….]
라우르도 말없이 별을 구경했다.
그렇게 얼마나 밤하늘을 보고 있었을까.
“여기다!”
갑자기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석찬이 짜증 서린 눈빛으로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이쪽에서 악마의 마력이 느껴진다.”
“인간의 마력도 느껴집니다.”
다섯 명의 남자를 필두로, 수십의 장정이 구멍 쪽을 둘러싸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견갑에 새겨진 문장을 보니, 사냥꾼 길드 사람들인 듯했다.
‘이 사람들이 왜…?’
[좋은 일로 온 것 같지는 않은데.]
‘…….’
남자들은 전원 무장한 채 비장한 눈빛으로 구멍 쪽에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악마… 토벌!”
게다가 간간이 들리는 단어를 미루어 보았을 때.
‘엘리자베스를 노리는 것 같네요.’
[그때 그 일이 화근이었나.]
하긴 세계수 중앙에서 그 난리를 피웠는데 추적이 안 붙으면 이상하랴.
[싸울 거냐.]
석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휙-
세계수 밑으로 뛰어내린 석찬.
후우웅-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는 석찬을 향해, 사냥꾼 길드 사람들이 소리쳤다.
“저기 봐! 사람이다!”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남자, 베르톨트는 조용히 검을 뽑아 들었다.
휘오오-
검날에 남색 마력이 흘러나왔다.
[조심해라. 마력 운용자다.]
‘알아요.’
석찬은 떨어지는 와중에도 빠르게 자세를 잡았다.
“스으읍.”
숨을 들이쉬면서 강대한 마력이 전신을 둘러쌌다.
쾅!
곧이어 두 사람이 격돌했다.
콰과광!
강력한 충격파에 땅이 갈라지고 흙먼지가 휘날렸다.
“음!”
베르톨트는 눈을 부릅뜨며 있는 힘껏 석찬을 밀어냈다.
탁-
착지한 석찬이 베르톨트를 노려봤다.
“여긴 왜 온 거지.”
“몰라서 묻는 건가?”
베르톨트는 대화하기 싫다는 듯 무자비하게 검을 휘둘렀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군.’
검을 피하면서, 석찬은 녹색 눈으로 베르톨트의 몸을 살폈다.
‘약점이 적어. 잘 단련된 몸이다.’
역시 남색 마력의 소유자란 것일까.
‘그래도.’
공략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퍽, 퍽!
옆구리에 주먹을 몇 방 때려 넣자, 베르톨트가 움찔했다.
콰직!
그 틈을 타 녀석의 턱에 강한 어퍼컷을 꽂아 넣는다.
“크윽.”
베르톨트의 입술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제법이군.”
“너는 생각보다 약하군.”
그 말에 베르톨트의 마력이 더욱 강해졌다.
“뚫린 입이라고 잘만 지껄이는군. 어디 조금 이따가도 그럴지 보도록 하지.”
“입으로 싸우나?”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베르톨트가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조금 전과는 달랐다.
검을 두르고 있던 마력이 단단하게 굳었다. 검신의 두 배 정도 크기로 커진 마력의 칼날이 석찬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픽-
스친 부위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강해.’
마력으로 지혈하며, 석찬은 손을 들었다.
우우웅
허공에서 남색 창칼이 생겨났다.
랜스의 기술인 마력 무기.
처음 모방했을 때는 급조한 것이라 그런지 미숙한 점이 꽤나 있었지만.
푸부북
몇 번의 사용으로 완숙해진 마력 무기는 무자비하게 베르톨트의 몸을 꿰뚫었다.
“크으….”
전신을 찌르는 고통에 비틀거리며, 베르톨트가 석찬의 앞에 다가섰다.
“네 녀석, 감히 잡기 따위를…”
“잡기라. 그런 잡기도 사용하지 못하면서 마력 운용자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마력을 자유롭게 사용한다는 점이 마력 운용자가 가진 장점이다. 그 점을 활용하지 못한다면 스킬 사용자만 못하다는 것이 석찬의 생각이었다.
“더 보여줄 게 없으면, 끝이다.”
“더러운, 악마의 졸개…”
“뭐라냐.”
퍽!
석찬의 발길질에 베르톨트의 거대한 몸이 바닥을 굴렀다.
“히익?”
“지부장님?”
그 모습에 뒤따라왔던 사람들이 쓰러진 베르톨트를 향해 달려갔다.
“…지부장이었나.”
사냥꾼 길드 지부장, 확실히 저 정도 무력이라면 지부장이라는 직책을 달 정도는 됐다.
‘그래도 약한 건 마찬가지지만.’
석찬은 그들을 무시하며, 구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위험해!]
라우르가 소리치자마자 베르톨트의 쪽에서 강대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쾅!
“크윽?”
간신히 몸을 방어한 석찬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건?’
익숙한 하얀색 기운, 신력이었다.
‘신력? 어떻게 저 녀석이 신력을?’
그때 신력에 둘러싸인 베르톨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흰자위만 드러난 녀석은 천천히 석찬을 향해 다가섰다.
“악마의 졸개, 제법이었지만 여기까지다.”
그의 손에 빛의 검이 생겨났다. 순도 100% 신력의 검에 주변 공간이 일그러졌다.
“죽어라.”
베르톨트가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석찬이 그를 막아 세웠다.
“…뭐지.”
“하나만 묻지. 너, 천계 소속이냐?”
“그렇다.”
“그런데 왜 날 공격하는 거지?”
석찬의 물음에, 베르톨트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악마는 우리의 적. 악마와 함께하는 녀석은, 죽인다.”
“하!”
그 말에 석찬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에 베르톨트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물었다.
“뭐가 웃기지?”
그 말에 석찬이 더욱 크게 웃으며 말했다.
“뭐가 웃기냐고?”
그 순간 석찬의 몸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응?”
그의 머리가 새하얗게 변화했다. 눈이 녹빛으로 물든다.
“응??”
그 모습을 본 베르톨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네 녀석… 어떻게 이 힘을…”
“어떻게는 개뿔.”
후웅- 쾅!
석찬의 주먹에 베르톨트의 몸이 공중을 날았다.
“나도 천계 소속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그의 왼손 위로 날개 문장이 떠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