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갑작스럽게 성사된 대련.
‘몸에 큰 이상은 없다.’
메리라고 했던가. 녹발 여인의 치료 능력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힘이 넘쳐흐른다.’
솔직히 이브보다 더 치료 능력이 뛰어난 듯싶었다.
어쨌든 회복된 몸을 이끌고 향한 곳은 알렉산더의 지하 대련실. 워낙 오랜만에 찾아온 터라 메이드나 집사들이 한두 번씩 아는 척했다.
“오, 석찬 님, 오랜만입니다.”
“하도 못 봐서 얼굴 잊어버릴 뻔했어?”
“오랜만이에요. 앞으로 자주 올게요.”
살갑게 인사하는 그들을 보며, 드레이븐과 랜스가 작게 말했다.
“다들 오랜만이네….”
“오, 클레드다. 저 자식 아직도 술 잘 마시려나?”
그들을 잘 알고 있는 눈치. 심지어 몇몇은 이름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찰스에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곳에 일하는 모두가 알렉산더를 따랐던 사람들이라고. 비록 저들은 기억을 잃었지만, 이들은 여전히 그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 저기 봐.”
그때 드레이븐이 한 남자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검은 정장을 잘 차려입은 채 안경을 문지르고 있는 노신사, 찰스였다.
그는 아직 이쪽을 보지 못했는지, 안경을 닦는 데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다.
“찰스 할배!”
메리가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쳤고, 찰스가 움찔하더니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봤다.
안경을 고쳐 쓴 그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할배!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메리가 반가운 듯, 그를 껴안으며 방방 뛰었지만, 찰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당신들…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자네는 또 왜 같이 있고?”
약간의 살기마저 담겨 있는 찰스의 물음에, 석찬이 차분하게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뭐라고? 영주님이?”
알렉산더가 쓰러져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그가 당장 치료실로 달려가려 했지만.
“괜찮아, 할배! 내가 고쳐줬어!”
메리가 옷자락을 붙잡으며 그를 막아 세웠다.
“알았어, 그러니 이거 좀 놓게, 메리.”
“오, 드디어 이름으로 불러주는 거야?”
“옛날부터 그랬지만, 자네는 정말 시끄럽구먼.”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메리를 매섭게 째려보는 찰스.
“헤헤…”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는 그녀를 뒤로하며, 석찬의 설명을 들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게 된 거였구먼. 난 또 자네가 저쪽에 붙은 줄 알았는지 뭔가.”
“그럴 리가요.”
“헐, 우리가 싫은 거야, 할배?”
“닥쳐, 메리.”
계속되는 쫑알거림에, 결국 드레이븐이 메리를 제지하며 찰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선, 허락 없이 성내에 들어온 것은 죄송하게 됐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이라고 불린 찰스가 헛기침하며 말했다.
“큼, 괜찮아. 만약 알프레드, 그 새끼가 왔으면 내가 고혈압으로 쓰러졌을지 몰라도, 자네들이라면… 한 번까지는 봐줄 수 있네.”
“진짜? 그럼 다음에 또 와도 돼?”
“…….”
“메리, 닥치라고 했을 텐데?”
드레이븐의 호통에 메리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치만… 찰스 할배가 괜찮다고 했는걸?”
“하아… 언질이라도 주고 오든가 하게.”
“죄송합니다, 선생님. 메리 때문에 굳이 그러실 필요는….”
“아니야. 말했지 않나. 자네들이라면 괜찮다고.”
“감사합니다.”
찰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는 드레이븐. 다른 이들도 하나둘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흐음…’
네 사람의 태도를 보아하니, 과거에 찰스가 이들에게 꽤나 잘 대해준 듯했다.
‘선생님이라고 한 거 보면… 무언가를 가르쳐줬을 수도?’
정확히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찰스 역시 85층 이상을 올랐던 강자다. 절대 무시할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대련을 한다고? 랜스 자네랑 석찬이 녀석이?”
“그렇게 됐습니다, 영감.”
“이쪽으로 가는 길이라면, 지하 대련실?”
“옙.”
“하아….”
태평한 랜스의 대답에 찰스가 한숨은 내쉬었다.
“자네들이 지하에서 날뛰다가 성이 다 무너지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따라오게.”
찰스는 다섯 사람을 이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들이 향한 곳에는, 꽤 널찍하면서도, 사방이 온통 단단한 금속으로 덮여진 공간이 있었다.
퉁퉁.
벽을 살짝 두들겨본 석찬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보통 금속이 아니다.
‘이거라면 마음껏 날뛰어도 될 것 같은데?’
그런데 70층을 오른 자신이 마음껏 날뛰어도 괜찮은 금속으로 둘러싸인 방이라니. 이런 곳을 대체 어떻게 마련했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어이, 영감… 여긴 뭡니까?”
“이 강도… 아다만티움을 사용한 건가?”
“할배! 여기 짱이다!”
“…….”
그들의 의문에, 찰스가 방의 벽에 설치된 장치를 조정하며 말했다.
“영주님이 개인적으로 수련할 때 쓰시는 방이라네. 여기라면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버튼 하나를 누르자, 방이 조금씩 확장되기 시작했다.
“오!”
그 모습에 메리가 두 눈을 빛냈다.
“할배, 대박!”
“조용히 하고, 저기 의자 있으니 가서 앉아 있어. 맞다. 심판은 누가 볼 겐가?”
그 말에 조용히 손을 드는 한 여인. 여태껏 말이 없던 금발의 여인이었다.
‘이름이….’
[베로니카.]
‘맞다.’
미쉘이 떠나기 전 말했었다. 분명 베로니카란 이름을 지닌 여인이었다. 계속 조용히 있었기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자네가 볼 건가, 베로니카?”
“…응.”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드레이븐이랑 메리는 저기 의자에 앉아 있게나. 랜스랑 석찬은 가운데 서고.”
“오케이.”
찰스의 지시에 따라 두 남녀는 구석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고, 석찬과 랜스, 그리고 베로니카는 찰스를 따라 방의 중앙으로 향했다.
“룰은 어떻게 할 겐가?”
“이 녀석이 정하기로 했는데, 어떻게 할래?”
랜스의 물음에, 석찬이 대련 규칙을 이야기했다.
“무규칙.”
조금은 파격적인 조건으로 말이다.
“와우, 패기 보소?”
“…….”
이는 랜스를 놀라게 하는 것은 물론, 가만히 그들을 응시하던 베로니카의 죽은 눈에 이채마저 돌 정도였다.
“괜찮겠어? 그렇게 해도.”
“어차피 페널티는 똑같잖아요?”
그리고 강마력이나 신력, 최후의 방편으로는 강신까지 생각하고 있는 석찬의 입장에서, 괜히 룰을 다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느껴졌다.
그 마음을 읽은 랜스 또한 더 이상 걱정 따위는 없었다. 그는 훈련실 한 편에 마련되어 있는 무기 보관함에서 창 하나를 꺼내 들었다.
“분명, 무규칙이라고 했어. 나 진짜 마력 쓴다?”
다시 한번 확인차 물어오는 랜스의 말에, 석찬은 대답 대신 어두운 남색 마력을 뿜어냈다.
“오케이….”
그 모습에 랜스 또한 창에 보라색 마력을 덧씌웠다.
“그럼… 시작…할게. 시…작.”
베로니카의 사인과 동시에, 석찬과 랜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내 허공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쾅! 캉! 쿵!
“오….”
“대단한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드레이븐과 메리가 눈을 빛냈다. 그들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허공에서 창과 주먹을 맞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말이다.
“크윽…”
먼저 모습을 드러낸 자는 석찬이었다. 그는 볼에 맺힌 핏방울을 닦아내며, 바닥에 착지한 랜스를 노려봤다.
“호오….”
랜스는 부러져 창대밖에 남지 않은 창을 던지며, 손을 쭉 뻗었다. 그러자 마력으로 이루어진 창이 생성되었다.
“한번 다시 붙어보자고.”
“옙.”
석찬이 더욱 힘을 주자, 마력의 색이 변화했다. 여전히 남색이지만 더욱 짙어진 마력, 강마력이었다.
“오, 강마력을 쓸 수 있어? 그럼 나도.”
이에 맞춰, 랜스가 만든 보라색 창도 더욱 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족히 몇 배는 늘어난 창의 힘을 느끼며, 석찬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쾅!
주먹과 창이 충돌했다. 석찬이 몸을 틀어 측면을 공격했지만.
“너무 뻔한데?”
랜스의 창이 늘어나더니 석찬의 뒤통수를 향해 쏘아졌다.
탁.
몸을 날린 석찬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마력의 창을 응시했다.
“어때? 신기하지? 안 들어오면, 내가 간다?”
그리고 마력의 창이 쭉 늘어나 석찬을 향해 쇄도했다.
캉!
주먹으로 창을 쳐낸 석찬의 등 뒤로 여러 가지의 마법이 생성되었다.
각종 속성의 스피어 마법부터 무섭게 치는 폭풍우까지. 다양한 마법이 랜스를 향해 쏘아졌다.
“잔재주.”
하지만 랜스의 창은 이 모든 것을 순식간에 파훼해내며 석찬에게 달려들었다.
콰직!
창이 박힌 벽에 금이 갔다. 이미 몸을 피한 석찬이 창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랜스를 향해 달려갔다.
“킥.”
이에 랜스는 또 다른 마력의 창을 생성해내며 석찬을 압박했다.
캉! 캉!
‘젠장.’
압박이 더욱 강해진다. 점점 석찬이 밀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는 찰스의 표정도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분명 페널티 때문에 힘의 차이는 현격히 좁혀진 상태였지만, 백 년의 세월을 전장에서 살아온 경험과, 한 단계 높은 마력의 힘 덕분에 차이가 전혀 좁혀진 것 같지 않았다.
쾅!
석찬을 떨쳐낸 랜스가 창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그렇게 생각 안 했는데, 생각보다 약해. 전투 경험이 적어서 그런가. 힘은 제대로 쓰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남색밖에 안 돼서 그런가?”
“…….”
석찬이 랜스를 노려봤다.
“방금까지 보여준 게 전부라면, 너 나 못 이겨.”
“전부겠습니까?”
순간, 석찬의 기운이 변화했다. 눈빛이 초록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부분 강신, 안(眼).’
“오, 신력? 조금 재밌을 수도?”
그 모습에 랜스가 다시 창을 꼬나쥐었다.
“조금 전과는 다르겠지?”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오.”
자신감이 넘치는 석찬의 말에 눈을 좁게 뜨는 랜스. 그를 향해 석찬이 달려들었다.
“헤에? 똑같은 것…”
순간적으로 목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랜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가 서 있던 자리를, 거대한 낫이 스쳐 지나갔다.
“방금 것은…”
“왜, 당신도 쓰지 않았습니까?”
동시에 랜스의 양 옆통수를 향해 마력의 화살이 날아왔다.
쾅!
동시에 부딪힌 화살이 폭발했고, 연기 사이에서 석찬의 주먹이 날아왔다.
주먹을 피하며, 랜스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너, 어떻게 내 기술을 쓰는 거지?”
조금 전에 만들어낸 마력의 창.
조금의 불순물도 없이 순수한 마력만 사용해서 무기를 만드는 것은 어지간한 마력 운용자들은 만들 엄두도 못하는 최고 등급의 기술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남색 마력의을 사용하는 애송이가 그것을 해냈다.
“당신이 썼는데, 제가 못 쓸 이유는 없습니다.”
동시에 연기가 걷히고, 공중에 수놓인 마력의 창칼들이 보였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예기를 뿜어내며 랜스를 향해 있었다.
“신기한 놈일세, 이거 마력도 많이 드는데 말이야.”
“혀가 길어지셨습니다?”
빠직.
석찬의 도발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랜스는 쉬이 달려들지 않았다. 싸구려 도발에 먹혀들 정도로 그는 나약하지 않았다.
“너야말로, 어차피 그것들은 마력 소모도 커서 오래 유지 못 할 건데. 시간 끌지 말고 빨리 공격하지 그래?”
랜스의 말에 석찬이 씩 웃었다.
‘마력?’
석찬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마력의 소모. 그것은 무한 마력 회복 속도를 지닌 그에게 있어, 전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 끌지 말라고?’
아니, 정신력 소모도 별로 없는 현시점에서, 시간을 끌수록 유리해지는 건 석찬 자기 자신이었다.
“그럼, 한번 받아보십시오.”
수많은 마력의 무기가, 랜스를 향해 쏘아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