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세계수. 70층에 존재하는 거대한 나무는 비단 70층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71층, 72층 그렇게 80층 밑자락까지 뻗어 있는 이 거대한 나무는 가까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웅장함을 풍겼다.
“이걸 오른다라….”
석찬은 자신의 키를 가뿐히 넘어서는 뿌리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잖아요?”
그에 비해 렐은 가볍게 몸을 풀며 세계수를 오를 준비를 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석찬은 에피르가 제시했던 보상을 떠올렸다.
‘이벤트가 진행되면 공지되겠지만, 세계수 등반의 보상은 바로 ‘층’입니다.’
‘층?’
‘세계수를 끝까지 오르면 다음 층이 오픈되는 방식입니다. 힘들게 몬스터를 사냥할 필요도 없죠.’
‘진짜?’
‘네, 게다가 실력과 운이 따라준다면 며칠 만에 79층까지 도달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석찬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며칠 만에 10개 가까이 되는 층을 뚫어낼 수 있다니. 시간이 부족한 석찬에게는 정말 천금 같은 기회였다.
‘물론, 떨어진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겠지만 말이지요.’
에피르의 걱정스러운 조언이 뒤섞였지만, 석찬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건 상관없어.’
층을 빨리 오를 수 있다는데 페널티 정도야 충분히 감수 가능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와보니….’
생각보다 더욱 긴장이 됐다.
옆에서 그를 지켜보던 에피르가 나지막이 한 마디를 더했다.
“참고로, 이벤트 진행 중에는 마력 날개가 봉인될 예정이니 그 점도 참고 바라시길.”
“큼, 그래.”
솔직히 마력 날개를 쓸 생각도 있었지만, 너무 사기였는지 역시 바로 봉인될 것이라는 예고가 들어왔다.
“뭐,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죠. 당신의 그 말도 안 되는 마력 회복 속도가 있다면 세계수를 오르는 데 그리 큰 무리는 없을 테니 말이죠.”
“맞아! 근데 이거 진짜 신기하다. 스테이터스창이라고요?”
“걍 편하게 스탯창이라고 해.”
세계수로 떠나오기 전, 렐은 에피르의 권한으로 시스템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스테이터스창을 보며 놀라워하고 있었다.
“아저씨, 나 민첩이 700이래요, 대박이죠? 레벨도 350!”
“그래?”
게다가, 에피르의 배려로 렐의 능력치와 레벨은 70층의 엘프 평균으로 설정되었다고.
“근데, 이러면 문제가 생기지 않아?”
“무슨 문제요?”
“갑자기 신체 능력이 늘어나서 적응이 안 된다거나.”
“상관하실 필요 없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적응할 수 있게 수를 썼으니까요. 그리고 70층에서 나고 자란 만큼 기본적인 능력치도 훌륭했고요.”
“그래?”
‘수’라고 하니 뭔가 꺼림칙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석찬은 이리저리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렐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확실히 능력치가 높아져서 그런지 예전보다 활력이 있고, 힘이 들어가 있었다.
“좋아?”
“엄청!”
퉁!
렐의 다리가 ‘ㄷ’자로 접히더니 탄력을 받고 스프링처럼 하늘 높이 튕겨져 올라갔다.
‘몸의 유연성이 대단해. 이러면 계획을 살짝 수정해야 할 수도 있겠어.’
원래 석찬은 렐을 원거리 딜러로 키우려고 했다.
‘근거리 딜러는 나랑 진현, 천무진으로도 충분하니까.’
게다가 후방 딜러는 이브 한 명밖에 없어 밸런스가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때문에 원래 계획은 렐을 궁수로 성장시켜 이브를 도와 뒤쪽에서 딜을 넣게 하는 것이었다.
‘또 엘프는 기본적으로 활을 잘 다룬다고 하니까.’
그런데 능력치가 업그레이드되고 발현된 렐의 유연성을 포기하기에는, 그 천부적인 재능이 너무 아쉬웠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이 되긴 했지만, 그리 긴 고민은 아니었다.
‘일단 암살 쪽으로 생각해보고, 활은 나중에 가르쳐보자.’
우선 더욱 잠재력이 높아 보이는 재능을 키우기로 결정한 석찬이 발걸음을 옮겼다. 방방 날뛰던 렐 또한 그를 따라 세계수의 뿌리 주변으로 다가갔다.
“신기하네.”
뿌리 위에 걸려있는 간판을 보며, 석찬은 호기심에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세계수의 뿌리를 파고 만든 듯한 가게 내부는 자연의 내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숲의 향기에 홀려 안으로 들어가니, 한 여인이 석찬 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어서 오세요.”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여신을 조각해놓은 듯이 신체의 모든 곳이 존재감을 뿜어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기다란 귀였다.
“엘프세요?”
“네, 보시다시피. 어머, 귀여운 꼬마 엘프분도 있었군요.”
그 말에 렐이 발끈해 말했다.
“누가 꼬마야? 이래 봬도 20살이나…”
“저는 500살이 넘었답니다~.”
“죄송해요…”
한 마디에 꼬리를 내린 렐을 뒤로하고, 엘프 여인이 석찬을 안내했다.
“한산하니까, 원하실 때 아무 때나 불러주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여인이 떠나간 이후, 석찬은 렐과 함께 메뉴를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호기심에 들어온 가게였는데, 찻집인 모양이었다.
대충 마음에 드는 것을 주문한 석찬은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살폈다.
“쌉니다, 싸요! 세계수에서 자란 도마뱀구이!”
“세계수 꼭대기에서 채집한 이파리입니다! 한 장당 10만 골드!”
세계수 앞답게 정말이지 세계수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들을 팔고 있는 상인들과 행인들.
“세계수 뿌리 여관 한 자리 남았습니다!”
그 와중에 석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이 들려왔다.
‘세계수 뿌리 여관?’
그 말에 길을 걷던 행인들이 순식간에 말을 꺼낸 사내의 앞으로 몰려들었다.
“나! 내가 먼저다!”
“무슨 소리!”
그 여관이 어떤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 한 자리를 두고 사람들이 싸우기 시작했다.
‘뭐지?’
점점 커지는 호기심.
“주문하신 세계수 떡잎 차 두 잔, 나왔습니다.”
때마침 주문한 차를 가지고 온 여인에게 석찬이 물었다.
“혹시, 세계수 뿌리 여관에 대해 아시는 것 있나요?”
그 물음에 엘프 여인이 놀라는 투로 물었다.
“혹시, 70층에 처음 오셨나요? 아니면 오신지 얼마 안 되셨나.”
“죄송합니다. 아직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이 채 안 되어서.”
“그럼 모를 수 있겠네요.”
엘프 여인이 세계수 뿌리 여관에 관해 설명했다.
“저희의 어머니, 세계수는 거대한 크기 때문에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맞다. 세계수 때문에 마을 중심부에는 건물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의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꺼내더라고요. 세계수에 건물을 짓자고.”
그때, 석찬의 머릿속에 이 카페를 포함해 세계수 뿌리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게가 떠올랐다.
“그럼 여기도?”
“네, 일자리도 얻을 수 있었고, 공간이 늘어나는 데 반대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죠.”
엘프 여인은 벽 쪽으로 다가가더니, 매끈하게 절단된 세계수 뿌리 안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세계수 주변에는 많은 가게와 여관이 생겨났고, 세계수 뿌리 여관은 그것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지닌 여관이에요.”
세계수의 뿌리는 작은 것만 해도 사람의 키를 훌쩍 넘어서지만, 간혹가다 있는 거대한 뿌리는 5층 건물보다 거대한 것들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뿌리, 저기 저거 보이시죠?”
“어디요?”
하지만, 손가락을 가리킨 곳 어디를 둘러보아도 적당히 큰 뿌리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인간이셨죠? 죄송해요.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서, 혹시 관련 스킬이 있으신가요?”
그제야 엘프의 비상식적인 시력을 떠올린 석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있습니다.”
눈에 마력을 주입해 더 먼 곳을 내다보니, 그제야 한 뿌리가 보였다.
그 뿌리는 거대한 존재감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얼핏 봐도 7층 건물 높이만 한 뿌리에 여러 개의 창문이 나 있었고, 가장 위쪽에는 크게 세계수 뿌리 여관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저건가요? 녹색 간판.”
“네. 저게 높기도 높고, 마을을 내려다보는 경관도 좋아서 사람들한테 각광받고 있어요. 특히 요즘은 세계수 등반 이벤트 시즌이라 더 사람들이 붐비기도 하고요. 당신도 세계수 등반 때문에 오셨죠?”
“네.”
“그럼 여관을 빨리 알아봐야 할 거예요. 잘못하면 마을 외곽에 있는 곳에 자리 잡아야 할 수도 있어서요.”
“조언 감사합니다, 차 맛 좋네요.”
석찬을 차를 다 마신 뒤, 기분 좋게 가게를 나섰다.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여관은 렐 집에서 묵으면 되니까 괜찮고.’
석찬은 옆에서 렐과 함께 꼬치구이 하나를 입에 물고 있는 에피르를 바라봤다.
“에피르, 넌 어떻게 할 거야?”
“뭘 말씀이시죠?”
“이벤트 시작하고 나서, 너도 같이 세계수를 오르는 거야?”
석찬의 물음에 에피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저는 천계로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시스템 관련 일도 끝났고, 저도 이제 가봐야죠.”
에피르는 아쉬운 기색을 감추며 말했다.
“이벤트 시작은 정확히 일주일 후 정오입니다. 그 점 유의하고 계시길.”
“알았어. 지금 출발하는 거야?”
“말 나온 김에, 미리 가려고요. 미련도 덜 겸….”
“뭐라고요?”
“아닙니다. 그나저나, 그 아이, 잘 성장시켜야 할 겁니다.”
에피르가 렐을 보며 말했다.
“세계수 등반은, 당신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말이죠. 그럼 저는 이만.”
에피르는 날개를 펼치지 않고 조용하게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후, 석찬은 렐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잦은 이동과 시스템에 대한 흥분 때문인지, 렐은 금방 곯아떨어졌고, 석찬은 에피르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쉽지 않다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피르가 한 말이니, 석찬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안일하게 굴었다간 렐이 위험해질 수 있어.’
게다가 렐은 힘을 얻긴 했지만, 힘을 받쳐줄 기술이 부족한 상황.
하드웨어는 좋은데 소프트웨어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렇기에 석찬은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렐을 단시간에 강해지게 할 수 있을까.
‘흠….’
고민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날이 바뀌고, 어둑어둑했던 밤하늘에 새로운 아침이 밝았을 때, 석찬은 고민을 마쳤다.
‘그래.’
석찬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10년 동안 못 본 그리운 사람이자, 자신을 향해 아낌없이 조언해주고 진현을 키워준 고마운 사람.
렐을 깨운 석찬이 아래층으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이제 시스템이 생겨 렐도 1층부터 70층까지 왕복할 수 있었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렐, 가자.”
“어딜요?”
막 일어나 비몽사몽 하는 그녀의 물음에 석찬이 씩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 보러.”
그 말과 함께, 석찬과 렐은 1층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오랜만에도 온다, 새꺄.”
“오랜만이에요.”
금발의 거한, 알렉산더가 서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