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아저씨, 이거 진짜 맛있어요, 하나 먹어봐요.”
“그래.”
석찬은 렐이 주는 쿠키를 한 개 입에 넣었다. 달콤한 맛에 머리가 어질해질했다. 그런 그와 다르게 렐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과자를 흡입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걸 계속 먹을 수 있는 거지?”
“원래 저 나이 때는 뭐든 잘 먹는 법이니까요.”
대답은 복면의 남자에게서 들려왔다. 그가 건넨 갈색 음료에 렐의 눈이 더욱 빛났다.
“착한 아저씨! 감사합니다.”
“많이 먹어요.”
“넴~.”
석찬은 점점 줄어가는 음료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쯤 됐으니 슬슬 얘기하지. 왜 우리를 불렀는지, 그리고 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언제 그 얘기 꺼내나 싶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복면의 남자는 쭉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벗었다.
스르륵.
복면 사이에 감춰져 있던 맨얼굴이 드러났다. 쭉 검은색 복면으로 감춰져 있어 몰랐지만, 남자는 꽤나 잘생겼다.
복면 아래로도 보였던 오뚝한 코 말고도 아이돌형 미남의 정석을 보여주는 얼굴상에 붉은 머리칼이 시선을 잔뜩 끌었다.
“잘생겼네.”
순수한 감상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로베르트, 로베르트 살리나스입니다.”
“아, 로베르트.”
석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름을 곱씹었다. 그리고,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로베르트 살리나스… 잠깐만, 살리나스라고?”
그 말에 로베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복면을 썼을 때도 보였던 환한 눈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신기하죠? 솔직히 저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당신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하나만 묻지. 그녀와 어떤 관계냐?”
“별거 없습니다. 평범한 남매에 불과하니까요.”
“남동생?”
“맞습니다. 바로 알아보시네요.”
살리나스. 엘리자베스의 성도 분명 그러했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남동생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그럴 만도 하죠. 원체 가족 얘기를 잘 안 하는 사람이라서요.”
로베르트는 능글맞게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고 보니, 웃음을 짓는 모습이 엘리자베스와 비슷해 보였다.
“누님과의 교류는 꽤 자주 있던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지난 공백의 7년, 그때는 더 그랬죠.”
“뭐라고 했길래?”
로베르트는 엘리자베스와의 대화 내용을 상기해 보았다.
* * *
[로베르트. 나 노예 됐다?]
처음 그녀에게서 온 메시지에 로베르트는 두 눈을 의심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엘리자베스, 노쇠한 부모에게서 살리나스 가의 가주 직을 물려받은, 사실상 마계의 3인자라고 할 수 있는 최강 악마 중 하나가 노예가 됐단다.
[주인이 인간이야.]
게다가 주인은 인간이라고 한다. 로베르트는 믿을 수 없는 메시지에 그에게 직접 전음을 걸었다.
“누님!”
[로베르트?]
“지금 이게 무슨…”
[말 그대로, 인간의 노예가 됐지 뭐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나쁜 애는 아니니까.]
“누구인지는 말씀을…”
[이름은 강석찬. 끊어, 바빠~.]
전음이 끊기고, 로베르트는 곧장 강석찬이란 인간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탑 최고의 루키. 역대급 재능. 최단 등반 기록 경신 등등, 수많은 업적을 내세우며 탑을 오르는 인간. 확실히 인간치고는 대단하긴 했다만, 어디까지나 인간.
공작급 악마를 하인으로 부리기에는 부족했다.
그렇기에 로베르트는 선택했다.
* * *
“뭘 선택한 거지?”
“당신을 미행했습니다. 아까 보셨다시피 제 특기가 은신과 미행 쪽이라서요.”
로베르트는 품에서 새 단도를 꺼내 빙글빙글 돌렸다.
“누님의 주인으로서 격이 맞지 않았다면 진작 처리해 드렸을 거지만.”
탕.
그는 단도를 책상에 박으며 말을 이었다.
“벨리아스와 마신 앞에서도 굴하지 않던 그 기백, 그리고 ‘그 모습’은 정말 경외감만 들더군요.”
“본 거냐?”
“저는 천사 나부랭이와 다릅니다. 게다가 그 결계는 누님이 친 것, 동생인 제가 못 볼 리가 없잖습니까?”
“그런 건가.”
“이제 전 당신을 인정합니다. 고로, 당신께 위협을 가할 생각도 없습니다. 누님처럼 노예 계약서를 쓰자 해도 기쁘게 받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 말에 석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 로베르트. 그럼 내 질문에 모두 똑바로 대답할 수 있는 거겠지?”
“뭐든 물어보시길.”
“처음부터 끝까지. 왜 네 녀석이 레벨리온 밑에 있었는지부터 지금까지. 전부 말해줬으면 좋겠어.”
“그 정도야, 당연하죠.”
로베르트는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7년의 세월 동안 당신은 천계 소속이 되어 훈련을 진행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알고 있던 거냐?”
“지금 와서는 모르는 이가 더 드물 겁니다. 그것 때문에.”
로베르트는 석찬의 손등에 새겨진 문장을 가리켰다.
“지금 사람들은 당신이 강석찬인 걸 모를 뿐이지, 천계 소속임은 알고 있는 상태. 그리고 언제까지 정체를 비밀로 감출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들도 나름대로 70층까지 올라온 베테랑 중 베테랑. 금방 알아챌 겁니다.”
“비밀로 할 생각은 추호도 한 적 없어.”
솔직히 석찬은 정체가 드러나도 별 상관이 없었다. 이목이야 조금 끌리겠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거였으면 천계 소속이 되지도 않았다.
“그럼 다행이고, 어쨌든 당신을 기다리기 위해 70층에 자리를 잡고 있었죠.”
“그럼,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왜 레벨리온의 곁에 붙어 있던 거지? 너였다면 그 녀석보다 더…”
“때마침 남작 녀석이 이상한 음모를 꾸미고 있어서 정체를 숨기고 살짝 도와줬던 것뿐. 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
로베르트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근데 그 녀석, 아무리 정체를 숨기고 있어도 저에게 개긴 건 조금 괘씸해서요, 손봐주는 게 너무 과했나요?”
뭔가 섬뜩한 미소였지만, 석찬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어차피 죽었어야 할 녀석이다.”
“예전에 들었던 거랑 다르군요. 조금은 화를 내실 줄 알았는데.”
“그냥, 이거저거 깨달은 게 몇 개 있을 뿐이다.”
“그럼 다행이고요.”
로베르트는 싱긋 웃으며 여전히 열량 보충에 집중하고 있는 렐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나저나, 예쁜 아이군요.”
“나 아이 아니에요, 이래 봬도 스물…”
“제 눈에는 아이입니다~.”
로베르트는 렐의 이마를 툭 치며 웃었다.
“이익…”
렐은 뭔가 불만인 듯 볼을 부풀렸지만, 석찬은 로베르트의 말에 딴지를 걸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의 동생인 데다가 라우르의 정체도 알고 있는 그는 대충 봐도 3,000살이 넘었음을 알 수 있었고, 그런 그에게 스물을 갓 넘긴 작은 여인은 확실히 아이로 보일 것이다.
“뭐, 더 궁금한 거라도?”
그 물음에, 석찬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별로. 아, 혹시 엘리나 다른 애들에 관해 아는 거라도 있나?”
“언제 물으시나 했습니다.”
그는 품에서 사진 두 장을 꺼냈다. 그곳에는 사냥터에서 찍힌 듯한 네 남녀의 전투 장면이 담겨 있었다.
외팔의 사내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몬스터를 가르고 있었고.
붉은 머리의 여인은 검은 마력으로 외팔의 사내를 보조하고 있었으며.
검은 머리 한국인은 주먹으로 거대한 호그의 송곳니를 부러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찬란한 은발의 여인이 만들어낸 번개에 통구이가 되는 몬스터가 보였다. 그 모습에 석찬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
그 모습을 지켜보는 로베르트의 입꼬리도 슬며시 올라갔다. 그는 사진을 넘기며 물었다.
“어떻게, 소식이라도 전해드릴까요?”
“아니, 내가 직접 올라갈 거다.”
“시간이 꽤 걸릴 텐데요?”
“아니.”
시간이 아예 걸리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천사장의 배려로 퀘스트 진행에 필요한 몬스터 사냥 수가 대폭 줄었다 해도 사냥을 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전보다 더욱 강해진 힘에 이동 시간까지 줄었으니, 더욱 빠른 등반이 가능할 것이라고 석찬은 믿었다.
* * *
로베르트를 만난 후 벌써 3시간이 흘렀고, 슬슬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세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렐의 집 근처에 있는 술집이었다.
벌써 술병이 잔뜩 쌓인 세 사람 사이에 이야기꽃이 만개했다.
처음 만난 이들이라도 술이 들어가면 죽마고우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솔직히 석찬은 이 말이 악마나 엘프에게도 통용될 줄은 몰랐다.
“아니, 형님~~!”
“누가 형님이야? 그리고 당신, 나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아뇨! 누님의 주인께 어찌 동생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어찌 됐든 형님! 한 잔 받으십시오! 거기 꼬맹이도 한 잔 마셔라!”
“누가 꼬맹이래, 아저씨!”
“하하!”
어느새 로베르트의 형님이 되어버린 석찬은 농담이나 따먹고 있는 두 술주정뱅이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악마나 엘프나…”
주변에 사람이 없기를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시비가 걸렸을 수도 있었겠다.
‘그나저나, 이 시간대면 사람이 많을 텐데?’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은 석찬이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그런데 일하고 있는 점원이나 청소부 등을 포함해도 길거리에 보이는 사람이 굉장히 드물었다.
“아이고, 여기서 이러지들 말고 여관 가서 주무세요!”
때마침 술에 전 남녀를 내쫓으려고 다가온 식당 주인에게 석찬이 먼저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
“아이고, 친구분들 간수 좀 하세요!”
“누가 친구라는 거야! 형님! 여기 이상한…”
“넌 닥치고.”
“누구보고 친구래, 이상한 아줌마!”
“너도 제발 조용히 있어라.”
석찬은 이마를 부여잡으며 식당 주인에게 연신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평소에는 이런 친구들이 아닌데…”
“술이 원수죠. 어휴. 총각도 힘들겠어.”
“하하…”
그녀의 말에 대꾸하며, 석찬은 몰래 렐과 로베르트에게 슬립 마법을 걸었다. 술에 잔뜩 취해서 그런 것일까? 렐은 그렇다 치고 로베르트조차 금세 잠에 빠져버렸다.
“크어어어!”
“음냐….”
“여기서 자지 말고….”
“조금 있다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뭐, 총각이 그렇다면… 잘 데려가세요.”
“네, 아 참, 아주머니. 여쭤볼 게 있는데…”
“물어볼 거?”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없던데 무슨 일이 있나요?”
“엥?”
석찬의 물음에 식당 주인이 내보인 반응은, 그가 생각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뭔지 몰라요?”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잘…”
“그 이벤트가 열렸잖아요. 세계수 등반. 총각도 그거 참여하려고 온 거 아니었어?”
“세계수 등반?”
처음 들어보는 이벤트였다. 그때, 석찬의 등 뒤로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부터는 제가 설명해드리죠.”
새하얀 깃털을 날리며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오는 백발의 천사장, 에피르였다.
“어어? 천사…”
식당 주인이 놀라기도 전에, 그녀를 기절시킨 에피르가 설명을 이어갔다.
“세계수 등반이란 간단합니다. 저기 큰 나무 보이시죠?”
에피르가 마을 중앙에 심어진 거대한 나무를 가리켰다. 거짓말 안 치고 40층 마을 둘레만 한 크기의 나무였다.
이종족이 산다는 특성상 다른 곳의 서 네 배에 달하는 크기를 가진 70층 마을이 아니었다면 금방 묻혔을 크기였다.
“저 나무를 오르라는 건가?”
“역시 이해가 빠르시군요. 간단합니다.”
그래, 참으로 간단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보상도 그리 간단하지는 않았다.
“보상은 말이죠…”
에피르가 말한 보상에, 석찬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진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