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강신 - 반신 ver.’
7년 간의 수련 중에는 당연히 강신에 익숙해지는 수련도 포함되어 있었다.
몸을 단련하고 마력을 늘리면 늘릴수록, 한 부위만 가능했던 부분 강신은 두 부위, 세 부위, 마침내 반신에 신의 힘을 담는 것이 가능해졌다.
‘부작용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석찬은 욱신욱신 아리는 몸에 치유 마법을 부으며 생각했다.
‘강신보다는 훨씬 싸게 먹히는 거지.’
한 번 사용하면 며칠은 꼼짝없이 앓아눕는 일반 강신에 비해서는 훨씬 약하고, 충분히 감수 가능한 페널티였다.
석찬은 눈을 감고 있는 레벨리온 앞에 섰다.
“일어나.”
툭.
석찬의 부름에 살며시 실눈을 뜨는 레벨리온.
“다 보였다.”
“내가 진 건가.”
레벨리온은 부러진 채 옆을 구르는 왼뿔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젠장….”
그는 몸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마지막 일격의 영향 때문인지 손가락조차 쉬이 까딱하지 못했다.
“죽이지 않는 것이냐?”
이미 체념한 레벨리온의 물음에 석찬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난리를 쳤는데 죽여 버리기까지 하면 꽤나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말이야.”
싸움의 격전지 주변으로 한가득 몰려든 사람들, 그들은 석찬을 향해 무언가를 수군거리고 있었다.
“대낮에 싸움을 벌인다고?”
“뭐하는 사람이지?”
“수인이랑 싸움 난건가?”
“요즘도 수인이랑 싸움을 내는 녀석들이 있다고?”
“뭐야?”
석찬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 저 멀리서 들리는 경보음과 다수의 인기척을 느끼며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비키세요!”
“수인보호협회에서 나왔습니다!”
‘쯧.’
그 단체의 이름을 듣자마자 석찬은 혀를 찼다.
수인보호협회, 줄여서 수보협.
그들은 말 그대로 수인을 보호하기 위해 수인과 인간이 합심해 만든 단체였다.
석찬은 잘 알지 못하지만, 과거 수인과 인간 사이에 큰 마찰이 있었고, 이후로도 가끔 수인을 괴롭히고 학대하는 인간을 방지하고자 만든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특징은.
‘수인과 마찰을 일으킨 인간을 잡아가는 거지.’
이유 불문으로 말이다.
낌새를 느낀 레벨리온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도와주세요! 이 사람이 저를 괴롭혀요!”
육중한 몸매와 험악한 인상으로 꺼내기에는 꽤나 끔직하고, 또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어째서인지 수보협 옷을 입은 남자와 토끼 귀를 가진 수인은 눈을 부라리며 석찬에게 다가왔다.
“당신, 감히 마을 내에서 수인을 공격한 겁니까?”
“어머, 뿔 부러진 것 좀 봐. 이리 와봐요.”
석찬은 절로 어이가 털리는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오해는 무슨, 당신을 체포하겠습니다.”
남자는 이유를 듣고 싶지 않는다는 듯 마력 봉인 사슬을 꺼내 석찬을 포박하려 했다. 그러나 마냥 당하고만 있을 그가 아니었다.
텅!
사슬을 튕겨낸 석찬이 남자를 노려봤다.
“당신, 지금 날 친 거야?”
어이없다는 듯 석찬을 째려보는 남자에게, 석찬은 최대한 살기를 절제하며 말했다.
“오해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제 얘기도 들어…”
“얘기요? 지금 이 불쌍한 수인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겁니까?”
남자는 파편 사이에서 붕대를 둘둘 감고 있는 레벨리온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씨.’
비실비실 웃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려고 했다.
“당신을 체포…”
그러던 그때.
“잠깐만요! 아저씨! 잔해 좀 치워줘요!”
무너진 잔해 속에서, 한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렐의 목소리임을 단박에 알아들은 석찬이 마력으로 그녀가 있는 곳 주변의 잔해를 전부 치워버렸다.
“당신, 지금 뭐하는…”
“기다려 보세요!”
석찬과 남자 사이로 달려온 렐이 사슬을 들고 있는 남자를 막아 세웠다.
“엘프?”
남자는 렐의 기다란 귀를 보며 사슬을 거뒀다.
“엘프가 여긴 어쩐 일이지?”
“아저씨, 어떻게 보이는 거로만 상황을 판단할 수 있어요?”
렐은 일갈과 함께 석찬의 몸 이곳저곳에 든 멍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여요? 그리고 먼저 공격한 건 저쪽이에요.”
남은 상처 중 대부분은 ‘강신 - 반신 ver.’의 부작용으로 생긴 거지만, 렐의 설명은 남자를 설득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런가요?”
머리를 긁적이는 남자를 보며, 석찬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렐이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수보협 애들이 수인 관련된 일만 생기면 맛탱이가 가는데 융통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납득할 만한 동기나 증거 등이 있으면 수보협에서도 정상 참작을 해준다고 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멋대로 사람을 체포하려고 하면 안 되지.”
“이 정도로 끝나는 걸 다행으로 여겨요. 저번에 한 사람은 술집에서 취기에 수인의 따귀를 때렸다가 손목이 잘려 나갔으니까요.”
“진짜냐?”
석찬은 움찔하며 여전히 머리를 긁적이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기…”
“아, 네.”
“그럼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정상 참작이 된다고는 했지만, 손목이 잘려나갔다느니 하는 얘기를 들으니 괜스레 기분이 뭐했다.
[니가 뭔 잘못이 있냐? 그리고, 쟤가 수인이냐? 악마지.]
라우르의 말에 석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벨리온은 단지 생긴 게 소 뿔 달린 수인이지, 실상은 남작급 악마다.
‘이걸 말하는 걸 까먹었네.’
수보협이니, 체포니 뭐니 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70층 이상에서는 천사나 악마의 존재도 공공연한 사실이라고 하니, 석찬은 설명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추가로 말씀드릴 사실이 있는데, 저 놈, 수인이 아니라 악…”
그 순간.
훙!
남자가 석찬을 향해 사슬을 내리찍었다.
쾅!
하지만, 석찬은 가볍게 사슬을 피하며, 이상해진 남자의 모습을 살폈다.
‘느껴지는 마력이 다르다.’
몸 주변으로 잿빛의 오라가 흘러나온다.
석찬은 곧장 레벨리온을 노려봤다.
그는 씩 웃으면서 석찬을 향해 입모양으로 외쳤다.
[넌 뒤졌어.]
그 순간, 사태를 관망하던 사람들의 눈이 석찬에게 집중되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따가운 살의를 내비치며, 그들이 좀비처럼 터덜터덜 석찬을 향해 다가왔다.
자신 앞에 서서 각자 무기를 꺼내드는 사람들을 보며, 석찬이 레벨리온의 멱살을 쥐며 물었다.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내가 왜 악마겠어?”
동시에 단도 하나가 렐을 향해 날아갔다.
탁!
이에 건틀릿으로 쳐낸 단도가 바닥에 꽂혔다.
치익.
검날에 독이 묻어 있었는지, 땅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멀쩡하군.”
곧이어 단검을 던진 복면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신 계열 스킬이 있는지 허공에서 나타난 그를 보며, 레벨리온이 씩 웃으며 물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것이냐.”
“계속 감시하고 있었죠.”
“똑바로 말해.”
“아니, 당신을 이길 정도의 무력을 지닌 놈한테 제가 어떻게 달려듭니까? 죽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의 말에 레벨리온은 이를 갈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도 지금 온 거 보면 아예 계획이 없는 것은 아니겠군.”
“물론이죠.”
복면의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석찬을 향해 작게 눈웃음 지었다.
‘뭐지?’
솔직히 그가 등장했을 때부터, 석찬은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내가 기척을 읽을 수 없다고?’
7년간의 수련으로 70층의 평균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무력을 지닌 석찬이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정밀한 은신. 그리고.
[저 녀석, 위험해.]
라우르의 말까지 더해지자, 석찬은 자연스래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레벨리온을 찌르는 그를 보고 석찬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커헉!”
심장을 찔린 레벨리온이 피를 뱉으며 남자를 노려봤다.
“로베르트… 네가 왜…?”
“역시 남작급 악마라 그런지 꽤나 오래 버티시네요.”
로베르트라 불린 남자는 단도 하나를 더 꺼내 무자비하게 심장이 있는 곳을 향해 다시 한번 칼을 내리찍었다.
“크아악!”
독이 꽤나 강한 것일까? 온몸의 핏줄이 도드라지고 가슴이 거무스름하게 변해간다.
“이건…”
“이론상 하위권 백작급 악마에게도 치명적인 극독인데 말이죠. 아무래도 오차가 있었나 보네요.”
그는 부들거리는 레벨리온을 뒤로하며, 태연하게 수첩을 꺼내 필기를 시작했다. 석찬은 그를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 맞다. 당신이 있었죠.”
어느새 수첩을 집어넣은 남자가 석찬에게 다가왔다. 석찬은 무의식적으로 렐을 감싸며 주먹을 쥐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죽일 마음은 없습니다.”
그 말과 함께, 남자가 눈을 빛냈다.
쾅!
“끄억.”
그의 뒤로 내려친 번개에 직격한 레벨리온이 움직을 멈추고, 이내 검은 재가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
“어?”
“뭐지?”
그와 동시에, 레벨리온이 건 것으로 추정되는 최면이 풀리고 사람들의 눈빛이 하나둘 돌아왔다.
그들은 한데 모여 무기를 들고 있는 것에 혼란을 느끼면서도, 금세 제정신을 차리며 각자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그 수인 분은?”
“도망갔습니다. 찔리는 게 있었나보죠.”
아직도 사슬을 들고 있는 수보협의 남자을 대충 타이른 복면의 남자가 석찬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찌, 자리를 옮길까요? 아니면 여기서…”
“자리를 옮기지.”
그의 대답에 복면의 남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석찬을 안내해 어딘가로 데려갔다.
* * *
“여긴….”
한 카페에 도착한 석찬은 무의식적으로 문 뒤쪽이나 구석진 곳들을 살폈다. 다행하게도 함정이나 매복 같은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의외네?]
라우르도 그렇고, 석찬은 복면의 남자를 믿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며 함정을 판 사람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닐 뿐더러 레벨리온을 죽이긴 했지만 아직 정체도 모르고, 여러모로 수상한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날 어쩔 셈이지?”
석찬은 렐을 자리에 앉히며 물었다. 이에 복면의 남자는 씩 웃으며 말헀다.
“말했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을 죽일 생각이 아닙니다. 오히려,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나 할까요?”
“대화?”
“네, 일단 주문부터 하시죠. 마시고 싶은 게 있으신지? 제가 살 테니 마음껏 주문하시길.”
석찬은 꺼림칙한 마음에 사양하려고 했지만.
“…….”
다른 테이블에 앉아 디저트를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이 팔린 렐의 모습이 보였다.
형형색색의 다양한 음료와 다과를 보며, 침을 질질 흘리는 그녀를 보니, 제안을 거절했다가는 한 대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이 아이가 원하는 걸로 시키도록 하지. 이상한 짓 하면… 알지?”
“안심하십시오. 자 우리 엘프 친구,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저씨가 다 사줄게요.”
“진짜요? 착한 아저씨다!”
“그래, 원하는 거 다 시켜요.”
신이 나 이것저것 주문하는 렐을 따스하면서도 그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남자. 그런 모습을 보니 또 나쁜 사람은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대량의 케이크과 쿠키 등이 식탁에 깔렸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