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파아앗.
한 줄기 마력이 남자의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간다. 남자의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기억의 일부가 석찬의 머릿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석찬은 빠르게 기억을 훑기 시작했다.
성공, 부, 연인 등등 여러 긍정적인 것부터 시작한 남자의 기억은 가면 갈수록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실패, 몰락, 배신, 나락. 그의 인생은 완전히 실패했다. 과거에는 꽤나 유명했을지 몰라도, 그 시절의 그는 알거지, 패배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고, 남자는 선택해야 했다.
이대로 지옥 같은 삶을 연명할 것인가, 아니면 편한 길을 택할 것인가.
그때, 고뇌하는 그에게 한 남자가 찾아왔다.
남자는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 얼굴은 전혀 볼 수 없었다. 마치 어떤 힘에 막힌 것처럼.
남자는 말했다.
[날 따라와라. 힘, 돈, 향락, 필요한 것은 뭐든 주지.]
남자의 말에 홀리듯 쫓아간 그는 남자가 세운 블랙카우란 집단의 1조 조장이 되고 막대한 부를 얻었다.
그리고 다시금 남자 앞에 선 그에게 남자가 무어라 말했다.
[이것을 마셔라.]
붉은 액체가 담긴 잔이었다.
1조 조장이 된 남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잔에 담긴 것을 들이켰다. 새로운 기회를 제공받은 그에게 불순종은 사치였다.
그렇게 남자의 몸이 변화했다. 악마를 연상하는 창백한 피부, 검은 머리, 붉은 눈. 악마화를 얻은 것이다.
‘악마화를 이런 식으로 전해준 건가?’
그때, 잔을 마시는 조장을 보던 의문의 남자의 눈과 석찬의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눈이 심히 붉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런, 오셔서는 안 될 분이 오셨군요.”
그는 마치 석찬이 기억을 훑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말했다. 이내.
“꽤나 유용한 장기말이었는데, 아쉽군.”
딱.
그가 손가락을 튕겼고.
“끄어….”
남자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뭐지?’
“끄아아…!”
급격하게 몸을 떠는 남자가 피를 토하며 눈을 까뒤집었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석찬이 빠르게 마법을 멈추고 남자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젠장.”
죽은 남자를 바라보는 석찬은, 그의 몸에서 소멸하고 있는 검은 마력을 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이런 수법을 쓸 줄이야.”
설마 부하를, 그것도 조직에서 세 번째로 강한 강자를 이렇게 쉽게 처리해버릴 줄은 몰랐다.
“잔악한 수법, 악마의 것이군요.”
에피르의 말에 석찬은 고개를 끄덕였고, 렐은 작게 몸을 떨었다.
“어어…?”
솔직히 그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다.
눈을 뜨니 블랙카우라는 곳에 도착해 있었고, 석찬이 의문의 남자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에피르는 렐을 진정시키며 조장의 몸을 뒤졌다.
“뭐 하는 거야?”
“확인할 게 있어서요.”
그녀는 남자의 팔이나 다리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한 문신을 보고 자리를 박차 일어났다.
“역시….”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눈을 돌리자, 뿔 형상을 지닌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석찬 님의 것과 같아요. 이것은 악마의 종임을 나타내는 문장. 엘리자베스가 탑에 거주하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안일했네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에피르.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더니 렐을 석찬에게 맡기며 말했다.
“잠깐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아요.”
“보고?”
“네. 중요한 사안이라 바로 보고해야 할 것 같아서, 다녀오겠습니다.”
에피르는 떠날 준비를 하며 한 가지 당부 사항을 전달했다.
“참고로, 기억에서 보았듯 이 힘을 준 이는 악마일 가능성이 큽니다.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알아.”
기억임에도 알 수 있었던 초월적인 능력, 그리고 악마의 문장까지 나타난 마당에 블랙카우의 수장이라는 녀석의 존재가 악마임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럼, 조심하시길.”
“빨리 갔다 와.”
목례를 마지막으로, 에피르가 날개를 펼쳤고,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천계로 떠난 그녀를 뒤로하고, 석찬은 렐을 데리고 조장 녀석이 알려준 길을 따라 블랙카우 수장의 방으로 향했다.
“아저씨. 위험한 거 아니죠?”
렐이 두려운 듯 떨면서 말했다.
“괜찮아. 나 몰라? 올킬러야, 올킬러.”
석찬은 그녀를 안심시키며 조금씩 앞으로 향했다.
‘흐음…’
솔직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석찬 또한 살짝 걱정이긴 했다.
‘꽤 센 거 같은데?’
수장의 방에 가까워질수록, 석찬은 강해지는 압박과 더욱 끈적한 마력을 견뎌야 했다. 자신의 영역 전체에 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리고 다른 이에게 힘을 양도할 수 있는 존재. 석찬이 알기론 그런 놈들은 귀족급 악마뿐이었다.
“젠장.”
7년의 수행. 정말이지 고되었고, 수행임에도 죽을 뻔한 적 많던 그곳에서, 석찬은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 굉장히 많은 노력을 헀다.
매일 악마를 소환해 상대하고, 정보를 수집했다. 덕분에 최하급 악마에게조차 한 합을 버틸까 말까 했던 석찬은 단 7년 만에 상급 악마를 홀로 격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귀족급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최하급인 남작만 하더라도 상급 악마 100마리분의 몫을 해낸다는 괴물들.’
비록 실질적인 무력은 상급 악마의 위인 최상급 악마와 큰 차이가 없다고는 하지만, 그들만이 가지는 ‘권능’이 창출해내는 변수를 고려한다면.
‘꽤 어려운 싸움이 되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석찬은 거대한 문 앞에 섰다.
석찬은 여전히 긴장한 렐에게 물었다.
“렐, 준비됐어?”
“괜찮은 거 맞죠?”
“그래. 그러니까, 잠시 쉬고 있어.”
“네?”
짧은 비명과 함께 정신을 잃는 렐. 솔직히 그녀가 잠재력이 높다고 해서 본신의 무력까지 강한 것은 아니었다.
기껏 얻은 새 동료를 바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좋은 판단이다.]
잠든 렐을 누이고 방어 마법을 수십 겹으로 걸쳐둔 석찬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기분 나쁜 마찰음과 함께, 수장의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 벽돌이 쌓여 만들어진 벽에는 실금이 쩌적쩌적 가 있었고, 잘 정돈된 책장과 진열된 무기가 구석 가득 차지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거대한 옥좌가 있었다.
게임의 최종 보스 방을 실제로 보면 딱 이런 모습일까?
보석과 금으로 장식된 옥좌는 마치, 40층의 드래곤 탈리야의 옥좌를 보는 것 같았다.
석찬은 그 위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너냐? 여기 대장이란 녀석이.”
남자는 말 없이 이를 내보였다.
날카로운 이빨이 하얗게 빛났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올킬러여.”
그 말에, 석찬은 흠짓 놀라면서도, 속을 내색하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올킬러인 것은 어떻게 알지?”
“위대한 마계의 대공을 격퇴한 인간을 잊는 악마가 있을 리가 있나?”
그 말에 석찬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그걸 안다고?’
“들었다. 네 녀석, 엘리자베스 님의 도움 없이 혼자 벨리아스 님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다고.”
거기까지 들은 석찬은 생각했다.
‘이 녀석, 설마 라우르의 존재까지 알고 있는 거 아냐?’
마계의 대공, 벨리아스와 싸울 때 그는 강신을 통해 강림한 라우르를 아는 눈치였다. 설마 이 녀석도 그런 것일까 싶었지만.
“그런데, 천계 소속 녀석인 것을 보니 이해는 되는구만. 누구랑 계약한 거지? 미카엘? 우리엘? 어떤 녀석이냐.”
하는 말을 보니 또 그건 아닌 듯했다.
[다행이다, 야.]
‘그러게요.’
라우르와 함께 조금은 안심한 석찬이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에피르의 계약자, 강석찬이다.”
그의 왼손에 새겨진 문장이 빛을 냈다.
이를 본 블랙카우의 수장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나는 레벨리온. 위대한 악마 남작이다.”
그 말과 함께 어둠 속에서, 레벨리온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양 귀 위로 팔뚝만 한 뿔을 단 채,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남자. 머리색은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다소 중2병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석찬은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저 녀석, 강해.’
아직 완전히 힘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1조 조장의 무력을 가뿐히 상회하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녀석을 보며, 석찬은 살짝 긴장했다.
석찬은 양 뺨을 때리며 레벨리온을 쳐다봤다.
‘정신 차려라, 강석찬.’
싸우기 전부터 상대에게 기가 눌리면 안 된다.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레벨리온의 붉은 눈을 응시했다.
“기백은 나름 합격점이군. 그렇다면… 그 무력은 어떨지 한번 볼까?”
레벨리온이 천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앉아있느라 감춰져 있던 그의 거대한 몸집이 모습을 드러났다.
5m는 될 법한 거대한 키에 몸 이곳저곳을 꽉꽉 채운 근육 덕분인지 일반인은 보기만 해도 절로 전의가 꺾일 것 같았다.
‘하지만.’
크롤로프 영감이나 거대 키메라 같은 놈들을 봐왔던 석찬에게 5m 정도야, 별로 큰 것도 아니었다.
그의 주먹에 마력이 덧씌워졌다. 중첩된 마력이 단단하게 굳는다.
강마력.
이제는 일반 마력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절세의 기술에 힘입어, 석찬이 레벨리온을 향해 날아갔다.
“어딜!”
쾅!
석찬과 레벨리온의 주먹이 부딪치자, 거대한 파공음이 방 전체를 훑었다. 책이 떨어지고, 천장에서 파편이 떨어진다.
부들부들.
주먹을 맞대고 있지만, 어느 한 사람도 밀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힘은 호각인가?”
먼저 주먹을 뗀 레벨리온이 석찬을 걷어찼다.
뻥!
날아간 석찬이 마력으로 몸을 멈춰 세우며 탄력을 받아 다시금 레벨리온을 향해 도약했다.
“잠시 이거나 상대하고 있어라.”
그의 손에서 갖가지 속성의 마법이 흘러나왔다.
“이런, 마법사였나?”
“아니?”
마법으로 시선을 끈 사이, 강마력을 두른 석찬의 주먹이 레벨리온의 갈빗대를 강타했다.
“크학?”
이후로도 비슷한 패턴의 공방이 계속되었다. 강력한 마법으로 시선을 분산하며 정타를 날리는 석찬.
50층 마지막 시험에서 또 다른 자신이 보여주었던 마법과 물리력이 적절히 어우러진 전투를 석찬은 어렵지 않게 해내고 있었다.
오히려 베테랑의 면모를 풍기며 레벨리온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놈…”
레벨리온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석찬을 노려봤다.
“고작 그게 다냐? 살짝 실망인데?”
귀족급 악마라고 하기에는 아쉬운 면이 여럿 보이는 무력. 솔직히 훈련의 방을 나오기 전에 상대했던 상급 악마보다 약해 보였다.
경멸의 눈빛을 받자, 레벨리온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네 놈… 인간 따위가. 고작 그 정도 힘을 가지고!”
순간, 레벨리온의 힘이 폭발하듯 치솟았다.
“이건?”
그리고, 자욱한 연기 사이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석찬을 강타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