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커헉!”
한 사내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블랙카우 1조 조장이자, 사실상 조직의 3인자인 남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젠장….”
처음 침입자 경보가 울렸을 때는, 뭣도 모르는 인간이 본부에 발을 들였나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침입자는 강했다.
‘이런 기분은… 그분들 앞에 서는 것 같군.’
조직의 3인자라는 말은, 위로 두 사람이 더 있다는 소리. 지금 남자는 1, 2인자를 만날 때 느끼는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못 이긴다.’
조원들의 상태를 보니 자신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 전원이 베테랑 사냥꾼 급인 2조 조장, 라이젠보다 강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군.”
피가 섞인 가래를 뱉은 남자의 기운이 변화했다.
끈적이면서 어둡고 기분 나쁜, 하지만 그 무엇보다 잘 알고 반가운 기운이었다.
“어떠냐, 침입자.”
모습이 변화한 남자가 석찬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한다면 편하게 보내주마.”
붉은 눈과 칠흑같이 검게 변한 머리칼, 그리고 창백해진 피부까지. 마치 천무진의 악마화를 보는 듯했다.
“조금은 다른가? 그래도 오랜만이네, 그거.”
“오랜만?”
남자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석찬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보기만 해도 살이 떨리는 남색 마력이 남자의 검은 마력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놈!”
남자가 검은 마력을 펼쳐 몸을 방어했다. 하지만, 몇 배는 늘어난 마력으로도 석찬의 마력을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었다.
“잔재주를!”
“잔재주?”
석찬이 마력을 더욱 주입하자, 남자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크학!”
한계에 다다른 남자가 다시금 벽에 쳐박혔다.
“약하다. 너 1조 조장이라며?”
“모두 덮쳐!”
남자의 말에, 쓰러져 있던 1조 조원들이 일어났다.
“모두 변형을 써라!”
그 말과 동시에 조원들의 몸이 변화했다. 1조 조장인 남자와 비슷한 모습에다가 신체 능력도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너희들도 다 할 수 있는 거였냐?”
“보았나? 이것이 우리 전투대 1조만이 선사받은 신의 권능이다!”
이어지는 조장 녀석의 설명에 석찬이 피식 웃었다.
“신의 권능?”
갑자기 웃음이 났다. 신의 권능이라니.
붉은 눈, 창백한 피부, 검은 머리. 결정적으로 검은 마력까지.
[석찬아, 손 좀 봐줘라.]
‘예.’
라우르의 말에 석찬의 손에 마력이 모이다가 그쳤다.
“너희들한테는 이것도 아까워.”
석찬이 마력의 보호도 받지 않는 맨손을 치켜들었다.
그 모습에 조장도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 마력도 없이 우릴 상대하려는 건가? 장난이 지나치군.”
“장난인지 아닌지는 상대해 보면 알겠지.”
석찬이 가장 가까이 있는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어딜!”
악마화로 신체 능력이 올라간 마당에, 마력을 쓰지 않는 상대방에게 겁을 먹을 필요 따윈 없었다. 남자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석찬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훙-.
하지만, 주먹은 공기를 가르고, 어느새 남자의 옆에 다가선 석찬이 날카로운 바디 블로우를 꽂아 넣었다.
쿵!
“커헉!”
묵직한 충격과 함께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성능 좋네.”
석찬은 평소처럼 순백의 외형을 지녔지만, 미묘하게 겉표면이 변화한 건틀릿을 치켜들었다. 새로운 보석이 장착된 것 말고도, 곳곳에 금빛 테두리나 날카로운 외장이 추가된 건틀릿은 7년의 수행 끝에 얻어낸 보물이었다.
[2차 봉인이 풀린 건틀릿]
[등급 : 유니크(봉인)]
[공격력 + 1000]
[내구도 : 1000/1000]
[모든 스탯 + 30%]
[공격시 일정 확률로 10배의 데미지가 적용됩니다.]
[대상의 방어력을 관통합니다.]
[봉인됨]
사실 이전부터 봉인이 풀릴 기미가 보이긴 했다. 첫 봉인 해제 때처럼 쩍쩍 갈라진 외장이 그 증거였다.
그리고, 이는 수행 중에 봉인이 풀림으로서 석찬을 더욱 성장시켰다.
처음 건틀릿의 정보를 확인한 석찬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방어력 관통?’
엘리자베스나 이브에게 들은 적이 있다. 방어력을 관통하는 옵션은 탑 내에서 가장 희귀한 장비 옵션 중 하나이며, 이마저도 퍼센트로 이루어진 옵션이 전부라고.
그런데 지금 석찬이 보는 옵션에는 퍼센트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 말인즉슨 100%의 확률로 방어력을 관통한다는 소리.
그리고 지금, 석찬은 이 효과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무력을 뽐내고 있었다.
“크억…!”
“으윽….”
지금 그의 앞에는 열 명의 1조 조원들이 저마다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공격은 전부 피하면서, 수많은 정타를 집어넣으니 아무리 악마화를 한 그들이라도 버틸 턱이 없었다.
“이 맛이지.”
석찬은 건틀릿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에피르를 쳐다봤다.
그녀는 석찬의 건틀릿을 물끄러미 쳐다보니 짧게 말했다.
“조심히 다루십쇼.”
의미심장한 말에 석찬이 건틀릿을 가리키며 물었다.
“진짜 솔직하게 말해줘. 아무리 시스템이 막아도 간접적으로라도 설명할 수 있잖아?
퍽!
악바리처럼 일어나 달려드는 조원을 쳐내며, 석찬은 에피르를 바라봤다.
7년의 수행 도중, 진화한 그의 건틀릿을 본 에피르는 놀라며 말했다.
‘어떻게 그걸 당신이 가지고 계신 겁니까?’
‘이거에 대해 아는 거 있어?’
그 물음에, 에피르는 고민하면서도 일편적인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 물건은… 과거 ■펠■■께서 만드신 물건입니다. 오래전에 사라졌는데, 당신한테 있을 줄은 몰랐네요.’
‘펠 뭐라고?’
‘모르셔도 됩니다. 뭐, 당신한테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요.’
알 수 없는 말만 남긴 에피르는 이후 건틀릿에 대해 물어봐도 어물쩍 넘길 뿐이었다.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석찬 님께 위해가 가는 것은 전혀 없으니, 지금까지 쭉 그래왔던 것처럼 잘 사용하시면 됩니다.”
또 저 말이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여기서 더 따지고 들어가 봤자 얻을 것도 없이 심력만 소비될 것이었다. 석찬은 한발 물러났다.
그래도, 아예 소득이 없는 건 아니다.
그동안 쭉, 꾸준히 물어본 덕분에 건틀릿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첫째, 건틀릿은 최소한 ‘신’급의 인물이 만들어낸 물건이다.
최상층 바로 아래로 여겨지는 70층까지 등반한 석찬이 들을 수 없는 키워드는 흔치 않았다. 그리고, 천사장인 에피르가 놀란 점에서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는 범위였다.
둘째, 건틀릿은 생각보다 오래된 물건이다.
생각해 보니 과거, 처음 라우르를 만났을 때도 그는 건틀릿에 대해 알고 있는 눈치였고, 필터링에 가려지긴 했지만, 무기의 정체에 대해 말해주기도 했었다.
‘라우르, 라우르는 말해줄 거죠?’
[어림도 없지. 최소한 90층은 오르고 얘기해라.]
하지만, 건틀릿의 두 번째 봉인이 풀린 이후, 라우르는 어째서인지 건틀릿이 뭔지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어쨌든, 수천 년 전에 봉인당한 라우르가 알 정도면 건틀릿이 상당히 오래된 것임은 확실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건틀릿은 상당히 위험한 물건이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봉인이 추가로 풀리며 석찬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건틀릿 안에 잠들어있는 말도 안 되는 힘. 이는 지금의 석찬도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따금씩 에피르가 날리는 불안한 시선은, 석찬에게 하여금 건틀릿에 관해 더욱 큰 궁금증과 호기심을 낳았다.
퍽!
마지막 남은 녀석을 때려눕히자, 더 이상 일어나는 조원들은 없었고, 그제서야 석찬은 잡념을 관두고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또 너만 남았네?”
“크윽…”
석찬은 홀로 남은 조장 앞에 나아갔다.
턱.
그저 손만 올려다 두었을 뿐인데, 남자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했다.
“너무 떨지 마, 질문하는 거에만 제대로 답하면, 아무 짓도 안 할 거니까.”
석찬은 그를 안심시키며, 궁금했던 점들을 몇 개 물었다.
“너네 대장, 얼마나 강하냐?”
1인자의 강함. 이것은 가장 궁금한 사항 중 하나였다. 블랙카우라는 조직 자체를 완전히 와해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의 강함을 아는 것이 먼저였다.
비록 3인자라는 녀석까지는 기대 이하였지만, 혹시 몰랐다.
1조 조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점점 압박이 거세지자 입을 열었다.
“그분은… 그 누구보다 강하시다. 나 같은 이가 100명이 있어도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말이다.”
“100명이라… 알았어.”
석찬은 이후로도 몇 가지를 더 물어봤다.
대장에게 가는 길에 또 다른 특이점이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왜 이런 쓰레기 같은 짓거리에 동참하고 있는지 등등. 꽤 많은 것을 물어본 석찬은 마지막으로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너랑 네 조원들, 어떻게 ‘악마화’를 사용하는 거지?”
그 말에 여태까지 순순히 질문에 답하던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닫았다.
“말 안 해?”
꾸득.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주었지만, 남자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허어….”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며 참는 남자의 인내력에 석찬이 혀를 내둘렀다.
“지금까지 잘 말해주다가 왜 그러는 건데?”
“다른 건 몰라도, 그것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없다. 내 명예를 걸고.”
“흐음.”
완고한 남자의 말에 석찬이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이 남자의 입을 열게 할 수 있을까.
‘아.’
잠시 고민하던 석찬의 머릿속에 한 가지 수가 떠올랐다.
퍽!
남자의 뒷목을 짧게 내려친 석찬이 쓰러진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한번 시작해 볼까?”
과거, 15층에서 있었던 일이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전투 중 하나인 샌드웜 전투. 힘겹게 샌드웜을 쓰러트리고, 석찬은 추가로 달려드는 암살자들 덕분에 꽤나 큰 곤욕을 치뤄야 했다.
‘못 본 지 10년이 넘었나… 잘 지내고 있겠지?’
지금은 1층에서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는 암살자 라이너 영감, 충성심이 깊은 그는 지금처럼 도저히 정보를 말하지 않았고, 석찬은 그의 입을 열기 위해 정신 마법을 사용한 적이 있다.
그때 정신 마법의 유용성을 깨달은 석찬은 이후로도 꾸준히 정신 마법과 관련된 자료를 보고 연습했고, 지금은 상당한 수준의 정신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어디 한번 봐볼까?’
석찬의 머릿속으로 남자의 기억이 천천히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 * *
어두컴컴한 방 안.
거대한 옥좌에 앉아 있는 사내가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으악!]
[도망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진격해오는 석찬 일행을 보며, 사내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 어디 한번 와봐라.”
자신이 있다면 말이야.
그의 눈이 붉게 빛난다.
“크하하하하!”
사내의 웃음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