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라이젠, 그는 70층에서 나름 유명한 사냥꾼이다. 뛰어난 재능과 여러 기연으로 얻은 최상급 스킬들을 이용하며 빠른 속도로 1급 사냥꾼이 된 그는 큰 부를 축적해 나갔다.
세간에서는 그가 역대 최연소 베테랑 사냥꾼이 되리라고 예측하기까지 했으니, 그의 유명세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으니, 도박, 술, 유흥 등등 잘못된 길에 빠지며 금세 알거지로 전락한 그는 절망했다.
어쩌다 인생이 이렇게 됐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냥 죽는 것까지도 생각할 때쯤.
‘어이, 너 내 밑에 들어와라.’
그 남자가 찾아왔다.
처음에는 당연히 경계했다. 생판 모르는 남자가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라고 하는데, 경계하지 않는 멍청이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가 보여준 주머니속 내용물에 라이젠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이건….’
골드로 가득 찬 주머니 안을 보며, 라이젠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남자와 가방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거 용량이 꽤 커서 말이야. 아마 3백만 골드 정도 들어 있을 거다.’
‘3백…만…’
과거에는 본인도 쥐어본 금액이지만, 알거지가 된 지금은 감지덕지 수준을 넘어 경외가 느껴질 정도의 액수였다.
라이젠은 자연스럽게 경계를 풀고 그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건네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고작 돈에 무너지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들기도 잠시.
‘이 돈이면…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그런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직후 라이젠은 남자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저쪽에서 성의를 보였는데, 이쪽에서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라이젠은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힘을 보고 침음했다.
‘저런 힘이라면 도망쳤다간 순식간에 죽을 거야.’
베테랑 사냥꾼에 준하는 힘을 가진 라이젠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의문스러운 남자의 부하 생활. 이는 나름 순탄하게 흘러갔다.
납치, 인신매매 등등 꺼림직한 일들도 많긴 했지만, 보수가 달달했기에 양심의 가책은 조금 버려두기로 했다.
게다가 일이 끝날 때마다 남자가 주는 의문의 약. 보라색 액체가 마치 전설 속 엘릭서 같았는데, 성능 또한 훌륭했다.
한 번 마실 때마다 스테이터스가 상승하고 몸이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강해진 라이젠은 어느새 부하들 사이에서도 선망을 얻으며 높은 직급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와중, 어떤 이야기가 들려왔다.
‘3조가 당했다. 한 놈한테.’
남자는 휘하의 부하들을 다섯 개의 조로 나누어 활동하게 했다. 작은 숫자일수록 강하다는 특성상 3조는 부하 중에서도 중간 정도의 강함을 지녔다는 뜻.
2조 조장인 라이젠에 비해 훨씬 약한 자들이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늦게 합류한 그를 동생처럼, 허물없이 대해줬다는 점에서 그는 분노했다.
‘당장 알아내!’
조원 몇을 시켜 알아본 결과, 3조를 궤멸한 남자에 대해 알아낼 수 있었다. 70층에 올라온 지 고작 하루 된 인간이었다. 게다가 인상착의는 거지가 따로 없었다.
‘이런 거렁뱅이한테 당했다고?’
석찬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친 라이젠은 끊었던 술을 병째로 들이켰다.
‘죽인다.’
그 말에 주변에 있던 그의 조원들은 생각했다.
이거 일 난다. 100% 일 난다.
수년간 그와 함께해온 이들은 잘 안다. 그가 술을 마시면 미친개가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결국 일이 터져버렸다.
‘그 새끼 찾아! 당장 조지러 간다!’
독단적인 출격 명령이었지만 위에서 까라고 하는데 뭐라고 할 수 있나. 결국 조원들은 하나둘 장비를 챙기고 석찬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착한 식당에서 예상대로 라이젠은 난동을 부렸다. 다짜고짜 시비를 건 그는 사건에 연관되어 있다는 여자애를 납치한다고 했다. 내키지 않긴 했지만, 듣지 않았다간 화가 미칠 것이 눈에 뻔히 들어왔기에 그녀를 데리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일어났다.
* * *
“약하네. 너도.”
남자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웬 처음 보는 사내가 자신의 조장이 마력을 듬뿍 담아 날린 일격을 맞고도 일어나지 않나. 그리고.
“어디,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게 된 이유나 한번 들어볼까?”
“끄으윽….”
완전히 피떡이 되어서 사내 앞에 쓰러진 라이젠을 보며, 두 눈을 의심했다.
싸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사내는 라이젠을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이 가볍게 제압했다.
“어휴 술 냄새, 술을 얼마나 마신 거냐? 응?”
사내가 마력을 일으키자, 라이젠의 몸에 가득 퍼져 있던 술기운이 전부 사라졌다.
“어어…?”
그러자 풀려 있던 라이젠의 눈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긴?”
“여긴? 아무것도 기억 안 나나?”
석찬은 어이없다는 듯 라이젠을 바라봤다.
“마을 내에서 대놓고 납치에, 마력 사용이라… 이거 참 문제다, 그렇지?”
석찬의 말에도, 라이젠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나?”
“진짜 미친놈이네, 이거. 거기 너.”
석찬은 가장 가까이에서 떨고 있는 사내를 불렀다.
“저요?”
사내는 자연스럽게 존칭을 사용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빠르게 설명해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 옙!”
사내의 설명을 들을수록 라이젠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그래, 몇 번을 물어보려는 거냐.”
“미…미안하다. 아니, 미안합니다.”
예상과는 다르게 빠르게 고개를 숙이는 라이젠. 하지만, 석찬의 표정에는 여전히 화가 남아 있었다.
‘녀석은, 렐을 죽이려고 했어.’
렐은 잠재력이 100인, 탑 전체를 뒤져봐도 찾아보기 힘든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다. 게다가, 미래의 동료로 점찍어둔 이상 그녀를 해하려 한 자를 그냥 둘 순 없었다.
‘그리고.’
석찬은 작게 떨리는 왼손의 장갑을 펼쳤다. 하얀 날개가 작게 펄럭이고 있었다.
‘이건.’
그 순간.
쾅!
가게의 천장이 터져버렸다.
“꺅!”
“뭐, 뭐야?”
가게 안에 남아 있던 일부 손님들이 비명을 지르고 가게 주인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구멍을 쳐다봤다.
“내… 내 가게가.”
갑자기 뚫린 천장에 당황한 건 석찬이나 라이젠도 마찬가지였다.
“저건… 대체?”
어리바리하는 라이젠과 달리 석찬은 한숨을 쉬며 허공을 향해 말했다.
“아무리 화나도 그렇지, 그렇게 나오면 어떡해?”
“저 인간이 한 짓을 몰라서 그러십니까?”
자욱하게 깔린 먼지와 잔해 사이에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백발에 백안의 천사, 에피르였다. 머리카락처럼 새하얀 그녀의 피부가 붉게 변해 있었다. 눈매 또한 평소에도 날카로웠지만, 지금은 딱 봐도 화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매서웠다.
에피르는 말없이 라이젠 앞에 섰다.
“저…저기… 누구?”
“알 것 없습니다.”
순간, 라이젠의 위로 거대한 압박이 일었다.
“끄아악!”
석찬에게 죽도록 맞아 체력이 닳아 있던 그는 아무런 저항도 못 해보고 쓰러졌다.
“끄으윽….”
10초 정도 압박을 가한 에피르는 기운을 거둬들이며 말했다.
“렐 님께 큰 이상이 생겼더라면, 이걸로 끝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감사하게 여기세요.”
에피르는 무심한 투로 이야기하고 석찬에게 다가갔다.
“웬 이상한 인간 때문에 고생하셨군요.”
“고생이라 할 거 있나. 그나저나, 꼭 그렇게 난리를 치면서 등장해야겠어?”
석찬은 천장을 보며 혼이 빠져 있는 식당 주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상부의 허가가 나고 자세한 내용을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에피르는 다시금 라이젠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런 상황이 펼쳐졌지 뭡니까.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에피르는 고개를 돌려 식당 주인께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그녀가 손을 뻗자, 천장에 크게 뚫린 구멍이 점점 매꿔지기 시작했다.
파앗-
에피르의 등 뒤로 여섯 장의 흰 날개가 펼쳐졌다.
“저건…?”
이에 사람들이 하나둘 가게 안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천사다!”
한 남자가 소리치자,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천사? 진짜 천사라고?”
“대박! 나 천사 처음 봐.”
에피르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빠르게 구멍을 메꿨다. 천사의 힘을 사용하자 구멍 하나 메꾸는 것은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
작업을 마친 에피르는 날개를 접고 석찬에게 다가갔다.
“끝났습니다.”
“오케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다시금 수군거렸다.
“천사랑 말하는데? 부럽다.”
“잠깐, 저거 봐봐! 저 사람 손!”
한 여인의 가리킴에 사람들의 시선이 석찬의 왼쪽 손등으로 향했다.
천계를 뜻하는 날개 문장.
“저 사람, 천계 소속인 거 같은데?”
“진짜? 헐….”
그제야 라이젠도 석찬의 문장을 확인했다.
가짜가 아닌 진짜 천계의 문장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보기만 해도 진짜임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천계 소속이라고?’
세간에 알려진 마지막 천계 소속의 인간이 나타난 이후 벌써 81년이 흘렀다. 심지어 그 남자도 30년 전 종적을 감췄다.
‘설마, 새로운 천계 소속 인간의 등장인 건가?’
눈앞의 남자가 바로 그 인간이고.
‘확실히….’
그렇다면 자신을 무리 없이 두들겨 팬 그의 무력이 이해가 됐다. 천계 소속의 인간은 하나같이 괴물이니 말이다.
그때, 석찬이 라이젠에게 다가왔다.
“뭡니까.”
“아, 별건 아니고, 너희 본거지 좀 알 수 있을까 싶어서.”
“응?”
라이젠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그걸 말해줄 것 같소? 아무리 모난 곳이라도 오갈 곳 없는 날 받아준 곳인데, 그걸 불면 내가 사람 새끼가 아니…”
“잠깐.”
텅.
석찬이 라이젠의 말을 끊으며 아공간 주머니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이건?”
“뭔지 예상되잖아?”
“설마 날 돈으로 매수…”
라이젠은 말을 잇지 못하며 주머니 안에 든 찬란한 금화에 시선을 뺏겼다.
‘백만? 아니, 이백만?’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석찬이 폭탄을 들이부었다.
“일억 골드다.”
“???”
그 말에 라이젠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전부 석찬을 쳐다봤다.
“너, 딱 봐도 돈 때문에 움직이고 있는 거 같은데, 그거 받고 알려주지 그래?”
석찬은 라이젠 같은 이들을 잘 안다. 돈만 주면 뭐든지 행동하는 사람. 마치 심부름꾼과 같은 자들 말이다.
어차피 일억 골드 정도야 천계 소속이 되며 십억 단위로 골드를 소유하고 있는 석찬에게는 별로 감흥이 없었다.
그런 석찬의 표정을 보며, 라이젠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환영합니다, 고객님. 이쪽으로 오시죠.”
그 모습에 그의 부하들이 소리쳤다.
“조장? 지금 뭐 하는…?”
“설마 돈에 우리를…?”
“이 일이 끝나면, 인원수대로 나눈다.”
“환영합니다, 고객님!”
“저희 본거지는 이쪽입니다!”
그렇게 라이젠과 부하들의 보호와 안내를 받으며, 석찬과 에피르, 그리고 렐은 아무런 피도 보지 않고 그들의 본거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