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렐. 그녀는 지금 심히 당황한 상태였다.
‘자른 머리가 이상한가…?’
이런 시답잖은 고민이나 하면서 머리를 매만지고 있는 아저씨를 보고 있자니 그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강석찬이라고요? 옛날에 엄청 유명했던?”
“나 여기서도 유명했어?”
“그걸 말이라고 해요?”
비단 70층뿐만이 아니다. 탑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 강석찬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신기하네, 그 거지 아저씨가 강석찬이라니, 올킬러라니!”
“거지라… 하하.”
한껏 텐션이 올라간 렐을 뒤로하고, 석찬은 라우르에게 재차 물었다.
‘라우르, 얘 진짜 잠재력 100 맞아요?’
[물론이지. 성격은 조금 그렇긴 한데, 재능은 확실해. 시스템만 부여받는다면 굉장히 빠르게 성장할 거야.]
‘그럼 좋겠네요, 진짜.’
석찬은 여전히 신이 나 떠들고 있는 렐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좋냐?”
“당연하죠, 아저씨랑 같이 탑 오르는 게 소원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당장 밖에서 ‘나 올킬러요’라고 하면 같이 파티하자고 하는 사람들 엄청 많을걸요?”
“그럼 미안하겠네. 난 이미 파티원이 있어서.”
“그 사람들이요? 무슨 무슨 좀비랑 은발의 천사?”
“응. 혹시 두 사람을 알아?”
그 말에 렐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이죠. 그 사람들 몇 년 전에 80층에 도달했대요. 파티원이 두 명 더 있다고 들었는데….”
렐은 잠시 고민하더니 두 이름을 더 뱉었다.
“귀검이랑 로즈데빌! 두 사람도 엄청난 미남 미녀라고 들었는데, 알아요?”
‘천무진이랑 엘리를 말하는 건가?’
석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고 있나 보네.”
“그러고 보니 왜 파티에서 이탈한 거예요? 올킬러는 항상 파티원이랑 같이 행동한다고 들었는데….”
호기심이 가득 담긴 렐의 질문에 석찬이 손에 씌워진 가죽장갑을 벗어 보였다.
그러자 보이는 하얀 날개 문장.
“이건….”
렐이 문장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문장이 밝게 빛나며 렐의 손을 밀쳐냈다.
“꺅!”
“괜찮아?”
“뭐예요? 이거.”
석찬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 천계 소속이야. 이건 천계 소속임을 증명해주는 문장이고.”
“에?”
그 말에 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동자의 크기와 떨림으로 미루어 보아 자신을 강석찬이라고 밝혔을 때보다 더 놀란 것 같았다.
“언제까지 놀랄 거야?”
보다 못한 석찬이 한마디 하자.
“아니! 어떻게 안 놀랄 수가 있어요?”
렐이 볼을 부풀리며 석찬을 쳤다.
“아까 봤던 여자 있지?”
“예쁜 언니.”
“그 사람이 천사야.”
“헤…”
이제는 놀랄 기운도 없는지 맥이 빠진 소리를 내뱉으며 혼이 나간 듯한 렐을 보며, 석찬은 마법으로 찬물을 생성해 그녀의 머리를 적셔줬다.
“으악! 뭐예요?”
“정신 차리라고. 와봐.”
이번에는 따스한 바람을 일으켜 그녀의 머리를 말려준 석찬은 전에 그간 일어난 상황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 * *
때는 7년간의 수행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마력 수련에 열중하고 있던 석찬 앞에 에피르가 나타났다.
“이제 그 코어에도 적응하고 계시는군요.”
천사는 마력 저장소를 코어라고 불렀다.
“어. 1년이나 됐는데 제대로 못 쓰면 멍청이지.”
석찬이 가볍게 마력을 일으켰다. 짙은 남색으로 빛나는 말이 나타나 에피르에게 발을 휘둘렀다. 뛰어난 마력 컨트롤에 그녀도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당신을 천계 소속으로 만든 보람이 있군요. 지난날에 받았던 스트레스들이 한번에 날아가는 기분이에요.”
“나도 스트레스 많이 받은 건 마찬가지니까, 그거에 대해서는 쌤쌤하자고, 오케이?”
“알겠습니다.”
석찬이 어깻죽지에 힘을 주자, 남색 날개가 한쌍 생겨났다. 10년이 넘는 세월 만에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 마력 날개였다.
“그나저나, 갑자기 왜 찾아온 거야? 수련 중에는 간섭하지 않기로 약조했을 텐데?”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곧 탑을 오르는 것을 재개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이브와 다른 파티원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5년 정도 걸릴 거라고 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이 겹치다 보니 7년이란 시간 동안 수련에만 열중한 석찬이었다.
‘걔네한테 미안한 것도 있고, 여기서 수련한다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없을 것 같고.’
이 때문에 이제 그만하고 다시 탑을 오르는 데 열중하기로 했다. 현재 상태창을 보면 레벨은 아직 263, 수련을 시작하기 전과 동일했다.
그렇다. 몬스터를 사냥하지 않았기에 경험치를 얻을 수가 없었고, 따라서 레벨 또한 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수련으로 마력 스탯을 올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올릴 수 있는 스탯은 그게 전부.
다른 스탯은 수련으로 올릴 수도 없고 오로지 레벨로 얻은 스탯 포인트로 올릴 수 있었다.
‘스탯도 굉장히 중요하니까.’
하루빨리 레벨을 올릴 필요가 있었다.
‘다른 애들은 몇 레벨일까? 300레벨은 다 넘었겠지?’
오랜만에 파티원들이 보고 싶었다.
“진짜 올라가실 건가요?”
재차 물어보는 에피르에게 석찬이 확고한 의지를 담아 말했다.
“어, 올라갈 거야.”
그 말에 에피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훈련 공간은 언제나 열려 있으니 다시 들어오고 싶으시다면 관련 명령어를 말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에피르는 석찬은 손등에 손을 얹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손등에 날개 문장이 하나 생겨났다.
“이건?”
“천계 소속임을 나타내는 문장입니다. 70층 이상부터는 천사와 악마에 대해 대부분 알 테니 이를 보이면 시비 걸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관심 끌릴 것 같은데.”
“당연하죠. 자부심을 가지세요.”
“자부심이고 자시고, 귀찮은 건 질색이라.”
석찬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장갑 하나를 꺼내 손을 가렸고, 에피르는 그를 바라보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뭐, 그래요,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 당신께 드릴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 더? 뭔데?”
“이겁니다.”
에피르는 석찬에게 푸른 펜던트 하나를 건넸다.
‘이건….’
“정보를 한번 열람해 보시죠.”
그녀의 말에 석찬은 펜던트의 아이템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천사의 펜던트]
[등급 : 레전더리]
[내구도 : ∞/∞]
[천사장 에피르를 소환합니다.]
[남은 횟수 : 3/3]
“소환…?”
“그렇습니다. 당신은 앞으로 정확히 세 번, 저를 부르실 수 있습니다.”
“세 번밖에?”
“세 번도 많은 겁니다. 보통 천계 소속 인간도 한 번에서 두 번이 평균 소환 가능 횟수입니다.”
“그래?”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당신의 담당 천사가 된 이상, 위기의 순간에는 펜던트 사용 없이도 찾아갈 겁니다.”
“오.”
그렇다면 세 번의 횟수로도 충분히 만족 할 수 있다.
“그리고 펜던트를 통해 저를 불렀을 때 요구 사항을 하나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요구 사항? 자세히 어떤 거?”
에피르는 들어줄 수 있는 요구 사항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체력 및 마나 회복부터 시작해서 위기를 타파할 수 있는 장비 대여 등등 굉장히 많은 것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석찬의 이목을 끈 것이 하나 있었다.
‘원하는 사람에게 시스템을 부여해줄 수 있다라.’
“진짜야?”
“물론이죠. 탑에서 나고 자란 현지인에 한해서 시스템을 부여해줄 수 있습니다.”
솔직히 석찬은 파티원을 늘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생각해봐라.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을 구한다면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
때문에 석찬은 생각했다. 재능 있는 자 중 믿을 만한 사람을 만들자고, 그리고 동료로 만들자고.
이 생각을 하고 몇 주 뒤, 석찬은 라우르의 세 번째 영혼 조각을 찾고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 * *
“그렇게 발견한 사람이 너야.”
“우와….”
요약한다고 하긴 했지만, 상당히 장황한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렐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놀라움을 감추지 않고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가 잠재력이 그렇게 높아요? 진짜로?”
“말했잖아. 나 잠재력 볼 수 있다고.”
당연하게도 라우르 관련 이야기는 적당히 각색했다. 유적에서 얻은 의문의 아이템으로 잠재력을 볼 수 있다고 거짓말을 쳤다. 그래도 다행히 렐은 이를 믿는 눈치였다.
“근데, 이런 거 다 말해줘도 돼요? 천계 소속이라든지, 천사라든지…”
“뭐, 어차피 같은 파티인 이상 말해줘야 하는 거니까.”
에피르까지 봤는데 숨겨봤자 의심만 살 뿐이다.
“히히, 알았어요.”
순수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며, 라우르가 한마디 했다.
[의심조차 안 가지다니… 확실히 순진해.]
‘확실히….’
아무리 현지인이라도 순진함이 정도를 넘어섰다. 보통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조금이라도 의심할 법한데, 그녀에게서는 그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죽하면 본심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로 며칠간 렐과 함께 지낸 석찬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순수함은 가짜가 아닌 진짜다. 그래서 석찬은 더욱 안심했다.
‘이런 애가 내 사람이 된다면…’
그녀가 자신에게 확실한 믿음을 준다면, 최소한 자신의 등을 찌르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았어.’
그녀를 위해 펜던트의 소환 횟수를 한 번 소모한 것이 아깝지 않았다.
만족한 석찬이 그녀를 데리고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아저씨, 여긴?”
“찾아보니까, 여기가 근방에서 맛있다고 하더라고.”
베테랑 심부름꾼에게 의뢰해 알아낸 숨겨진 맛집이었다. 조만간 진짜 동료가 되는데, 기념으로 맛있는 밥이나 한번 사줄 생각이었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이 만든 것과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우와… 맛있겠다.”
음식이 나오자, 식욕을 참을 수 없던 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에 집중했다.
비싼 돈 주며 알아본 맛집답게, 맛은 훌륭하단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엄청났다.
“마시썽~.”
렐은 신이 나 고기가 가득 들어간 볶음밥을 흡입했다. 엘프는 풀만 먹고 사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란다. 엘프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채소와 고기 둘 다 즐긴다고 한다.
그렇게 행복한 식사 도중.
“어이.”
“응?”
“응? 응은 콱 씨.”
갑작스럽게 걸린 시비에 석찬은 당황했다.
상대는 거구의 사내였다. 사내는 술에 취했는지 볼과 코가 새빨개져 있었다.
“무슨 일?”
“잠깐 나가 있어봐! 옆의 계집한테 할 말 있으니까.”
“계집? 얘?”
석찬이 렐을 가리키자,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 그러니까 나와 이 새끼야!”
갑자기 마력을 일으키며 석찬을 밀쳐내는 사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석찬은 돌아가는 상황을 관찰하고자 우선 당해주는 척 밀쳐나 벽에 부딪혔다.
쾅!
큰 소리와 함께 벽이 무너져 내렸다.
“아저씨!”
렐이 놀라 그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그녀의 팔을 붙잡은 사내에 의해 저지되었다.
“뭐야, 당신?”
그 말에 사내가 씩 웃으며 말했다.
“복수하러 왔다. 계집.”
“복수? 복수는 무슨…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모르는 거야?”
사내는 낄낄 웃으며 그녀의 목을 졸랐다.
“우리 동생들 그렇게 만든 거지새끼 어디갔어, 당장 말해.”
“컥…”
“꺅!”
“뭐야?”
단순한 술주정이 아닌, 무언가 심각한 상황임을 깨닫고 도망치려는 손님들을 거구의 사내들이 막아 세웠다.
“나갈 수 없다.”
강한 마력을 발산해내는 사내들 앞에 손님들은 꼼짝없이 잡혀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목을 죄는 사내의 손은 더욱 거세져 갔다.
“끅…”
렐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숨이 막혀온다. 시야가 뿌옇다. 시스템이 없어 마력도 사용하지 못하는 엘프 소녀는 금세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런 그녀를 싱겁다는 듯이 내팽개치는 사내.
“일단 잡아가. 추후 심문을 통해 알아낸다.”
그 말에 사내 하나가 다가와 렐을 챙기려고 했다. 그때.
탁.
누군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응?”
그리고, 그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눈앞이 회전했다. 이내, 등에서 뜨거운 통증이 몰려오더니 정신이 흐려진다.
사내를 기절하게 만든 남자, 석찬이 목을 좌우로 꺾으며 말했다.
“대충 상황을 알 것 같네.”
그의 몸에서 남색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럼, 이제 좀 맞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