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석찬의 방 안, 20평 남짓한 방에 어두운 분위기가 가득 맴돌았다.
“…….”
이브는 말없이 석찬을 바라봤다. 진현과 천무진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그러니까 말이야, 아저씨. 내가 들은 게 진짠가?”
“아니라고 믿고 싶군.”
석찬이 천계 소속이 되었다고 밝힌 후에 보인 반응이었다.
특히 천무진이 가장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탑을 만든 녀석들 밑에 들어간다고?”
천무진. 한때 고금제일인으로 불리었던 무림의 최강자. 하지만 완벽한 무림 정복을 이뤄내지는 못했고, 그 원대한 꿈은 탑이란 곳에 소환되면서 영원히 이룰 수 없게 되었다.
“네 녀석도 탑을 증오하는 것 아니었나. 그런데 그런 결정을 한다고?”
‘아오, 답답해.’
그 모습에 석찬은 하고 싶은 말을 간신히 참으며 에피르의 눈치를 봤다.
그들의 옆에 가만히 서 일행의 반응을 살피는 그녀. 엘리자베스와 대화를 나눌 땐 검은 장막이라도 있어 나름 편하게 대화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또 검은 장막을 사용해볼까 싶기도 했지만, 너무 잦은 장막 사용은 에피르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기각되었다.
따라서 설명해주고 싶어도 제대로 된 설명이 힘든 상태. 결국 석찬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너희한테 나쁜 것도 아니니 너무 나쁘게 생각해주지 않았으면 좋겠어.”
“뭐?”
“그럼 난 이만! 가자, 에피르.”
“가시죠, 그럼.”
도망치듯이 방에서 빠져나오는 석찬. 에피르마저 사라지자, 참고 참았던 기운이 폭발했다.
“뭐야, 진짜 이렇게 간다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이브의 마력 발현에 주변 물건이 공중에 둥둥 뜨기 시작했다.
천무진 주위에서도 이제껏 보기 힘든 검은 마력이 피어올랐다.
분노, 의문, 배신감, 등등 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다양했지만, 무엇 하나 긍정적인 것이 없었다.
그때, 진현의 눈에 유일하게 멀쩡한 여인, 엘리자베스가 들어왔다.
“누님.”
“응?”
“누님은 뭐 알고 있는 거라도 있습니까?”
“뭐가?”
“석찬이에 대해서요.”
그 말에 엘리자베스가 품에서 쪽지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응. 너희한테 이거 전해달라던데?”
“에…?”
“에피르 그년 기운도 없어져서, 지금쯤이 딱 적당하겠네. 한 번 봐봐.”
그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쪽지의 내용에 집중했다.
[친구들에게.]
[이 쪽지를 보고 있을 때라면 나는 아마 에피르를 따라 떠나있을 때겠지.]
[아마 이야기도 제대로 못 하고 떠날 거야. 그 점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왜 미안할 짓을 하는데…”
이브의 나지막한 불평을 들으며, 진현은 계속해서 편지를 읽어나갔다.
[내가 비록 지금은 너희 곁을 떠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원히 못 보는 건 아니야.]
[천계 소속이 되면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는 훈련장.]
[그곳에서 몇 년 정도 수련할 예정이야. 기한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5년 정도 있을 거 같아.]
‘5년이나…’
[이번 싸움으로 알 거 같아. 나 아직도 많이 약하더라고. 그래서 더 강해지고 난 다음에 탑을 오르려고 해.]
‘그럼 우린 그동안 뭐 하고 있으라고.’
[에피르가 그러는데, 우리 모두 70층까지 클리어한 것으로 처리해 주겠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너희 먼저 열심히 탑을 오르고 있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위에서 만나자.]
‘70층?’
띠링.
석찬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때마침 새로운 메시지창이 생성되었다.
[‘거대 키메라’를 처치하셨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달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51층이 클리어되었습니다.]
[52층이 클리어되었습니다.]
.
.
.
[70층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이에 진현이 빠르게 층 이동창을 켜보았다.
[1층]
[2층]
.
.
.
[70층]
“허어…”
50층까지밖에 들어오지 않았던 불이 70층까지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 5년 동안 열심히 훈련할 거니까, 너희도 그동안 부던히 정진해서 강해지길 바라.]
쪽지의 내용은 그게 다였다.
‘석찬아.’
진현이 다 읽은 쪽지를 꽉 쥐며 다짐했다.
“우리끼리 탑을 오른다.”
그 말에 이브가 당황하며 물었다.
“석찬 오빠는요?”
석찬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수년간 계속해서 함께 탑을 오르던 멤버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당황할 만도 했다. 하지만, 이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 녀석은 알아서 올라올 거다.”
천무진도 기운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녀석도 분명 생각이 있을 터. 멋모르고 녀석을 따라간 것은 아닐 거다.”
분노로 놓았던 이성이 돌아오자, 폭넓은 사고가 가능해졌다. 석찬은 절대 실이 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 적어도 적에게는 말이다.
“맞아요.”
이브도 멘탈을 부여잡으며 강하게 다짐했다.
“탑을 오르죠, 우리끼리.”
“그래. 그 녀석 잘 알잖아? 우리가 아무리 먼저 가고 있어도 금방 따라올 놈이라는 거.”
“그쵸.”
세 사람을 보며 엘리자베스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세 사람끼리만 가게?”
“네?”
그녀가 진현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나도 데려가 줄래?”
“누…누님을요?”
진현은 당황했다. 엘리자베스가 계약한 상대는 어디까지나 석찬이지 자신들이 아니다.
그 말인즉슨, 석찬이 없다면 그녀가 진현 일행을 따라올 이유가 없다는 소리. 이 때문에 이미 엘리자베스는 배제한 채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따라오겠다니?
“저희야 땡큐죠, 근데… 괜찮으시겠어요?”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석찬과 만나기 이전의 엘리자베스였다면 여기서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현의 생각대로 자신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석찬뿐이지, 그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인정한 석찬이 없는 파티는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들을 따라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바로 진현에게 있었다.
평소에 자신에게 ‘누님’이란 호칭을 꼬박꼬박 붙이며 따르는 남자애. 그 또한 석찬 못지않게 강했고, 귀여웠다.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브란 아이는 마법적인 재능이 뛰어난 것이 뛰어난 스승이 곁에서 이끌어 준다면 충분히 대성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실제로 저번에 다크니스 길드 지부에 데려갔을 때 키메라 전문가가 그녀를 꽤 마음에 들어 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천무진이란 아이. 솔직히 자신의 제자로 들이고 싶을 정도였다. 그가 지닌 악마화란 기술은 특별했다. 게다가 조금만 더 가꾼다면 지금의 원석에서 완성된 보석이 되어 탑을 휘어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인님이 아니더라도…’
그들과 함께 탑을 오르다 보면 재밌는 일이 꽤나 많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가 매혹적인 웃음을 흘리며 진현에게 말했다.
“그럼, 나도 데려가는 걸로 알고 있을게. 날짜 정해지면 내 방으로 와.”
“예…옙!”
“후후, 그래.”
그렇게 새롭게 짜인 네 명의 파티였다. 추후, 그들은 전례가 없는 속도로 탑을 오르게 된다.
* * *
흰 공간 안.
가부좌를 튼 석찬이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바로 앞에 에피르가 다가온 것까지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열심이시군요.”
“에피르.”
“어찌, 훈련 공간은 마음에 드시는지요?”
“여기 말이지…”
마음에 들고말고.
온 세상이 하얀, 건축물이라고는 들어올 때 사용했던 입구와 식량 창고 이외에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 공간이 바로 에피르가 훈련용이라며 마련해준 공간이었다.
겉모습은 완전히 만화에 나오는 ‘시간과 정신의 방’과 흡사했지만 아쉽게도 만화처럼 1일이 1년으로 변화하는 드라마틱한 효과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공간 자체가 품고 있는 마력이 강대했고, 임의로 상대 몬스터를 소환해 싸울 수 있는 정도가 다였지만, 그 정도만 해도 훈련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마력의 농도 자체가 짙었기에, 그만큼 몸에 가해지는 부담이 늘어나고, 이는 수련에 상당히 큰 도움을 주었다.
‘모래 주머니보다 훨씬 성능 좋은데?’
모래 주머니 따위에 비유한 걸 들켰다간 에피르가 뭐라고 할 것이 분명했지만, 지금 석찬이 할 수 있는 비유는 그게 전부였다.
[이야, 죽이는데 여기?]
라우르 또한 이 공간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완벽하게 훈련에 특화된 공간이야. 봉 잡았는데, 너?]
‘그러게요.’
고개를 주억거린 석찬이 에피르에게 작게 감사를 표했다.
“일단, 고마워. 이런 곳을 제공해줘서.”
“별말씀을. 이 훈련 공간은 천계 소속 인간에게 언제든지 제공되는 곳. 당신이 제 제안을 수락했고, 저는 당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리게 해준것뿐입니다. 전혀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감사히 쓸게.”
그렇게 말하며, 석찬은 다시 마력 운용에 집중했다.
이곳에 있는 동안, 최대한 실력을 키울 생각이었다.
‘최소한… 그래, 악마를 잡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50층 시험 첫 번째 관문인 미궁 보스로 만난 최하급 악마. 벨리아스에 비해 발톱만도 못한 강함을 지닌 녀석에게조차, 자신은 패배했다.
그렇기에 첫 목표는 녀석으로 삼기로 했다.
‘마침 몬스터 소환도 가능하니.’
최고였다. 말이 나온 김에 석찬은 명령어를 읊었다.
“몬스터 소환. 최하급 악마.”
[최하급 악마가 소환됩니다.]
그러자 정말로 미궁에서 보았던 악마와 똑같은 생김새의 몬스터가 소환되었다.
“…….”
만들어진 녀석이라서 그런 것일까? 미궁의 악마와는 달리 녀석은 말이 없었다.
‘뭐, 상관없지.’
석찬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에 악마도 손톱을 가늘게 펴들었다.
“와라.”
훙-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날카로운 손톱이 석찬의 볼을 갈랐다.
픽-
석찬의 볼에서 붉은 피가 튄다. 석찬은 괘념치 않으며 악마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퍽-
“키에엑!”
섬뜩한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는 최하급 악마.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고 여긴 석찬이 연속적으로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악마 또한 별거 아니라는 듯이 벌떡 일어나 석찬을 공격했다.
“…….”
둘 사이의 치열한 공방을 살펴보며, 에피르는 말없이 웃었다.
“그겁니다.”
악마. 일반적인 인간에게 악마란 공포의 대상이며, 그 무력은 말도 할 것 없이 강력하다.
그렇기에 필요했다. 악마를 처치할 사람들이.
천사와 같은 고급 인력이 아닌, 언제든지 버려도 될 값진 인력이 말이다.
‘부디 강해져서 저희 천계를 위해 열심히 싸워주길 바라요. 사냥개님.’
그녀의 입가에 천사라고 믿기 힘들 만큼 기괴한 미소가 그려졌다.
석찬은 그런 그녀를 힐끔거리며 투지를 불태울 뿐이었다.
그렇게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지 5년, 6년을 넘어, 어느새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