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라우르, 전 투신이자 먼 옛날 천계에서 쫓겨난 비운의 신.
1층에서 처음 그를 만난 이후, 그는 석찬을 화신으로 삼고 수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와 함께 탑을 올라왔다.
그리고 현재.
[…….]
석찬은 처음으로 라우르가 진심으로 분노한 표정을 보고 있었다.
[그놈이 뭐라고 했다고…?]
“라우르가 천계를 배신했다고…”
순간 석찬의 머리가 띵 울렸다. 라우르의 영혼에서 강대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감히….]
‘…….’
석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솔직히 석찬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라우르의 두 번째 영혼 조각을 얻으며 엿본 그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배신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에 힘들었다.
‘라우르.’
[왜 그러냐.]
‘이거 하나만 확실하게 말씀해 주세요.’
[응? 뭔데?]
석찬은 잠시 뜸을 들이며 말을 이었다.
‘저는 배신할 수 있었다고 봐요. 분명 다른 신들과 뜻이 맞지 않았다고 했고, 중간 과정은 모르겠지만 그들에 의해 쫓겨난 것도 맞으니까요.’
[…….]
‘제가 여쭤보고 싶은 건 그겁니다. 라우르가 하려고 했던 일이… 신들이 하려던 짓, 탑을 짓는 것보다 더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습니까.’
[……,]
라우르는 말이 없었다. 석찬은 잠시 그를 기다려 주었다.
[흠….]
어느 정도 머릿속이 정리된 것일까, 라우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
‘확실하게 대답해 주세요.’
[일단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은 알아둬라.]
‘예.’
[나는, 단 한 번도 인간에게 해가 되는 짓은 한 적 없다.]
라우르는 계속해서 말했다.
[애초에 내가 인간이었다는 건 알고 있잖아? 신이 됐어도 나는 인간. 나의 동족에게 피해가 가는 짓을 하진 않았어.]
‘진짜죠?’
[그때 내 생각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나는 그랬다.]
그 말에 석찬은 안도했다.
솔직히 조금 두려웠다. 혹시 에피르란 천사가 했던 말이 맞으면 어떡할까? 실은 라우르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악한 신이면 어떡할까?
이런저런 고민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에서 느껴지는 진심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그럼 됐어요.’
[미안하다. 그 천사장이라는 놈이 있었을 때 내가 깨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인데….]
라우르가 계속해서 응답을 거부했던 이유. 그것은 강신 때문이었다. 이번 강신은 지금까지 사용했던 세 번의 강신 중 가장 강했고, 길었다.
심지어 적도 무지막지하게 강했기에 석찬의 육체는 물론 강신했던 라우르의 영혼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고, 회복을 하고자 잠시 잠들었던 거라고 한다.
‘깨어 있었으면 어쩌려고요?’
[강신 한 번 더 써서라도 엎으려고 했지.]
‘오히려 문제가 커졌을 거 같은데요?’
애초에 내가 자신의 화신인 걸 절대 들키지 말라고 당부했던 자가 누군가? 라우르 본인 아닌가? 그런데 천사, 그것도 천사장 앞에서 대놓고 정체를 드러낸다니, 말도 안 되었다.
[그냥 해본 말이지, 그냥… 나도 들어보고 싶었다. 일부이긴 하지만, 내가 잃은 기억의 조각을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
‘그렇군요….’
라우르의 심정이 이해는 됐다. 힘도, 기억도 잃고 조각난 영혼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될까.
‘라우르, 제가 영혼 조각 빠르게 찾아드릴게요.’
[그래. 부탁이다.]
석찬은 말없이 건틀릿을 들어 올렸다. 0층에서 얻은 뒤로부터 쭉 쓰고 있는 백색의 건틀릿. 본래는 검은색의 외형이었지만, 10층에서 한 번 봉인이 풀리며 백색으로 변화한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건틀릿은 이곳저곳에 금이 쩍쩍 가 있는 상태였다.
‘이번에도 그건가…?’
오랜만에 과거 있었던 대련이 생각났다. 이름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10층의 한 베테랑 사냥꾼과 겨룬 대련에서 첫 봉인 해제를 이룬 건틀릿.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도 검은 외갑에 금이 가득 가 있었는데, 지금 건틀릿의 모습이 그때와 비슷했다.
‘근데 왜 갑자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심지어 거대 키메라와의 싸움이 끝난 이후에도 건틀릿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벨리아스와의 싸움이 끝나자 급격하게 금이 갔다.
혹시 라우르의 힘을 버티지 못해 건틀릿 자체가 파괴된 것이 아닐까 싶어 내구도를 보았지만, 격렬한 전투로 인한 약간의 내구도 하락 말고는 별다른 특이점도 없었다.
‘그렇다면 봉인 해제가 맞다는 건데…’
첫 번째 봉인 해제 이후로 수년간 침묵하고 있던 건틀릿의 봉인이 갑자기 풀리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라우르와 벨리아스, 둘 중 하나와는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지만 자세히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봉인이 풀리는 것은 좋은 일이니, 그다지 큰 신경은 쓰지 않기로 했다.
‘시간도 늦었는데, 들어가서 자죠.’
[오냐.]
라우르도 건틀릿 속으로 사라지고, 석찬도 남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 * *
닷새가 흘렀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고, 에피르가 다시금 엘리자베스의 저택에 방문했다.
“왔냐?”
“엘리자베스, 잘 지냈는지요.”
“너 보니까 잘 못 지내겠다.”
“들어가겠습니다.”
“허락 안 했는데? 야, 야!”
엘리자베스를 가볍게 무시한 채 석찬의 방에 당도한 에피르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방 안에 들어서니, 뜨거운 공기가 에피르를 한 번 쭉 훑고 지나갔다.
‘이건….’
마력 운용 중이었는지, 석찬의 전신이 땀으로 가득했고, 전신의 근육이 살아 있는 듯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무엇도 에피르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오로지 석찬의 내면, 마력 회로만이 보였다.
‘마력의 양이 그새 저렇게 늘었다고?’
석찬의 마력은 확실히 닷새전에 봤을 때보다 늘어났다. 회로 또한 막힌 곳 없이 몸 이곳저곳에 퍼져나간 것이 대단히 아름다웠다.
‘괜히 플레티넘 등급, 역대 최강의 루키가 아니라는 건가.’
기대감이 더욱 커졌다. 이런 인재가 천계 소속이 된다면 어떨까? 에피르는 어느새 옆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엘리자베스를 힐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찌, 제가 드린 제안에 관해서는 생각해 보셨는지요.”
“아, 그거.”
천계 아래로 들어오라던 에피르의 제안. 솔직히 이것에 관해 생각하느라 하루를 날리기도 했다.
그저 천계의 이름을 달고 탑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많은 보상을 약속했던 에피르. 하지만 라우르를 쫓아낸 천계에 거부감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다행히 라우르가 돌아왔으니 그와 함께 논의를 거듭했고, 다행히 결론을 냈다.
“나는…”
석찬이 길고 긴 논의의 결과를 말했고, 이에 에피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 * *
엘리자베스의 저택 안, 안 그래도 조용한 저택에 무거운 분위기가 더해지면서 한층 더 어두운 환경을 조성했다.
그 가운데에는 화를 간신히 참고 있는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주인님? 지금 뭐라고…”
“에피르의 제안, 수락한다. 천계 아래에 들어가겠어.”
그렇다. 석찬은 천계 소속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하기가 싫었다.
“잠시 나가주겠어? 둘이서 할 얘기가 있어서.”
그의 물음에 에피르가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나간 후, 석찬은 엘리자베스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엘…리?”
“왜요.”
다행히 대답은 했지만, 상당히 날카로워진 목소리. 석찬은 침을 삼키며 그녀에게 부탁했다.
“잠깐만 그 검은 장막 좀 쳐줄 수 있겠어? 너에게 말할 게 있어서 말이야.”
“…….”
말은 없었지만, 그와 엘리자베스 사이에 작은 검은 장막이 생겨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석찬이 말을 이었다.
“우선, 미안해.”
“뭐가요?”
“말도 없이 천계 밑으로 들어간다고 한 거.”
여전히 말이 없는 그녀에게 석찬은 질문을 던졌다.
“내가 누구의 화신인지는 이미 알고 있지?”
“물론이죠.”
“그분의 아이디어야.”
“예?”
그 말에 엘리자베스가 놀라 물었다.
“그분이 왜요? 그 일을 당하고 천계에 자기 화신을 보낸다고?”
“다 이유가 있어.”
우선, 천계는 탑을 만든 신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이리저리 알아보니 천계 소속으로 탑을 오르는 것은 그 자체가 굉장한 메리트라고 한다.
신기하게도 그 메리트는 아래층이 아닌, 위층으로 갈수록 더욱 커진다고 한다.
‘다 이유가 있지.’
석찬 일행은 이제야 막 50층에 도착했지만, 보통 50층 이상에서 오래 살거나, 그 위로 오른 사람들은 탑의 비밀까지는 몰라도 천계나 신, 그리고 악마의 존재를 안다고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천계는 그야말로 신들의 세상. 신을 이 탑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존재라고 믿는다고 한다.
그렇기에 천계의 소속이 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선망이 된다고 하며, 심지어 천계 소속의 인간들을 귀족 취급하며 올려세우기도 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천계 소속 인간 중에서도 특별한 자들은 신의 선택을 받고 화신이 된다고 한다. 석찬처럼 말이다. 석찬이 특이 케이스인 거지, 사실 신의 화신이 되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 밤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더욱더 천계 소속의 인간을 동경하는 거고.
“하지만, 제가 있잖아요? 그 메리트, 저희 쪽에서 충분히…”
맞다. 천계의 주적이긴 하지만 악마 역시 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인간에게 힘을 나눠주기도 한다. 키메라 제작자는 그중 일부에 불과하다.
게다가 공작급 악마인 엘리자베스가 옆에 있는 이상 빽도 확실하다고 볼 수 있고. 하지만, 석찬이 천계를 선택한 이유는 또 있었다.
‘퀘스트 조건 완화. 층 스킵. 훈련 공간 제공.’
다른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이목을 끈 것은 층 스킵이다.
에피르가 말하길, 거대 키메라의 무력은 70층의 보스 몬스터와 필적하고, 때문에 녀석을 처치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네 명의 석찬 일행 네 명 모두 70층으로 점프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한다.
물론 석찬이 천계로 들어온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퀘스트 조건 완화도 엄청났지만, 훈련 공간 제공도 괜찮았다. 오로지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는, 훈련에 특화된 공간을 만들어 일정 기간 그곳에서 수련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하니, 석찬에게 있어서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천계의 개가 될 생각은 없었다. 라우르를 내쫓은 곳이고, 탑을 만들어 수많은 인간의 삶을 망가트린 녀석들을 따르라니.
‘차라리 혀 깨물고 죽고 말지.’
그렇기에 최대한 녀석들의 요구를 따라주는 척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전부 얻어낼 생각이다.
‘물론 녀석들이 알면 미쳐 날뛰겠지만….’
그것은 내 알 바 아니다.
천계에서 나가기 전까지 조심하면서,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얻으면 그만이다.
‘녀석들이 주는 것들을 이용하며 말이지.’
사냥개가 자신들의 밥그릇을 위협할 들개로 변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벌써부터 기대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