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잠재력 무한-131화 (131/200)

제131화

라우르.

천계 최강의 사나이, 무데뽀, 독불장군 등등 많은 이명이 존재했지만, 첫 번째 이명에서 그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천마대전 당시 그의 무력은 대단했죠.”

이미 라우르의 기억에서 경험해본 적 있지만, 석찬은 대충 놀라는 제스쳐와 함께 그녀의 말에 맞장구쳐줬다.

“어느 정도였길래 최강이라고…”

“천계에 존재하는 모든 신 중 단연 최강이라고 할 수 있었죠. 전투에 특화된 신 대여섯 명이 동시에 달려들어도 홀로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대단한 분이셨나 보군요.”

“대단했죠.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그 일?”

석찬의 물음에 에피르는 허공을 바라보더니, 묵묵하게 말을 이었다.

“그가 천계를 배신할 줄은… 저를 포함해 천계의 아무도 몰랐어요.”

그 말에 석찬은 적잖게 당황했다. 그저 그녀의 말에 맞춰주기 위한 당황이 아닌, 진심으로 당황한 것이었다.

“배신이라뇨?”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이럴 때 라우르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아직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천마대전이 종결되고 얼마 뒤에 있었던 일입니다. 신들은 이 탑을 만들기로 결정했죠. 자세한 이유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인간에게 도움을 주려는 일이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그 말에 석찬은 2차로 당황했다.

‘탑을 만드는 것이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석찬은 탑에 소환될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오랜만에 외출을 했더니, 시스템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탑의 응답에 거절한 자는 즉시 사망했다.

이후로도 같았다. 말을 듣지 않거나 도태된 자는 가차 없이 버려졌다.

약육강식. 약한 자는 먹히고 강한 자는 지배한다. 이런 곳이 인간을 위한 곳이라고?

지금 석찬의 입장에서 그 말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해보지?”

자연스럽게 말이 짧아졌다. 천사의 힘은 강력했지만, 석찬에겐 그런 것 따위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을 위한 일?”

비단 석찬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진현 그리고 천무진도 마찬가지였다. 탑에서 나고 자란 이브를 뺀 나머지 남자들은 모두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어이, 여자. 다시 한번 말해보거라. 인간을 위한 일이라고?”

스릉.

묵빛 검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위로 강기가 덧씌워졌다. 명백한 살의. 하지만 에피르는 상관없다는 듯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화나시겠죠, 하지만 탑을 세우는 것이 저희의 최선이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더 나은 방법은 없었어?”

“있었다면 사용했을 겁니다. 그리고….”

에피르는 엘리자베스를 힐끔대며 말했다.

“불만이라면 저기 있는 저 무례한 여자에게 표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따지고 보면 탑이 생긴 원인에 최대 공헌을 한 자이니.”

“뭐?”

그 말에 모든 이의 눈이 엘리자베스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어찌 된 것인지 그녀는 반박하지 못하고 있었다.

“…….”

아니라고 쌍욕을 하지도, 날뛰지도 않는 것이, 아예 반박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마치 에피르의 말이 맞는다고 시인하는 듯이,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에피르가 눈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뭐, 이 정도면 사전 지식에 관한 설명은 다 해드린 것 같으니,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아직 본론이 아니었어?’

순간, 에피르가 석찬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

갑작스럽게 코앞에 비치는 백안에 석찬이 눈을 찔끔 감았다. 하지만 에피르는 아무 말도 없이 미소를 지었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말이죠….”

석찬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 누구도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 들을 수 없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조차.

“알았죠? 생각해 보도록 하세요.”

말을 마친 에피르는 멍한 눈의 석찬을 뒤로한 채 차를 쭉 들이켰다.

“독이 안 들어서 그런가, 맛있네요. 천계에 가져가고 싶지만, 악마의 물건을 반입할 수 없으니 참도록 하겠어요.”

“너… 뭐라고 한 거냐.”

“뭐라고 하다니요? 아 방금요? 비밀.”

그 말을 끝으로 에피르는 응접실을 나갔다.

“이 씨X년이! 야, 너 거기 안 서?”

결국 참다 참다 못한 엘리자베스가 뭐라고 소리쳤지만, 에피르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진짜 내가 저년 모가지를 진작에 따버리는 건데, 으아악!”

어찌나 화가 났는지 석찬이 옆에 있는지도 모르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욕설을 내뱉는 엘리자베스.

“누… 누님? 석찬이 옆인데 조금 진정…”

“진정? 지인정?”

진현이 그녀를 말리려고 해봤으나,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자, 응접실 안이 금세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

하지만 석찬의 귀에는 소란 따위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에피르에게 들었던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 뿐이었다.

‘윽.’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나 잠깐 바람 좀 쐬다 올게.”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석찬이 무작정 응접실을 나섰다.

“석찬아? 누님은 말리고 가줘… 석찬아? 강석찬?”

진현이 살려달라는 비명을 지르기는 했지만, 석찬은 그를 무시하고 저택 밖으로 나왔다. 그런 그를 에피르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오셨군요?”

“…아직 안 갔어?”

“당신을 조금 기다리고 있었죠. ‘대답’은 듣고 돌아가야 해서요.”

“…….”

“그래서, 답은 정하셨나요?”

석찬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아직 고민 중이신가요?”

석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다면 며칠은 기다려 드리죠. 저, 탑에 처음 들어와 보는 거라 조금 더 탑에 머물고 싶거든요. 너무 빨리 돌아가면 재미없으니까.”

“그럼… 며칠만 더 시간을 줘.”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 말을 끝으로, 에피르가 여섯 쪽의 날개를 펼쳤다. 공중에 높게 뜬 태양 빛에 반사되니, 그녀의 뒤에 후광이 생겨났다.

“연락은 이걸로 해주세요. 그럼 이만….”

에피르는 통신 수정구를 석찬에게 쥐여준 뒤, 그대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파직- 파창!

저택 주변에 깔려 있던 거대한 인식 방해 마법진을 순식간에 파훼해낸 그녀는 금세 어디론가 사라졌다.

“…….”

석찬은 손에 쥔 수정구를 아공간 주머니에 보관해놓은 뒤, 응접실로 돌아갔다.

“후우… 후우…”

난장판이 된 응접실 안에는 망가진 가구들과 겨우 진정에 성공한 엘리자베스가 서 있었다.

“헉, 헉.”

그녀를 진정시키는 데 꽤나 고생을 한 걸까? 세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의자나 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진현아.”

석찬은 바닥 위에 대자로 뻗어 있는 진현의 어깨를 툭툭 건들며 그를 깨웠다.

“어? 왔냐? 배신자.”

“배신자?”

“감히 우릴 버리고 튀어? 나쁜 새끼.”

진현이 오랜만에 진심으로 화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빨리 좀비 모드로 변하기 전에 석찬이 먼저 사과했다.

“미안하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진심에 담긴 사과에, 다행히 진현이 좀비 모드로 들어서는 건 막을 수 있었다.

“쳇. 뭔 얘길 들었길래 그러냐?”

아직 화가 완전히 풀린 것 같지는 않았지만, 대화를 나누기에는 충분했다.

“그게 말이다… 하.”

석찬이 에피르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저희 쪽에 붙으시죠.’

짧았지만, 전혀 무시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이유라 하면.

‘솔직히 말하자면 저희가, 특히 천사장인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이것 때문이 아닙니다.’

에피르는 말했다.

여섯 번째의 몸을 이용한 벨리아스의 등장. 이는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고, 석찬을 감시하던 에피르는 물론 천계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고.

고위급 악마만 사용 가능하다는 검은 장막까지 발동되자, 천계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벨리아스를 처단한다.]

대공급 악마인 벨리아스. 대공이라는 직급은 마왕 다음가는 서열을 지녔다. 약육강식이 기본인 악마의 특성을 고려하면, 벨리아스의 무력이 마계 전체에서 마왕을 제외한 모든 악마 중 가장 뛰어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이렇게 악마가 탑에 침입하는 점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악마를 대비해 탑에 들어온 악마를 감시, 억제하는 시스템이 완벽히 갖춰져 있었고, 덕분에 엘리자베스 같은 최상급 악마가 들어와도 탑은 별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조금 달랐다.

화신에 접신해 탑에 들어왔기 때문에 화신의 육신이 허락하는 한 본신의 무력을 마음껏 발현하는 것이 가능했다.

비록 50층의 인간이기에 힘 자체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지만… 벨리아스라면 층 몇 개쯤은 가볍게 날릴 수 있을 터.

‘그래서 바로 구성원을 꾸렸죠. 원래 한 분의 신께서 직접 강림하려 하셨으나… 대가가 너무 커 제가 대신 온 겁니다.’

솔직히 석찬을 비롯해 장막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을 버리려고 했다. 아까운 인간이긴 했지만, 눈엣가시인 점도 있었고 무엇보다 벨리아스에게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은 살아남았죠. 심지어 벨리아스를 막아내기까지 했어요.’

에피르는 이 점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전 당신이 밉습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당신 덕분에 저희가 손해 본 게 많았거든요.’

개인의 원한으로 업적을 폄하할 이유는 없었다. 에피르는 큰 위험을 방지해준 석찬에게 순수하게 감사를 표했다.

‘이에 따른 보상 내용이 곧 결정될 겁니다. 시스템으로 확인될 거니 걱정하지 마시고… 방금 한 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주세요. 만약 수락한다면 별도의 특전이 있을 것이니.’

“…….”

다시금 고민이 깊어졌다. 솔직히 말해, 석찬은 에피르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

분명 그녀는 자신이 밉다고 했다. 그녀의 말에서 예전부터 꾸준히 시스템을 통해 방해 공작을 펼쳤던 것이 그녀였다는 것을 진즉 깨달을 수 있었다.

천계에서 탑에 간섭하려고 하면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다고 했고, 꽤 큰 피해를 입었다는 걸로 봐선 단순히 미워하는 수준을 넘어 원망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실제로 그 얘기를 할 때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고 말이야.’

원수라는 엘리자베스와 싸울 때나 표정 변화가 있던 그녀가 그런 표정을 한 것은 그만큼 짜증이 난다는 것.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천계로 들어오라고 했다. 심지어 천계 아래로 들어오면 큰 대가를 들여서라도 모든 금제를 풀어 주겠다고 했다.

그중에는 당연히 마력 날개도 포함되어 있고, 심지어 석찬의 탑 등반 속도를 떨어뜨리는 가장 큰 이유인 퀘스트 난이도도 조절해 준다고 했다.

이밖에도 동료들에게도 편의를 봐준다고 하는 등, 그저 천계의 이름을 다는 것에 엄청난 보상을 걸었다.

그 때문에 고민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간 자신을 방해한 건 괘씸했지만, 마음이 흔들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계속해서 고민하다 보니 벌써 밤이 깊어졌고, 하늘에는 둥근 달이 떴다.

‘우선 잘까.’

안정적인 생활 패턴을 위해 잠은 필수였다. 잠시 고민을 내려두고 침실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아, 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화신아.]

석찬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어디 있다가 이제 오셨어요?”

[그게 말이다. 말하자면 길다.]

눈앞에 나타난 작은 유령의 모습에 석찬의 머리를 울리던 두통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우선 들어가서 얘기해요, 라우르.”

[그러자.]

할 이야기가 많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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