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엘리자베스와 에피르. 천사와 악마의 치열한 혈투로 어느새 폐허가 된 여관.
다행하게도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
한 여인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터만 남은 여관 안을 누볐다.
“이게… 대체… 어떻게…”
클레어 파르트.
석찬 일행이 여관에 머무는 동안 상당히 많은 편의를 봐주던, 나름 친해진 여관의 수석 직원이었다.
대충 이야기를 듣기로는 몇 년째 여관을 비우고 탑을 오르는 중인 여관 주인 부부를 대신해 여관을 운영하고 있어, 사실상 그녀가 여관의 주인이나 다름없다고 들었다.
“클레어….”
“올킬러 님…? 무슨 일인지 설명을….”
석찬과 주변 여인들을 둘러보는 그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말 한 번만 잘못 꺼내면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죠.”
석찬은 깨어난 직후 일어났던 일에 대해 숨길 건 숨기면서도 최대한 자세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고.
“흠….”
그의 설명을 들은 클레어가 묘한 눈빛으로 상처투성이의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얘가 잘못한 거야.”
어느새 날개를 숨긴 채 정중히 사과하는 에피르와 그녀를 검지로 쿡쿡 찌르며 잘못을 회피하는 엘리자베스.
지금의 행동거지는 정말 천사와 악마답다고 할 수 있었다.
“미안해요, 클레어.”
석찬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진현에게 들었다. 엘리자베스가 석찬을 옮겨준 후 진현의 부탁에 그녀는 군말 없이 여관을 비워 주었다고.
‘만약 그녀가 따라주지 않았다면.’
꽤, 아니 굉장히 많은 사상자를 낳을 수도 있었기에, 사과하는 것이 당연했다.
“미안해야죠, 당연히.”
뾰로통한 표정의 그녀가 석찬을 향해 말했다.
“손해 배상 청구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예. 얼마든지 내겠습니다.”
“한 번만 더 그래봐. 아주 출입 금지령을 때려버릴 거니까.”
“주의하겠습니다.”
“며칠 동안은 다른 데 묵고 있어요. 수리 끝나면 영수증 보내야 하니까 주소는 남겨주고.”
“옙.”
이러한 이유로, 석찬 일행은 곧장 다른 여관으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어찌 된 것인지 가는 여관마다 하는 소리가.
“미안하네. 지금 자리가 꽉 차서 말이야.”
“죄송해요. 하필 지금 만실이라….”
거짓말하지 않고 50층에 존재하는 모든 여관에 들렀다. 그런데 모든 곳이 자리가 없다며 축객령을 내렸다.
‘뭐지?’
분명 몇몇 곳은 만실이라고 하기엔 식당도 한산했는데 말이다. 의문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저 사람이지?”
“응. 여관 하나 날려 먹었다고 들었는데?”
사람들의 수군거림에서 석찬은 왜 여관 사람들이 자신들을 받아주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불안한 건가.’
확실히 가능한 일이었다.
저 소문 말고도 얼마 전에 있었던 거대 키메라와 벨리아스 사건도 한몫했을 거다.
거대 키메라. 50층에 나타난 전대미문의 대형 몬스터. 그 외에도 많은 키메라가 나타나긴 했었지만, 모든 것이 거대 키메라 하나에 묻혀버렸다.
50층의 최강자 중 한 명인 로이먼 크롤로프를 능가하는 괴력과 무지막지한 재생력, 그리고 맷집. 석찬이 마을 밖으로 유인해 피해가 최소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녀석은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그리고 갑자기 거대 키메라와의 전장에 생겨난 검은 장막.
거대 키메라의 난동으로 혹시 몰라 근처에서 상황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던 사냥꾼들은 바라보기만 해도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끔찍한 검은 장막의 등장에 곧장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고 한다.
“의식을 잃지 않은 놈이 있긴 했는데, 걔 증언 때문에 사람들이 더 너를 무서워하는 거 같더라.”
“왜?”
“왜겠냐.”
기괴한 형태로 변해 스산한 음성을 풍기는 여섯 번째. 이후 나타난 검은 장막. 그것이 사라지자 나타난 의문의 여성과 주변에 널려 있는 시체들.
‘확실히 무서워할 만하겠어.’
“하아….”
결국 갈 곳을 잃은 석찬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1층으로 가야 하나.”
알렉산더에게 갈 생각도 해보긴 했지만.
“미안하다. 얼마 전에 신입 기수들이 들어와서 말이야. 복잡해서 여기서 자는 건 어려울 것 같다.”
돌아오는 대답에 다시 한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10층? 20층? 어디로 가야 하지.’
물론 마을은 많았다. 하지만 큰 전투가 끝난 만큼 석찬은 요 며칠은 최대한 마음 편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컸고, 소란스러운 일이 생길 수 있는 공간은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그럼 저희 집으로 오실래요?”
그때 엘리자베스가 20층에 있는 다크니스 길드 지부의 저택에 가자는 제안을 했고.
“좋지.”
그 저택에 좋은 기억이 있는 석찬은 그대로 그곳으로 향하는 것을 수락하고 일행들에게 동의를 구한 뒤 20층으로 향했다.
* * *
20층.
오랜만에 독에 찌든 녹색 숲에 돌아온 석찬이 공기 중에 퍼져 있는 미약한 독을 느끼며 마을 안에 입성했다.
“올킬러. 여긴 무슨 볼일이지?”
그런데 경비병의 말투가 심상치 않았다.
“제가 마을에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몇 년 전에 내 전 재산 잃은 것만 생각해도….”
“아.”
그 말에 석찬은 주변에서 풍겨오는 묘한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거지 차림의 사내 몇이 석찬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 예전의 포이그 레바돈과의 결투에서 돈을 잃은 자들인 듯싶었다.
“올킬러…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죽여주겠어.”
이를 갈며 석찬에게 달려들려 하는 사내들. 이에 석찬은 전혀 여유를 잃지 않은 채 말했다.
“나는 약자를 괴롭히는 취미 따위 없다. 그냥 가라.”
하지만 그 말이 오히려 그들의 도화선에 불을 붙여주었고.
“뭐?”
“이 쌍놈의 새끼가…”
이성을 잃은 사내들이 석찬에게 달려들었다.
‘…살살해줄까.’
석찬은 자세도 잡지 않은 채 한 남자가 날린 주먹을 가볍게 피해냈다.
‘확실히 몸이 무거워.’
스탯 페널티가 적용된 몸은 납덩이를 찬 듯 묵직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잔챙이 몇을 처리하지 못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퍼버벅-
순식간에 방해꾼들을 전부 처리한 석찬이 멍해져 있는 경비병에게 슬며시 말했다.
“정당방위예요. 봤죠? 쟤네들이 먼저 때리려고 한 거.”
그 말을 끝으로 석찬은 사라졌다.
“…….”
에피르는 한심한 눈빛으로 그들을 한 번 훑은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석찬의 뒤를 따랐다.
* * *
“오랜만이네, 여기도.”
“그러게요. 천무진 씨는 처음이죠?”
“그렇다.”
“누님, 뭡니까? 이 엄청난 곳은?”
누군가는 처음, 누군가는 오랜만에 방문하는 엘리자베스의 대저택. 하지만, 문 앞에서부터 출입하는 과정이 심상치 않았다.
“너는 왜 따라 들어오는 거지?”
“왜,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문 앞에서부터 싸움이 붙은 두 여인, 엘리자베스와 에피르.
“우리 집은 너 같은 찌질한 천사 놈이 올 곳이 아니라서~.”
“그러는 저도 들어가기 싫습니다만… 전해줘야 할 이야기가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가는 겁니다.”
“지금 하면 되잖아? 전해줄 말.”
“아니요. 들어가서 해야 하는 말입니다.”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다시 한번 공기가 진동하는 것이, 잘못했다간 또 싸움이 발발할 것 같다.
“자자, 두 사람 다 그만.”
겨우겨우 두 여인을 말린 석찬이 떠밀듯 두 사람을 집안으로 들여보냈다.
“내가 주인님 때문에 참는다.”
“마찬가지니 조용히 해주시죠.”
“…머리 아프니까 조용히 좀… 제발… 그리고 주인님이라고 하지 말… 후, 됐다.”
응접실 안에서도 한동안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서로 고개를 돌리며 잠시 휴전을 알렸다.
“차 대령했습니다.”
메이드가 가져온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안정을 되찾는 석찬. 그런 그를 유심히 살피는 한 여인이 있었다.
“…….”
투명한 백안과 눈이 마주치자, 석찬이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에피르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인지?”
“슬슬 이야기할 때인가 싶어서요.”
그 말에 석찬은 그녀가 엘리자베스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전해줘야 할 말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 전해줘야 할 이야기가 뭐죠?”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 말에 한 사람, 아니, 한 악마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귀가 자동으로 에피르에게 향했다.
“제 친구들도 들어도 되는 이야기죠?”
“…저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위쪽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뭡니까. 그 중요한 이야기.”
“급하시군요. 안 그래도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에피르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과거, 탑이 생겨나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탑이 생겨나기 전. 그 말에 사람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 이야기를 천사에게 듣는다고?’
영혼 조각을 모으고 기억을 되찾은 라우르에게 들으려고 했건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만.
“이거 저희가 들을 수 있는 이야기예요?”
“네? 당연한 거 아닌가요? 아니었으면 말도 꺼내지 않았겠죠.”
“아니, 그게 아니라 필터링 말입니다.”
중요한 말을 할 때마다 애간장을 타게 만든 필터링. 이번에도 그것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 석찬이었지만.
“괜찮습니다. 조금 크긴 했지만, 이 이야기를 들려드리기 위해 저희 쪽에서 꽤 큰 대가를 지불했으니까요.”
그 말에 석찬이 안심하며, 한 남자를 불렀다.
‘라우르? 중요한 얘기인 거 같은데 이 양반은 도대체 어디에….’
벨리아스와의 전투 이후에 전혀 응답이 없는 그. 하지만 그를 기다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석찬은 에피르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탑은 물론, 우주조차 생겨나기 전,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우주가 생기기도 전에? 누구죠?”
“창조신. 그분의 이름은 아주 많은 형태로 존재하죠. 석찬 님께서 계신 지구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나님.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석찬도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창조신… 그럼 그 창조신이 성경에서처럼 세상을 만든 겁니까?”
“예. 그분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마지막 날에 당신들 인간을 만드셨죠.”
한동안 세상은 평화롭게 흘러갔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사고는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최초의 인류가 범한 범죄. 그 이후로 세상은 혼란스러워졌죠. 당신들도 알겠죠. 아담과 이브. 최초의 인간들이 벌인 만행을.”
알다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아담과 이브, 선악과에 대해서는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날 이후, 세상에는 악이 창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태초의 악마를 비롯해 수많은 악마가 나타났다. 그 이후의 스토리를 가볍게 요약하자면, 악마들은 사사건건 인간을 홀리며 수많은 악을 만들어냈고, 자신들의 권세를 불려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3,000년 전, 악마들과 천사들의 전쟁. 통칭 천마대전이 일어났죠.”
천사와 악마, 인간은 상상도 못 할 힘을 지닌 초월적 존재들이 일으킨 전쟁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인간 문명마저 황폐하게 만들었다.
“이분과의 만남도 그 전쟁에서가 처음이었죠.”
“맨날 저한테 발리는 년이 하는 얘기니까 별로 귀담아듣지는 마세요.”
“조용히 하세요.”
어쨌든 이야기로 되돌아와서, 천마대전이 한창인 날이었다.
“인간의 몸을 지녔지만, 오직 무력 하나로 신의 자리에 오른 자가 나타났습니다.”
‘어?’
“그분의 이름은 라우르.”
갑자기 익숙한 사람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라우르.
“아마 여러분은 잘 모르실 겁니다.”
아니, 잘 안다.
그 양반 내 주신이니까. 모를 리가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