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눈을 뜨자, 석찬의 앞에는 한 아이가 보였다.
칠흑같이 검은 흑발이 인상적인 아이였다.
‘누구지?’
어찌 된 것인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한동안 몸을 발악해 보았지만, 이내 아무것도 못 하는 석찬은 그저 말없이 눈앞의 남자아이를 지켜봤다.
혼자서 천 쪼가리를 휘저으며 놀고 있는 아이. 그때 또래로 보이는 몇몇 아이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너, 여기 오지 말라고 했지.”
“엄마가 너는 위험하댔어.”
‘…….’
아이는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녀석들이 키득거리면서 그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말도 못 하냐?”
“키키.”
조롱받는 아이는 잠시 표정이 날카로워지나 싶더니 입술을 꽉 깨물며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맞다.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쟤 아빠 없대.”
빠직.
그 말에 자리를 벗어나려던 아이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그의 눈이 옅게 빛나기 시작했지만, 이내 입술을 찢어져라 꽉 깨물며 감정을 컨트롤하는 아이. 그를 보며 조롱의 수위가 더욱 커졌다.
“아빠 없대요, 아빠 없대…”
퍽!
그때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앞장서서 아이를 놀리고 있던 녀석이 날아갔다.
“뭐야?”
옆에서 함께 놀리던 아이는 기절한 친구와 그를 때린 의문의 아이를 몇 번 마주 보더니, 꽁지가 빠질 듯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누구지?’
갑작스럽게 나타나 흑발의 아이를 구해준 의문의 아이.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괜찮냐?”
흑발의 아이에게 손을 내미는 의문의 아이.
“■■■■”
하지만, 다음 대화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의문투성이인 상황에서 의식은 점점 멀어져갔다.
* * *
감겨 있던 석찬의 눈이 서서히 떠지기 시작했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언제나처럼 여관방 천장.
하지만 가장 먼저 보인 사람은, 언제나처럼 이브가 아닌 처음 보는 여인이었다.
“일어나셨나요.”
무미건조한 말투로 석찬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 그녀의 외모는 실로 아름다웠다. 언뜻 보면 이브와 비슷했지만, 그녀의 백발은 투명할 정도로 깨끗했고, 고고한 눈빛은 위엄이 가득 느껴졌다.
“그런데… 대체 뉘신지….”
“제 이름은 에피르. 천사라고 말하면 알아들으시려나요?”
“천…사?”
그 순간.
펄럭.
여인의 등에서 펼쳐진 여섯 장의 날개. 악마의 박쥐 날개와는 다르게, 깃털이 한가득 달린 날개이다 보니, 날개를 펼치자 깃털 몇 개가 허공에 흩어졌고, 그중 하나의 깃털이 석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파앗.
그러자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
‘힘이… 넘쳐.’
머리에 닿은 깃털은 석찬의 몸에 스며들어 사라지고 조금씩 따끔거리던 이곳저곳이 언제 아팠냐는 듯 최상의 컨디션으로 돌아왔다.
“이건….”
“천사는 당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위대하답니다.”
그 말에 석찬이 침을 삼켰다.
“그나저나… 천사가 왜 여기에…”
“이유를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라우르, 어떻게… 라우르?’
라우르를 불러보았지만, 어찌 된 것인지 그는 응답이 없었다.
“…….”
“왜 말이 없으시죠? 꼭 직접적으로 물어봐야 하겠습니까?”
“그 전에, 제 질문에 먼저 답해주시죠. 천사가 왜 여기에 있습니까.”
석찬이 알기론 천사는 천계라는 신과 천사의 세계에 거주하고, 신들이 만든 탑에는 들어올 수 없다. 그런데 눈앞의 천사는 멀쩡히 탑에 들어왔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천사인 그녀가 어떻게 탑에 들어왔는지를. 하지만, 에피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하하….”
화가 난 걸까? 날갯짓이 더욱 요란해지고 쭉 무미건조했던 표정에서 처음으로 짜증이 느껴졌다.
“질문이라… 당신에게 그걸 허락한 적은 없는데 말이죠.”
“예?”
그 순간.
후웅-
거대한 기운이 석찬의 몸을 짓눌렀다.
‘큭.’
최상의 컨디션인 몸임에도, 기운을 방어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에피르는 일반적인 천사가 아니라, 천계에 거주하는 수많은 천사 중 백명도 안되는 천사장 중 하나였다. 힘의 격이 달랐다.
“뭡니까, 갑자기.”
“흠… 역시 알고 있던 대로군요. 이 정도까지 버틸 수 있다니.”
팡.
에피르가 기운을 거두자, 석찬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뭘.”
“오늘 당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말이에요.”
‘무슨 말이야, 이 천사. 갑자기 찾아와서.’
석찬에게 있어서 의문투성이였다.
에피르 때문에 꿈에 대한 의문도 잊은 상태. 그런 상황에서, 석찬의 방문이 열렸다.
쾅!
다소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졌다. 부서진 문 뒤에는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분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에피르도 마냥 반갑게 그녀를 보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 이게 무슨 행패죠.”
그녀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너야말로 무슨 짓이냐. 아무 짓도 안 하겠다며, 개년아.”
“아까도 느낀 거지만, 입이 더 거칠게 변하셨군요. 100년 동안 안 빤 걸레라도 무셨습니까?”
“주둥아리 닥치지 그래?”
엘리자베스의 몸에서 강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고, 그에 대적하듯 에피르에게서도 투명한 신력이 흘러나왔다.
고오오-
기운 간의 충돌만으로도 주변에 큰 돌풍이 불었고, 석찬은 황급히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때 여관을 벗어나는 석찬의 눈에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뭐야, 깨어 있었어?”
“뭐예요? 방에서 나는 기운…”
“다 피하라고 해! 지금 당장!”
진현과 이브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실시간으로 강해지는 기운에 서둘러 몸을 옮겼다.
“내가 정신을 잃었던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석찬의 물음에 주변에 튀는 검은 번개를 피하며 진현이 입을 열었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잠깐…”
“왜?”
표정이 싸해진 진현이 갑자기 고민했다.
“말해줘도 되나?”
“응? 왜?”
알려주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잠시 고민하던 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에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사자인 넌데 누님도 이해해 주시겠지, 뭐!”
“이해?”
의문 속, 그가 천천히 벨리아스와의 전투 이후를 회상했다.
* * *
마신의 눈동자가 벨리아스를 데리고 떠난 이후. 그러니까 강신 상태가 풀린 석찬이 기절한 직후였다.
파창-
벨리아스가 쳐놓았던 검은 장막이 깨지며 한 무리의 여인들이 내려왔다. 그들은 모두 새처럼 새하얀 날개를 펼치고 검을 무장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벨리아스의 공격 이후 간신히 정신이 든 진현은 그녀들을 살펴봤다. 그녀들을 하나하나 석찬에게 모여들더니, 무언가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
“…….”
거리가 꽤 있어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표정을 보아 심각한 상황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슥.
그때, 한 여인이 석찬의 목에 칼을 겨눴다.
가장 선두에서 석찬에게 다가왔던 여섯 쪽의 날개를 지닌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누군가에게 곧바로 저지당했다.
‘이 미친년이!’
진현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친 엘리자베스가 에피르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주위에 있던 여인들이 그녀를 막아 세우려고 했지만.
‘잔챙이들은 빠져라.’
촤자작-
엘리자베스의 손짓 한 방에 날개가 두 쪽 달려 있던 여인들은 저항조차 못 해보고 쓰러졌고, 네 쪽의 날개를 달고 있던 자들도 세 합을 채 못 버티고 끔찍하게 죽었다. 이내 보다 못한 여섯 쪽의 날개를 단 여인, 에피르는 엘리자베스에게 검을 휘둘렀다.
캉.
하지만, 공격은 곧바로 막히고 이후로 두 여인은 치열한 신경전에 돌입했다. 직후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주변이 번쩍번쩍하더니 쓰러진 에피르의 멱살을 쥐고 있는 엘리자베스가 보였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번에도 전혀 들리지 않는 대화가 끝나고,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응?’
진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두 여인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빠르게 기절한 척 연기를 해봤지만, 엘리자베스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깨어 있지? 진현아.”
“누…누님.”
“이 인간은 누구지?”
“아끼는 동생. 주인님 친구야.”
“동생이라고 하기엔 나이 차이가.”
“입 닥쳐라, 썅.”
“입이 몇 배는 더 거칠어졌군. 너의 새로운 주인은 그걸 아는가?”
“닥치라고 했다.”
잠시 에피르와 티격태덕하던 엘리자베스가 뻘쭘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진현에게 물었다.
“진현아.”
“옙.”
“오늘 본 거,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특히 주인님께는 더더욱.”
“여부가 있겠습니까, 누님.”
“착한 아이네.”
* * *
“아.”
그제서야 석찬은 왜 진현이 고민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석찬도 알고 싶지 않았지만, 가끔씩 나오는 그녀의 본성이나 말투에서 그녀가 자신을 과분할 정도로 잘 대해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치부를 석찬에게 드러내길 싫어했다.
이번에도 비슷한 맥락인 듯싶었다.
“괜찮아, 진현아. 친구 둬서 뭐 하냐.”
“오, 석찬아. 고맙다, 진짜.”
이를 묵인해주는 것으로 알아들은 진현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훗.”
그때, 석찬이 씩 웃으며 말했다.
“엘리가 들으면 화내겠지? 그러면 오랜만에 비굴한 진현이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건가?”
그 말에 진현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진다.
“야, 야. 아니야.”
“기대가 되는군.”
“야 이 개…”
쾅!
그때 석찬과 진현 옆으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 벽에 꽂혔다.
“응?”
그곳을 보니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에피르가 보였다.
“여전히 강하군요. 퉷.”
“넌 아직도 약하네.”
어디선가 나타난 엘리자베스가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알았지? 한 번만 더 그런 개짓거리 하면… 죽는 거야.”
“그럼 ‘전쟁’일 텐데요?”
협박인 양 말을 꺼내는 에피르. 그런 그녀에게 엘리자베스는 주먹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쾅!
안면에 제대로 꽂힌 일격에 정신을 잃는 에피르.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주먹을 털며 일어서는 그녀에게 석찬 일행은 쉬이 다가갈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얼음장처럼 굳어 있는 세 사람을 보더니 잠시 놀라는 듯싶더니 헛기침과 함께 말했다.
“크흠… 어머, 다들 여기서 뭐 하고 계셨어요?”
“응?”
방금 전의 살벌한 모습과는 상이 되는 말투와 표정에 세 사람은 벙쪄서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 엘리?”
“네?”
“…….”
방금의 모습이 거짓이었다는 듯 아무것도 모르는 눈빛으로 묻는 그녀에게 석찬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살짝 정신을 차린 에피르가 작게 말했다.
“요망한… 여자….”
퍽.
밝게 웃으며 그녀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는 엘리자베스. 그녀를 보며 세 사람은 다짐했다.
‘오늘 모습은 기억에서 지우자.’
엘리자베스의 또 다른 모습이자 본성에 관한 기억들은 죄다 관속까지 가져갈 것이라고 말이다.
‘휴…’
그리고 진현은 안도했다. 석찬이 자신이 했던 말을 발설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말이다.
‘고맙다, 친구야.’
‘빚은 갚아라.’
그를 향한 짧은 눈인사에는 진심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