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석찬이 눈을 떴다.
‘뭐지?’
죽이지는 않았지만, 몇 시간 정도는 정신을 못 차리게 조절해 힘을 날렸건만, 벌써 눈을 뜨다니?
대공급 악마의 머릿속에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수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예상 밖 일이 한두 번 일어난 것도 아니고, 이런 걸로 호들갑을 떠는 것은 대공급 악마라고 불리기에 옳지 않았다.
녀석의 눈이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큰 신경은 쓰지 않았다.
“죽어라.”
그저 잠시 그쳤던 힘을 다시 줘 석찬을 죽이려고 했을 뿐. 하지만 석찬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가 뿌린 힘을 떨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자신의 힘을 뿌리치다니, 예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녀석에게 이런 힘은 느끼지 못했는데?’
아무리 석찬이 재능이 뛰어나도 아직은 애송이.
파아아.
그 순간, 석찬의 머리카락이 새하얀 백발로 변했다.
“너, 누구냐.”
대공급 악마의 물음에, 석찬은 씩 웃으며 말했다.
“누구긴 누구야. 너랑 같은 놈이지.”
딱.
석찬의 가벼운 손짓에, 대공급 악마의 몸이 고꾸라진다.
“크악!”
그의 입에서 검은 피가 새어나왔다.
“뭐냐, 그 힘은… 커억!”
“호오? 안 죽어?”
그때, 석찬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이 변화했다. 인간들이 쓰는 평범한 마력 따위가 아닌, 신만이 사용할 수 있는 힘.
‘신력!’
그제서야 석찬의 몸에 깃든 존재의 힘을 확인한 대공급 악마가 작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에이씨, 거참 말 길게 하네.”
하지만 석찬, 아니 라우르는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대공급 따위가.”
그의 녹안이 짙게 빛났다.
‘저 눈… 분명 어디선가…’
“벨리아스.”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대공급 악마가 작게 몸을 떨었다.
“당신, 대체 누구야!”
파앙-
라우르의 힘을 떨쳐낸 벨리아스라고 불린 대공급 악마가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그의 얼굴에 오만이나 여유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저, 말없이 자세를 잡았다.
“호오? 덤비려고?”
“…….”
여섯 번째의 동공이 검게 물든다. 검은 동공 사이에 붉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오? 현신이냐? 그 녀석 죽을 텐데.”
“상관없다.”
촤아악-
거대한 뿔이 솟아나고, 네 장의 검은 날개가 펼쳐진다.
여섯 번째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벨리아스는 마력으로 몸을 제어하며 라우르에게 달려들었다.
촤악-
벨리아스의 손톱이 허공을 갈랐다.
촤좌좍!
곧이어 연속적으로 날카로운 일격들이 석찬에게 쏟아진다.
“흐음… 시간차 공격?”
하지만 라우르는 가볍게 공격을 피해내며 벨리아스의 오른편으로 이동했다.
“어디, 3,000년 동안 얼마나 발전했나 한번 볼까?”
라우르의 주먹이 벨리아스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쾅!
“큭…!”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한줄기 피를 간신히 닦아내며, 벨리아스가 균형을 다잡았다.
쾅! 쾅!
하지만 라우르의 주먹이 계속해서 벨리아스의 몸 여기저기를 난타했다. 그 위치가 교묘해 방어하기도 참 애매했다. 그리고 어찌 된 것이 가해지는 충격보다 몸에 들어오는 충격이 더 컸다.
‘이건 마치…’
벨리아스의 머릿속에 한 남자가 떠올랐다.
수천 년 전, 자신들을 맞서 싸우던 녹발의 남자. 자신의 주신조차 혼자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었던 최강의 남자를.
콰아앙!
이어지는 일격에서 생성된 거대한 폭풍이 벨리아스의 몸을 갈가리 찢었다.
“크아아악!”
머리, 몸, 팔, 다리 등등 모든 신체 부위가 잘려 나가 조각조각 흩어진다. 하지만 괜히 대공급 악마의 칭호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듯, 벨리아스는 곧장 몸을 회복해 라우르 앞에 섰다.
“…….”
그 모습에 더 이상 여섯 번째의 모습은 비치지 않았다.
창백한 잿빛 피부. 라우르와 마찬가지인 새하얀 백발. 손가락과 발가락 끝에 자라난 날카로운 검은 손발톱. 그리고 뒤쪽에서 살랑거리는 날카로운 꼬리까지. 영락없는 악마의 모습이었다.
“오,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낸 것이냐.”
“예… 그리고 한 가지만 묻죠.”
벨리아스는 한층 더 정중한 투로 물었다.
“당신… 제가 아는 그분이 맞습니까.”
“맞을걸? 네 눈이 썩은 게 아니라면.”
약 오르듯이 웃는 모습을 보며, 벨리아스는 확신했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 계시는 겁니까. 당신은 분명 그때….”
“닥치고.”
어느새 다가온 라우르의 주먹이 벨리아스의 턱에 꽂혔다.
“캬악!”
어퍼컷을 허용한 벨리아스의 몸이 붕 떴다.
두두두두-
고작 2초 정도의 틈이었지만, 라우르는 수십 대의 유효타를 적중시키며 벨리아스를 밀쳐냈다.
“쿠엑!”
검은 피를 한 움큼 토해낸 벨리아스. 그런데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약해지셨군요. 화신의 몸을 빌렸다고 해도… 예전에 비해 한없이 약하십니다!”
날개를 넓게 펼친 벨리아스. 그의 몸 주위에 검은 구체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콰아앙!
곧이어 나타난 검은 줄기가 라우르를 공격했다.
“그때보다, 발전했군.”
힘겨운 듯,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막는 라우르. 그를 보며 벨리아스가 웃으며 말했다.
“3,000년입니다. 그동안 저희가 놀고만 있을 줄 아셨습니까!”
촤좌작!
갑자기 줄기 여기저기에서 검은 가시가 솟아나 라우르를 찔렀다.
푹, 푹-
라우르의 몸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그의 표정에도 여유는 없었다.
“보아하니 내가 널 과소평가한 것 같군.”
“이제야 깨달으셨습니까? 3,000년 전 당신도 아닌, 약해진 당신이 지금의 저를 당해낼 수는 없습니다!”
기괴한 미소를 짓던 벨리아스의 표정이 한순간 사라졌다.
“그러니 이만 죽으시죠.”
검은 구들에서 다시금 빛줄기들이 발사되었다.
“…….”
라우르는 말없이 공격을 방어했다. 그가 방어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고 판단한 벨리아스가 웃으며 검은 창을 만들어냈다.
고오오-
창에서 알 수 없는 끔찍한 힘이 느껴졌다. 이를 본 엘리자베스는 느낄 수 있었다. 저 창 하나만으로 50층 전체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조금은 위험하려나…’
하지만 공작급인 자신보다 직위도 높고, 무력은 말도 할 것 없이 강하다. 결국은 투신인 라우르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편하게 해드리죠. 대적자여.”
벨리아스의 손에서 창이 떠나갔다.
휘오오-
그저 허공을 가르는 것만으로 강력한 폭풍이 생성된다. 땅이 갈라진다. 창의 목적지는 라우르가 빌린 석찬의 몸. 그것도 왼쪽 가슴. 정확히 심장이 위치한 곳이었다.
‘끝났다.’
벨리아스는 확신했다. 방어에만 정신이 팔렸던 라우르는 절대 이 창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니,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날린 창은 주신에게 받은 권능을 포함해 자신의 마력 대부분이 담긴 창. 신마저 죽일 수 있는 창이었으니 말이다.
번쩍.
하지만 방어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믿었던 라우르의 눈빛이 변화했다. 마치 창이 날아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미련한 놈아!”
날아오는 창을 피한 라우르가 대뜸 창을 덥석 잡아들었다.
치이익-
창을 든 손이 불에 탄 듯이 쓰라렸다. 하지만 라우르에게 이 정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거 좋네. 알아서 잘 막아봐라.”
벨리아스를 똑바로 쳐다본 채, 그대로 창을 던지는 라우르.
쐐에엑-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는 창. 벨리아스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속도였다.
‘설마 제대로 힘을 내고 있지 않던…’
푸욱-
그때 검은 창이 벨리아스의 배에 꽂혔다.
“키악!”
검은 창에서 흘러나온 검은 마력이 벨리아스의 몸 곳곳에 뻗쳐나간다. 실시간으로 망가지는 몸에 벨리아스가 쓰러졌다.
“해치웠나.”
예상보다 훨씬 싱겁게 끝나버린 싸움. 이를 지켜보던 엘리자베스는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만약 싸움이 장기화하거나 둘 중 하나가 악을 쓰고 원래 힘을 내보였다면, 벨리아스가 친 장막 안은 물론, 장막 밖도 무사할 것이라고 장담하지 못한다.
“주인…”
석찬에게 다가가려던 순간이었다.
쿵-
갑자기 장막 안의 기운이 크게 진동했다.
“커어억…!”
벨리아스는 물론.
“으어어…”
“으아아…”
정신을 잃은 석찬의 일행도 몸을 떨었다.
곧이어 벨리아스의 뒷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저건….’
그것을 본 라우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고오오-
검게 변한 공간 사이로 하나의 눈이 나타났다. 눈은 거대했다. 얼핏 봐도 사람 크기만 한 눈이 말없이 깜빡거렸다.
하지만 눈의 정체를 아는 라우르와 엘리자베스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말없이 벨리아스를 바라보고 있는 눈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내 부하 놈이 신세를 진 모양이야.]
그때 머릿속으로 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분명 평범한 목소리인데, 어째선지 듣기만 했는데 소름이 돋았다.
“커억!”
“으윽…”
석찬 일행이 몸부림치자, 엘리자베스가 빠르게 그들을 향해 보호막을 쳐주며 말했다.
“주신이시여… 어째서 이곳에…”
[네 녀석이 감히 낄 자리가 아니다.]
‘흡.’
순간, 엘리자베스의 말문이 턱 막혔다. 숨이 죄어오기 시작한다. 그저 말 한마디만으로 공작급 악마를 침묵하게 만드는 힘.
[오랜만이군. 그간 잘 지냈나. 라우르.]
“어, 너도 잘 지냈냐? 내가 예전에 때린 곳은 안 아프고?”
[여유로운 척은 그만하지? 팔 떨리는 거 다 보이니.]
“……”.
그 말에 라우르는 침묵했다. 실제로 그의 오른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석찬의 몸을 너무 과도하게 쓴 탓도 있겠지만, 그것 말고도 지금 눈앞의 눈이 발산하는 힘이 그만큼 강한 탓이 컸다.
“갑자기 왜 나타난 거냐.”
[그냥?]
“아무리 뭐가 쳐져 있다고 해도, 이렇게 대놓고 나타나면….”
쿵-
그때 검은 장막에 거대한 충격이 가해졌다.
밖에서 느껴지는 어렴풋한 신력을 느끼며, 라우르가 말했다.
“이렇게 방해꾼이 나타난다고.”
[회포는 다음에 다시 푸는 걸로 하지. 오늘은 이야기할 분위기가 아니군.]
눈이 말하자, 쓰러진 벨리아스의 몸이 천천히 공중으로 떴다.
[이 녀석은 내가 데려가지. 이래봬도 쓸만한 놈이라.]
“그런 것 같더라. 잘 키워봐. 이 놈 먹여주게.”
라우르가 제 몸을 툭툭 치며 말했고, 눈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한번 잘 키워보라고. 그럼 나는 이만… 너도 슬슬 들어가는 것이 좋을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과 벨리아스는 모습을 감췄고, 석찬의 머리와 눈 색도 원래대로 돌아오며 쓰러졌다.
‘이게 대체… 무슨…’
강신 때의 기억이 남아 있는 석찬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강신 후유증 때문에 점점 의식이 멀어져갔다.
‘저… 사람들은?’
정신을 잃기 직전, 석찬의 눈에 검은 장막을 뚫고 내려오는 날개 달린 인간들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의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석찬의 눈이 감겼다.
악마의 수장, 마신(魔神)과의 첫 만남은 강렬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