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어느 날 라우르는 말했다.
[이제야 조금 쓸 만해졌네.]
‘그쵸?’
[이제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됐어.]
파랑 등급의 마력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자, 그는 일점폭파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일점폭파술. 라우르가 석찬에게 알려준 두 번째 기술로, 약점 파악이라는 기술과 연결되어 보다 강력한 위력을 내는 기술.
여기까지는 석찬도 잘 알았고, 또 유용하게 써먹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다음 내용에서 라우르는 더욱 놀랄 만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사실 네가 쓰고 있는 건 진정한 일점폭파술이 아니야.]
‘예? 그럼 뭐예요?’
라우르가 그러길, 지금 석찬의 일점폭파술은 절반만 완성되었다고 한다.
[지금부터 진짜를 가르쳐 주도록 하지. 진짜 일점폭파술을 말이야.]
‘진짜 일점폭파술…’
그렇게 라우르의 지도가 시작되었다.
기존처럼 약점에 무작정 공격을 때려 넣는 방식이 아닌.
[그래, 그런 식으로 표식을 넣듯이! 유연하게!]
우선 약점에 마력을 흘려 넣는다. 이것을 상대방이 가진 모든 약점에 실행해야 했다.
이것을 하면서, 석찬은 왜 라우르가 진짜 일점폭파술을 가르쳐주지 않았는지 어느 정도 깨달았다.
‘이거, 생각보다 빡센데?’
약점에 정확하게 마력을 흘려 넣는다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고, 그것을 모든 약점에 반복할 때까지 남겨둘 만큼 마력을 조절하는 건, 어지간히 마력 컨트롤이 좋지 않은 이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새롭게 진화한 마력에 적응하지 못했던 석찬은 사용이 불가능했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이걸로 마지막!’
진땀을 뻘뻘 흘리며 마지막 약점에 마력을 불어넣자, 모든 약점이 사라지고, 나무의 정중앙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예.”
석찬이 환하게 빛나는 부분을 타격했다. 그러자 약점으로부터 환한 빛이 일더니, 나무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이건…”
구멍이 뚫리기까지의 과정을 본 석찬은 이 기술에서 다른 기술을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완전 파괴 같은데요?”
그렇다. 약점으로부터 점점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는 나무의 본체, 그리고 거대하게 뚫린 구멍의 단면을 만져보았을 때, 충격으로 부서졌다기 보다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매끈했다.
[오, 한 번에 알아보네? 맞아, 파괴랑 비슷해. 파괴의 위력에는 살짝 못 미치긴 하지만.]
“혹시 뭐가 다른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라우르가 말했다.
완성된 일점폭파술과 파괴는 둘 다 대상 자체를 소멸시킨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일점폭파술이 그저 상대를 물리적으로 소멸시킨다면, 파괴는 대상의 근원 자체를 완전히 소멸시킨다. 이게 비슷한 듯하면서도 엄청 달라.]
“똑같은 거 같은데.”
[일점폭파술도 강하지. 그런데, 그건 인간이나 몬스터 같은 애들한테나 통용되는 거고. 파괴는, 존재의 근원을 부숴버리는 거라서 말이야. 위쪽 존재한테도 극심한 대미지를 줄 수 있지.]
‘위쪽 존재라고 한다면…’
[천사, 그리고 신.]
‘신….’
라우르를 천계에서 쫓아낸 녀석들. 라우르의 전성기를 경험해 보았고, 악마들의 힘을 느껴본 석찬에게 신이란 하늘의 별, 그 이상의 존재였다.
[물론 네가 나중에 강해진다면, 일점폭파술로도 위쪽 애들한테 피해를 주는 건 가능할 거야. 하지만, 그게 전부다.]
천사, 특히 신을 상대하려면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턱도 없다고 한다.
[그러기에 파괴가 필요하다는 거다. 파괴로 공격한다면 녀석들에게 회복 불가능한 상처도 충분히 줄 수 있으니까.]
이어지는 말에서, 석찬은 파괴의 위력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파괴 연습도 게을리하지 말란 거다. 언제 신을 만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게으르면 쓰나?]
‘알았어요, 그리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 * *
새하얗던 세상이 조금씩 제 모습을 찾기 시작한다.
“음?”
침침한 눈을 비비던 로이먼 크롤로프, 그의 앞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이건…”
거대 키메라의 팔이었다.
“호오…”
원래대로 돌아온 세상에서, 크롤로프는 눈앞의 광경에 탄성했다.
“어떻게…”
여전히 엘리자베스에게 제압당해 있는 여섯 번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석찬의 주먹에 닿은 핵과 재생하지 않는 거대 키메라의 몸.
파직.
폭발 직전 이브가 석찬에게 쳐줬던 수 겹의 보호막이 깨지며 석찬이 추락했다.
“강석찬!”
진현이 황급히 그에게 달려갔지만, 손을 뻗어 그를 제지한 석찬이 바닥에 섰다.
“괜찮냐? 다친 덴 없고?”
석찬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는 진현. 그를 보며 석찬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낯부끄럽게 그러지 마라.”
“얌마, 걱정해줘도 난리야!”
“석찬 오빠!”
이번에는 이브가 다가와서 석찬의 몸 상태를 살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말이 없다.
“이 새끼, 사람 차별하네….”
쭈글한 표정을 지은 진현이 천무진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아저씨는 다친 데 없…”
“꺼져라.”
“…….”
질색하는 그를 보며, 진현은 허공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쉰 뒤 엘리자베스와 여섯 번째 옆으로 가 드러누웠다.
“어머, 이번엔 내 차례?”
“사는 게 참 힘듭니다, 누님. 친구 녀석이 걱정해줘도 난리… 에효.”
신세 한탄을 시작하는 진현. 하지만, 여섯 번째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그는 맥아리 없는 눈으로 바닥에 쓰러져서 더 이상 회복하지 않는 거대 키메라의 시체를 바라봤다.
‘내 역작이….’
저 녀석 하나를 만드는 데 든 돈과 시간이 얼마인가? 아니, 그건 상관없었다. 녀석은 평생 살면서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여섯 번째의 모든 키메라 제작자 노하우와 철학이 담긴 그의 영혼과도 같은 존재였다.
예상대로 녀석은 석찬 일행을 밀어붙였고, 막대한 타격까지 주며 승리가 코앞에 있었다.
하지만 강석찬, 그가 새로 보여준 기술에 무너져 버렸다.
“이…이이…”
여섯 번째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를 바라보던 엘리자베스가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그를 바라봤다.
“생각해보니 아직 한 명 남았네, 적.”
“아, 맞다. 데려갈까요?”
“그래.”
여전히 넋이 나간 눈을 하고 있는 그를 끌고 석찬 앞까지 간 진현과 엘리자베스. 도착하자마자 엘리자베스가 석찬에게 달라붙으며 말했다.
“제법이었던데요, 주인님? 이번엔 진짜 멋졌….”
“주인님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거참, 그리고 달라붙지 말아줄래?”
석찬은 또다시 두 여인간의 신경전이 벌어지기 전에 빠르게 엘리자베스를 떨쳐내고 여섯 번째와 눈을 마주쳤다.
“올킬러…”
해탈한 표정의 그에게 석찬이 말했다.
“이제 어떻게 될지 알고 있지?”
“날 죽일 건가?”
석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이유는 너도 알잖아?”
석찬이라고 마냥 살인을 즐기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살인을 기피하는 편이었고, 가능한 한 인간에게는 위해를 가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모습이 겹쳐 보였기에, 비록 연막이었다고는 해도 여섯 번째가 과거 이야기를 할 때 공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안 돼.’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여섯 번째는 무고한 사람이 아니다. 녀석은 수많은 사람을 키메라의 재료로 삼아 실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앞으로 녀석을 살려두었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냐?”
“할 말이라…”
여섯 번째가 품을 뒤적이더니 석찬의 얼굴에 무언가를 던졌다.
치이익-
유리가 깨지며 진한 독액이 석찬의 볼을 침식하려 했지만, 과거 레플렉시아를 마시고 독에 면역이 된 석찬은 멀쩡했고, 유리 조각을 털어내며 여섯 번째를 노려봤다.
“대답은 그거였냐.”
“크크. 너도 결국 똑같은 놈이야.”
“개소리 집어치우고, 죽어라.”
콰아아!
그 순간, 여섯 번째의 몸에서 거대한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끄어억…”
본인이 의도한 것이 아닌지, 여섯 번째의 신음이 들려온다.
끼긱. 끼기긱.
몸이 괴상한 형태로 꺾인 여섯 번째. 잠시 후, 관절들이 전부 제자리로 돌아오더니 하얀 동공만을 내보인 그가 입을 열었다.
“흠… 오랜만…이군… 인간의… 냄…새.”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의 여섯 번째. 변화한 것은 그의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이 기운…’
검고 소름 끼치는 마력. 단언할 수 있었다. 이는 엘리자베스의, 악마의 마력이었다.
그녀를 돌아보자, 흥미롭다는 듯 웃고 있는 엘리자베스가 보였다.
“내 이름은… ■■■■. 위대한 ■■의 심복이자 대공의 직위를 받들고 있다.”
곧이어 소름 끼치는 기운이 석찬을 향해 쏘아졌다.
“네 녀석인가… 그분의 심복을 둘이나 죽인 극악무도한 녀석이…”
‘극악무도는 개뿔…’
악마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그분의 밑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절했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그 말에 석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대공급 악마의 입가에 기괴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럼… 죽여도 되겠다는 말이로군?”
순간 소름이 쫙 몸을 훑었다. 대공급 악마의 몸에서 막대한 양의 검은 마력이 쏟아져 나오더니, 검의 장막을 만들어냈다.
‘이건…’
“뭐, 녀석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말이지. 잠깐 벽을 쳤다.”
“벽?”
G의 이상한 공간과 비슷한 것 같았다.
준비를 마친 대공급 악마가 천천히 석찬을 지나 붉은 머리의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엘리자베스…”
“오랜만이에요. ■■■■.”
“허술한 술수에 넘어가 노예가 되었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맞아요.”
그 말에 흉흉한 살기가 쏟아졌다. 오로지 엘리자베스에게 향한 것이었지만,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오그라들었다.
“한심한 녀석.”
“후훗.”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웃음을 잃지 않았고.
“지켜보고 있거라. 네 녀석의 주인이 죽는 모습을.”
대공급 악마는 고개를 돌려 석찬을 노려보았다.
오싹.
보기만 해도 전의가 상실되었다.
“죽어라.”
그 말 한마디에 갑자기 석찬의 정신이 끊어졌다.
말 한마디로 인간을 기절시키는 힘. 이것이 대공급 악마가 가진 힘이었다.
“석찬아!”
“오빠!”
그 모습에 천무진과 이브가 무기를 빼 들었고, 진현은 거센 발걸음으로 대공급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가소롭군.”
휙.
“컥!”
하지만 가벼운 손짓만으로 세 사람을 날려버리는 대공급 악마. 그의 눈이 오로지 석찬에게 집중되었다.
“참으로 아까워. 본인은 물론 동료의 무력도 출중하건만, 그분의 밑으로 들어오는 걸 거절해 가지고.”
잠시 한탄하는 대공급 악마.
그는 고민했다. 아무리 거절했어도 이 인간이 지닌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정보원에 따르면 키워지고 있는 곳에서도 두려워할 재능을 지녔다고 하니.
‘세뇌라도 해야 하나.’
하지만 이내 그가 고개를 휘저으며 석찬의 목에 발을 걸쳤다.
“아니, 죽어라.”
자의로 그분의 종이 되는 영광을 거절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건방졌다.
‘인간 따위 몇백 년만 기다리면 쓸 만한 녀석이 또 나올 터.’
그렇게 석찬의 숨통을 끊으려는 순간이었다.
번쩍.
석찬이 눈을 떴다.
쾅!
그리고, 대공급 악마의 몸이 고꾸라졌다.
“에이씨, 거참 말 길게 하네.”
새하얀 백발에 짙게 빛나는 녹안.
“대공급 따위가.”
라우르의 등장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