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석찬의 방 안.
안 그래도 좁은 방에 성인 다섯 명이 들어서자, 움직일 틈도 거의 없었다. 굳이 이렇게 좁은 곳에 모두가 모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진화한 키메라에 대한 대책.
“그런데, 그걸 꼭 여기서 해야겠어요?”
이브의 물음에 석찬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말고 할 데가 어디 있다고.”
“뭐, 예전에 갔던 무진 님의 거처라든지….”
확실히 천무진의 거처라면 꽤 넓고 주변도 한적하니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기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으니.
“그곳은 이미 버린 지 오래요. 혹시나 흔적이 남을 것을 염려해 폭파해버렸지.”
“굳이….”
“여기서는 아니지만, 무림에 머물던 시절 본좌에겐 적이 많았소. 때문에 추적을 당하는 일도 일상다반사…”
이야기가 길어질 조짐이 느껴지자, 석찬이 빠르게 그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됐고, 자. 그럼 한번 시작해보자. 의견 낼 사람?”
의견이란 진화한 키메라를 감지하고, 박멸할 만한 수단을 뜻했다.
“…….”
하지만 아무도 쉽게 의견을 못 냈으니,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녀석들의 까다로운 특성 덕분이었다.
무려 마력 감지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새로운 유형의 적. 솔직히 그것만 아니었으면 지금의 일행에 비해 전투력 자체는 별 볼 일 없는 키메라들을 지금 당장이라도 박멸했겠지만
“하아….”
그러질 못하니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곤란해하던 그때.
“저기.”
웬일로 진현이 먼저 손을 들었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석찬의 물음에 진현이 얼굴을 긁적이며 말했다.
“어차피 이렇게 생각해봤자, 뾰족한 해결법도 안 나올 것 같은데. 그냥 이렇게 하는 건 어때?”
그렇게 진현이 꺼낸 해결책은 나름 충격이라면 충격적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녀석들을 잡아 족치자고?”
그것도 계획 없이 말이다.
솔직히 터무니없는 의견이다. 당연히 다른 이들도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다른 녀석들이 낌새를 눈치채서 작정하고 숨어들면 어쩌려고요.”
“이번 키메라들은 전 녀석들과는 달리 지성이 뛰어난데, 자칫 잘못하다 더욱 위험해질 수도 있어.”
두 여인과 석찬이 반대하는 가운데, 조용히 있던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난 나쁘지 않다고 보네만.”
“응?”
가장 반대할 것 같은 이에게서 의외의 찬성표가 나오자, 세 사람이 어서 이유를 말하라며 그를 재촉했다. 이에 담담히 의견을 표하는 천무진.
“진현의 말대로, 일반적인 감지가 불가능한 지금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별로 없다고 본다. 이럴 바엔 차라리 전면 전쟁을 선포하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그, 그쵸? 그렇게 생각하죠?”
다구리를 맞다가 만난 유일한 아군에 진현이 반색하며 그에게 물었고, 천무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확실히.”
진현에 천무진까지 저렇게 말하자, 석찬의 내면에도 갈등이 생겨났다.
‘확실히, 지금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전면 전쟁. 무고한 민간인이 계속 당하는 것을 손 놓고 방치하느니, 적극적으로 나서서 어그로를 끄는 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
‘어떻게 생각해요?’
라우르를 힐끔 쳐다보자,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네 녀석이 누구의 화신인지 잘 생각해 보거라.]
그 말 하나로 대답은 충분히 되었다.
다짐한 석찬이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결정했다. 진현이와 천무진 말대로 한다.”
“진짜요?”
두 여인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단 표정이었기에, 석찬은 그녀들을 설득할 만한 방안도 생각해냈다.
“애초에 키메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생명체야. 그렇다면….”
“전문적인 지식을 지닌 자라면 키메라의 구조를 파악할 수도 있겠죠.”
엘리자베스의 입에서 석찬이 하고 싶었던 말이 흘러나왔다.
“맞아, 엘리 혹시.”
“전문 인력이라면… 알고 있는 정보통이 몇 군데 있죠. 한 마리만 잡아주신다면 바로 의뢰를 맡길 수 있겠어요.”
“고마워. 이브는 엘리를 도와줄 수 있어?”
“제가 도와줄 일이 있을까요?”
비록 리더는 석찬이지만, 현재 석찬 파티의 명실상부한 1인자는 엘리자베스이다. 그런 그녀를 도울 일이 과연 있을까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
석찬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있어.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저밖에 할 수 없는 일?”
“잠깐 와봐.”
석찬은 이브에게만 작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이 참에 키메라에 관해 보고 배워봐. 혹시 알아?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석찬 오빠, 키메라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당연히 싫지, 하지만 그건.”
석찬이 싫어하는 키메라는 오로지 인간을 소재로 사용한 키메라뿐이다. 솔직히 인간을 사용하지 않은 키메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브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았어요. 해보죠.”
“좋아. 화이팅.”
이브의 대답에 만족한 석찬이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럼, 우리는 키메라 좀 찾으러 다녀볼까?”
“오우.”
“그러지.”
작전이 결정되자, 행동은 빨랐다. 석찬, 진현, 천무진 세 사람은 각자 마을 주변으로 흩어져 혹시나 키메라가 남겼을 흔적을 찾아 돌아다녔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석찬 쪽에서 먼저 희소식이 들려왔다.
“받아.”
“키에에….”
재갈을 물리고 마력 억제 사슬로 온몸을 칭칭 감아 움직임을 봉쇄한 키메라를 던진 석찬이 침대에 주저앉았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에 엘리자베스도 혀를 내둘렀다.
“생각보다… 빨리 구해오셨네요?”
“운이 좋았지.”
정말 운이 좋은 것 뿐이었다. 라우르가 수련의 일환이라며 키메라 찾기를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저런 골목을 돌아다니다 구석에서 휴식하던 키메라를 우연히 발견해 기습한 것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고마워요. 이거면 충분해요. 그러면 가볼까. 꼬마 아가씨.”
“가요, 빨리.”
작전대로 이브와 엘리자베스가 같이 떠났고, 석찬은 계속해서 키메라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그리고 나흘이 흘러.
“잡았어?”
“응. 생각보다 빡세네.”
키메라 잡기에 익숙해진 석찬 일행은 어느새 30마리에 다다르는 수의 키메라를 잡았다. 초반에는 한두 시간이 지나도 한 마리를 찾을까 말까였지만, 몇 마리를 잡다보니 속도가 늘고 녀석들에게 존재하는 일종의 패턴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잡는 것이 나름 수월했다.
하지만.
“이 방법도 오늘로 끝인가.”
“그런 것 같군.”
방금 진현이 잡은 것이 무려 하루 만에 잡은 키메라였다. 역시, 지성이 갖춰진 키메라답게 석찬 일행이 자신들을 노린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녀석들이 인간을 납치하며 남기던 흔적이 거의 소멸되었고, 기척 또한 이전보다 더욱 날래고 희미해져 사용하던 방법으로 찾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까지 다다랐다.
“이브랑 엘리가 언제 오려나.”
“그러게, 벌써 나흘인데 아직 멀었나.”
이제 희망은 키메라를 연구하러 간 두 여인이 희소식을 들고 오는 것뿐.
“가능할까?”
진현이 불안해하며 말하자, 석찬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가능해. 두 사람이니까. 꼭 반드시 해결책을 가지고 올 거야.”
그렇게 하루가 더 흘렀고, 운좋게 한 마리의 키메라를 추가로 처리한 석찬 일행이 여관으로 돌아왔다.
“오셨…어요?”
여관에 돌아오니, 한껏 겁에 질린 표정의 직원이 그들을 맞이했다.
“예. 아직 일어나 계셨네요?”
“그게… 불안해서요.”
“불안… 아.”
현재 50층 마을의 분위기는 예전처럼 밝지 않았다.
사람들도 마냥 바보가 아니었기에, 마을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진작에 깨달았고,
‘위험해, 위험하다고!’
사람들의 증언과 속출되는 피해자에 불안감을 느낀 몇몇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기까지 했다. 아직 단언하긴 이르지만, 상황이 지속된다면 50층 마을이 예전 40층 마을 꼴이 날 수도 있는 상황.
“…….”
석찬은 일의 심각성을 다시 깨달으며 직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곧 해결될 거예요.”
“그러면 다행이고요…”
직원을 안심시킨 석찬이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 그를 예상 외의 인물들이 반겨주었다.
“오셨어요?”
“왔어요?”
고작 며칠 못 봤지만,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두 여인의 얼굴에, 석찬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기다렸어 둘다.”
“어머, 영광이어라.”
“좀 떨어지시고.”
은근슬쩍 석찬에게 달라붙는 엘리자베스를 쳐낸 이브는 석찬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이건?”
“엘리자베스 씨가 유능한 사람을 많이 알고 있더라고요. 50년 동안 키메라를 연구한 사람이 써준 쪽지예요.”
“왜 그걸 네가 줘, 내가 주려고 했는데….”
“고마워, 엘리.”
“당연히 고마워 해야죠.”
엘리자베스를 달래주며, 쪽지를 편 석찬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쪽지 안에는 석찬이 원하는 모든 것이 적혀 있었다.
키메라의 상대법. 녀석들을 추적하는 방법 등 돈 주고도 구하지 못할 중요한 정보들에 석찬이 엘리자베스와 이브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고마워 그리고 고생 많았어. 두 사람 다.”
“고맙긴요, 뭘. 종속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
“도와주느라 조금 힘들긴 했는데, 괜찮았어요.”
“어때, 괜찮았지?”
석찬의 물음에 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조금은요.”
“조금은 무슨, 무슨 말 할 때마다 옆에서 이건 뭐예요, 저건 뭐예요… 읍! 뭐야?”
그 말에 이브가 빠르게 그녀의 입을 가로막았다.
“그만하시고!”
“어머어머, 요거 보게나?”
새빨게진 그녀의 얼굴을 보니 웃음이 났다.
“보기 좋네, 두 사람 다 사이좋게 지내는 거.”
빠직.
그 말에 갑자기 석찬의 머리 위로 번개가 떨어졌다.
“우왁!”
새까맣게 타버린 석찬과 바닥. 이를 뒤로하며 이브가 무심하게 지팡이를 집어넣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소리를 들은 진현과 천무진은 황급히 석찬의 방으로 달려왔지만.
“응?”
“중요한 건데 타버리면 어쩔 뻔했어?”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일부러 조절해서 날린 거예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석찬의 손에 들린 쪽지를 뺴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을 보고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푸하하하! 꼴 좋다, 멍청한 화신 놈아!]
라우르의 경박한 웃음이 석찬의 고막을 강타할 뿐이었다.
* * *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번개에 맞아 저릿한 머리를 부여잡은 석찬이 쪽지에 적힌 대로 마법진을 그렸다.
지금 그리는 마법진은 키메라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마법진이었다. 키메라마다 하나씩은 꼭 가지고 있는 핵. 아무리 마력 감지가 안 통하도록 수법을 사용했더라도, 이 핵이 가진 마력 반응을 집요하게 파고들면 위치를 특정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스으윽.
그리고 그 핵의 마력 반응을 잡아내는 마법진을 완성한 석찬이 마력을 불어넣었다.
파아앗-
그러자, 마을 곳곳에서 나타나는 익숙한 마력 반응.
바로 키메라들이었다.
“큭.”
그 모습에 석찬을 포함한 진현과 천무진 모두 미소지었다.
며칠간의 끈질긴 숨바꼭질을 끝낼 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