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일주일이 흘렀다.
천무진과 엘리자베스라는 든든한 우군이 생긴 이후, 석찬 일행은 파죽지세로 몬스터를 처치했다.
엘리자베스는 악마이기도 하고, 천사들의 적이기도 하기에 보조 마법류밖에 사용하지 못했지만, 천무진은 이야기가 달랐다.
“쿠룩!”
“키에엑!”
“활!”
평소처럼 유인 마법진으로 몰이 사냥을 하는 석찬 일행. 그때, 다른 사람들을 뒤로 물린 천무진이 검을 뽑아들었다.
스릉.
날카로운 음성과 함께, 칠흑 같은 검은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오오-
그거도 모자라 자신의 비기인 악마화(惡魔化)를 선보이는 천무진.
처음 이 기술에 대해 들었을 때 가장 놀란 이는 역시 엘리자베스였다.
‘우리처럼 될 수 있는 기술이라니. 정말 놀라워.’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이 기술이 천무진이 본래 있던 세계인 무림에 존재했던 기술이며, 이미 많은 마교인들이 익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본신의 힘이 떨어지면 위력이 반감되지만, 천무진이 사용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화르륵-
검은 강기가 검을 둘러쌌다.
서걱-
천무진이 가로로 검을 한 번 휘두르자, 앞장서서 달려오던 몬스터 떼가 반으로 갈라졌다.
‘몇 번을 봐도 굉장하다니까.’
비록 50층 시험에서 보았던 최하급 악마보다는 못하지만, 그에 준하는 무력임에는 확실하다.
서걱- 서걱-
한두 번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수 백의 몬스터 시체가 바닥에 쌓였다.
“끝났다.”
금새 자신 몫의 몬스터를 전부 처리한 천무진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뒤,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이 검, 훌륭하군.”
“마음에 드나 보네.”
“그래. 또 하나 은혜를 입었어.”
“은혜는 무슨…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천무진이 들고 있는 검은 검. 사실 이것은 천무진의 원래 무기가 아니었다.
검의 이름은 흑도(黑刀). 탑 최고의 장인 중 하나인 프레드릭 레나토가 천무진을 위해 만들어 준 검이었다.
다행히도 천무진을 본 프레드릭은 그에게 무기를 만들어주는 것을 허락했고.
‘이놈은 또 어디서 구해온 거냐.’
마찬가지로 그가 지금껏 모아온 상등 재료에 감탄하며 무기를 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낸 결과물 역시 레전더리. 과연 탑 제일의 장인다웠다.
마음껏 검을 감상하고 있는 천무진을 뒤로하고, 석찬은 유인 마법진 앞에 섰다.
“내 차례, 맞지?”
“예, 준비하세요.”
다른 이들이 앉아서 구경하고 있는 사이, 유인 마법진이 발동된 후 몬스터들이 몰려온다.
“금방 끝나니까 준비하고 있어, 진현아.”
“응응.”
당연한 말이지만, 탑의 시스템은 오로지 자신이 직접 죽인 몬스터만을 집계하는 방식으로 퀘스트 완료 여부를 파악한다. 그렇기에 고안한 사냥법이 바로 이 순번 사냥법이었다.
“다 뒤졌어.”
원초적이면서 무식한 방법이긴 했지만, 여러 번 방식을 바꿔가며 사냥을 해본 결과 이 방법이 가장 맞다고 판단한 석찬 일행은 이 사냥법을 애용했고, 결과는 확실하게 나타났다.
일주일만에 각자 만 마리가 넘는 수의 몬스터를 때려잡은 것이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전혀 괘념치 않았다.
‘일단 지금 순간에 집중한다.’
잡아야 하는 몬스터 수가 너무 많다고 투덜댄다 한들, 몬스터 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 시간에 한 마리라도 더 잡아 족치는 것이 이득이다.
“키에…에에엑?”
석찬을 향해 칼을 찔러 넣던 고블린이 되레 구부러진 자신의 무기에 당황했다.
“조금 아플 거다.”
지잉-
한 줄기 빛에 고블린의 머리가 터져나간다. 그에 모자라 일직선으로 이어진 몬스터의 머리에 일제히 구멍이 뚫렸다.
“좋은데 이거?”
과거 포이그 레바돈이 선보인 그의 주력기이기도 한 마력 빔. 사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아 마법도 배우기로 마음먹은 석찬이 요즘 자주 사용하는 기술 중 하나이다.
압도적인 마력량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위력은 몬스터들에게 공포의 대상 그 자체였고.
휭- 휭-
“끝, 다음.”
“괴수 새끼.”
손가락을 몇 번 까딱인 것만으로도 자신의 몫을 전부 해치운 석찬이 진현에게 바통을 터치했다.
* * *
“감사합니다! 또 오십쇼, 올킬러 님!”
언제나처럼 수백의 몬스터 사체를 한 번에 처리하고 나서는 매매 시장. 안쪽에서 연신 석찬을 향해 절하는 상인을 애써 무시하며, 석찬은 여관 방으로 되돌아갔다.
“올킬러다.”
“오.”
50층에 온 지 꽤 시간이 지난 터라, 이제 사람들도 석찬을 보고 그다지 놀라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석찬 주위에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붐볐는데.
“꺄아아!”
“멋져요! 귀검 님!”
그 이유인 즉슨, 바로 천무진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주변에 모습을 노출했던 석찬과는 다르게 천무진은 성격상 대외적인 활동에는 대부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오로지 사냥과 소문으로만 명성을 쌓아 귀검이라는 이명까지 얻은 천무진이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그 여파는 생각보다 거셌다.
“여기 봐주세요!”
긴 장발에 동양적인 미를 더하는 외모, 그에 반하는 남성미 넘치는 굵은 목소리는 많은 여인들의 여심을 자극했고 천무진은 그새 석찬을 뛰어넘는 인기 스타가 되었다.
또한, 천무진은 여자뿐만이 아니라, 남자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었는데.
“올킬러랑 귀검이랑 싸우면 누가 이길까?”
“글쎄….”
바로 석찬과 천무진 사이의 강함 논쟁 때문이었다. 두 사람 다 압도적인 무력을 지니고, 평범함을 거부하는 압도적인 성장 속도와 탑 등반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 사람의 강함을 가지고 말다툼하고 있었다.
“올킬러 아니겠어? 7년 만에 50층에 온 놈이 세상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귀검도 만만치 않아. 예전에 사냥터에서 봤는데… 미쳤어, 그냥. 베테랑 사냥꾼도 단칼에 벨 기세라니까?”
“걍 둘이 싸우는 거 구경하고 싶다. 언제 한번 안 싸우나?”
하지만 이렇게 다투는 이들이 모르는 점이 하나 있었다. 그들도 모르는 사이, 두 사람은 이미 한 차례 격돌했다.
이런저런 일이 많았지만,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무승부로 대련이 끝났다는 것도,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었다.
“오셨어요!”
“아, 네. 저녁밥 좀 준비해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이죠, 10분 정도 뒤에 올려드릴게요.”
“고마워요.”
어느새 친해진 여관 직원과 잠시 대화를 나눈 뒤, 석찬 일행은 방으로 돌아왔다.
“후아!”
몇 번을 느끼는 거지만, 사냥 후에 처음 침대에 누울 때의 기분은 정말 째진다. 잠시 후면 바닥이 더 나은데라는 생각이 들 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 기분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래, 그러고 싶었는데.
[일어나, 일어나!]
라우르가 초를 쳤다. 며칠 전부터 사냥에도 따라가지 않고 계속 50층에 머물렀기에, 석찬도 그를 보는 것은 굉장히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일어나!]
계속 일어나라는 말을 귓가에 대고 연발하는 그의 행동에, 결국 석찬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에요?”
[큰일이야, 큰일!]
“무슨 일인데요?”
[심심해.]
“?”
별 같잖지도 않은 이유에, 석찬의 인상이 더욱 험악해졌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장난이지. 실은 진짜 이유가 있어.]
갑자기 표정이 진지해진 라우르. 그 모습에 방금 전의 짜증은 곧장 사라지고, 석찬도 라우르의 말에 집중했다.
[사실은 말이지….]
“예.”
[존나 심심해.]
“???”
이번엔 인상이 찌푸려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해탈한 얼굴인 석찬은 말없이 침대에 풀썩 누웠다.
[뭐하냐? 주신의 무료함을 풀어주는 것도 화신의 일이거늘….]
“알아서 놀아요.”
[에잉, 쯧! 나 때는 말이야! 으이! 화신이 너처럼 행동했으면 바로! 으이!]
또 이상한 말투를 해대는 라우르.
“하, 진현이한테 그런 거 배우지 말라니까요?”
진현의 행동을 곁에서 봐온 지 어느덧 수년. 라우르는 진현에 버금가는 장난꾸러기가 되어 있었다.
[그래, 그래. 다 장난이고. 이번엔 진짜 본론을 이야기하지.]
이번에도 진지한 어투로 말하는 라우르. 하지만 석찬은 두 번 당하지는 않겠다는 듯 침대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뭐, 들어봐라. 일단.]
그때까지만 해도 석찬은 그의 말에 별로 귀기울이지 않았다.
‘또 장난이겠지, 뭐.’
하지만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은 라우르가 내뱉은 한마디에 곧바로 사라졌다.
[또 나타난 거 같아, 키메라.]
“예?!”
그 말에 석찬은 당장 일어나 라우르를 쳐다봤다.
“뭐라고 그랬어요, 방금?”
조금 전의 무심한 태도는 어디가고, 석찬은 진지한 눈빛으로 라우르를 응시했다.
씩.
그때, 작게 웃은 라우르가 입을 열었다.
[글쎄. 내가… 뭐라고… 했더라?]
“장난치지 마시고.”
[내가… 뭐라고…]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하늘 같은 주신님 앞에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이럴땐 아부가 답이라는 걸 알고 있는 석찬은 곧장 라우르에게 절하며 외쳤다. 그러자 환한 미소의 라우르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자고로 화신은 이렇게 행동해야지.]
“그래서, 방금 전 하신 말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늘 같은 주신님.”
[오냐. 하늘 같은 주신께서 미천한 화신에게 지금껏 본 것을 알려주도록 하지. 영광으로 알도록 해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직후 라우르가 긴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요즘 마을 감시하는 거 알지?]
“감시가 아니라 그냥 여자 구경하러 다닌 거 아니었…”
[어허… 내가… 뭐라고…]
“죄송합니다.”
[네 친구처럼 행동하지 말도록 해라.]
친구라면 진현을 뜻하는 말. 이에 석찬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아니, 진현이처럼 행동하는 게 누군데…’
[어허.]
‘아.’
라우르가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한 석찬은 약 5분 가량의 시간을 용서를 비는 데 사용해야했다.
[좋아.]
조금은 삐진 것이 풀린 라우르가 하던 말을 재개했다.
[그래서, 골목길을 순찰하고 있는 도중 이몸이 엄청난 걸 발견했지.]
“설마…”
[그래, 키메라다.]
꿀꺽.
그 말에 석찬이 침을 삼켰다.
키메라. 몇 주 전에도 한 번 박멸한 적 있는 명실상부한 몬스터이자 적인 존재.
[녀석들도 인간을 주 재료로 사용한 듯 하더라고.]
빠득-
그말에, 석찬의 표정에서 분노가 표출되었다.
“또 말입니까…”
[그래. 내가 요즘 사냥 안 따라갔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야. 녀석들의 수를 확인할 생각이었거든.]
“확인했어요?”
[그래. 생각보다 많더라. 한 백 마리?]
“100마리라…”
그 숫자면 일전에 마을을 뒤숭숭하게 만들었을 때보다 더 많은 수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가 있어.]
“더 큰 문제?”
[녀석들, 마력 감지가 안 통하는 것 같더라.]
그 말에.
“예?”
석찬은 두 눈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