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그… 아니, 그걸요?’
무의식적으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을 허겁지겁 주워 담은 석찬은 라우르를 응시하며 다시금 물었다.
[그래.]
하지만, 자신이 들은 것이 절대 헛소리가 아니라는 듯, 라우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니까, 지금 네 실력이라면 리스크가 있을지라도, 이전보다는 나을 거다.]
‘그 리스크가 어느 정도인지부터….’
[뭐, 죽지는 않고 반신불수가 되는 정도?]
‘똑같은 거잖아요!’
[안 죽으면 어떻게든 회복하면 되지. 네 그 엄청난 마력통으로 말이다.]
‘젠장….’
겉으로는 부정하고 있었지만, 석찬 또한 속으로는 라우르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점폭파술, 강화 얼티밋 피스트가 먹히질 않는다면 역시 그거밖에 없는 건가…’
[그래, 그러니까 확 지르자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계속되는 라우르의 설득에 결국 석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 아니면 도다. 지금은 뭐든 시도해보는 수밖에 없어.’
만약 반신불수가 된다면 이브가 치료해 줄거라 믿으며.
[그거지! 좋아, 가자고!]
‘예.’
이브가 들으면 미쳤다고 하겠지만 가볍게 넘기고 석찬이 넝마가 된 팔을 겨우 움직여 마력을 일으켰다.
‘다행히 팔은 어느정도 회복이 됐어.’
치료 마법을 계속 때려 부은 결과이다.
‘집중해라. 강석찬.’
지금부터 할 행동은 무척이나 위험하다. 라우르의 말처럼 잘못했다간 반신불수가 되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 있는 위험한 행동.
석찬의 오른손 위에 모인 푸른 마력이 점점 무색으로 변해갔다.
‘저 마력은?’
천무진 또한 달라진 마력을 눈치챘는지, 석찬의 손 위를 유심히 살펴봤다.
‘불길하군.’
악마 특유의 검은 마력을 풍기는 천무진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석찬이 내뿜는 마력은 이질적이었다.
파아앗-
이내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마력. 그 모습에 천무진은 물론, 엘리자베스조차 온몸을 한 번 훑고 지나가는 쎄한 기분에 소름이 올라왔다.
“헙.”
엘리자베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석찬의 마력을 살피면서도,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고.
‘뭐냐, 방금 그 느낌은!’
천무진은 떨리는 팔을 간신히 붙잡으며 팔에 솟아난 빛의 검을 바라봤다.
탑에 소환하기 전부터 자신의 비기를 맡고 있는 기술로, 이름 따윈 없었다. 혹자는 전설 속에 나오는 심검(心劍)이 아니냐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외부적 요소를 배제하고 강기만으로 벼려낸 검.’
어떤 면에선 석찬과 진현의 얼티밋 피스트와 비슷한 개념이었지만, 그보다 훨씬 정교하고 강력했다. 풀컨디션의 석찬이 강화 얼티밋 피스트를 사용해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그런 강기의 검이 있음에도, 천무진은 방심하지 못했다. 이유는 역시 석찬의 손 위에 펼쳐진 미증유의 기운 때문.
‘평범한 마력이 아니다.’
강기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상위 단계에 있을 법한 마력. 아니, 애초에 저것을 마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것이야말로…’
자신의 유일한 벽이었던 심검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쯤.
스르륵.
석찬이 눈을 떴다.
그의 눈은 밝은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부분 강신 따위가 아니었다.
[새끼… 성공했구만.]
신에게 빌린 것이 아닌, 진짜 신의 눈으로, 석찬이 신력(神力)을 손에 모았다.
석찬 또한 몸에서 솟아나는 남다른 힘을 느끼며, 신력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음을 직감했다.
그동안 만든 불완전한 신력이 아니라 천사나 신들이 사용하는 진정한 신력이었다.
‘유지 시간은 10초… 아니, 5초쯤 되는가?’
당연하게도 유지 시간은 극도로 짧았기 때문에, 잡생각 할 시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5초.
“알아서 잘 막아라.”
모인 신력이 녹색으로 빛나기 시작하더니, 땅이 진동했다.
쩌적- 쩌저적-
갈라진 주변 땅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4초.
말도 안되는 이변에 천무진은 결심했다.
‘사력을 다한다!’
선천진기(先天眞氣)를 사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천무진의 입가에 검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검은 머리가 살짝 푸석해지고, 얼굴에 한줄기 주름이 새겨졌다.
선천진기를 일부 사용한 효과였다.
‘이걸로 수명이 5년 정도 줄은 건가….’
대신 효과는 충분했다. 빛의 검이 더욱 강하고 단단해졌다.
3초.
“내 최강의 기술이다. 어디 한번, 받아봐라!”
닿기만 해도 살이 찢기고 피가 새어나올 듯한 강기의 검이 석찬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석찬은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조금만, 더!’
손바닥을 뒤덮은 검녹빛의 신력.
덜덜덜.
얼티밋 피스트를 사용했을 때보다 훨씬 심한 반동이 찾아왔다. 신력 발현으로 강화된 신체 능력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팔이 찢겨나갔으리라.
2초.
강기의 검은 여전히 석찬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이제 거리는 고작 50cm 남짓으로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 벌써부터 살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하지만 석찬은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완성됐다.’
처음으로 라우르의 기술을 불완전하지 않게, 온전히 만들어 냈다는 기쁨. 그리고 그것으로 눈앞의 적을 처치할 수 있다는 기분.
“팔 빼는 게 좋을 거야, 끔찍한 걸 맛보기 싫으면.”
단 1초.
싸악-
쭉 뻗어진 석찬의 손이 검강의 검을 꽉 움켜잡았다. 그러자 지금까지의 위압감이 무색하게 검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투신 라우르의 비기 중 하나, 파괴신마저 탐낸다는 그의 애착 기술, ‘파괴(破壞)’의 등장이었다.
‘뭣?’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천무진. 심지어 석찬의 손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검강의 검을 먹어 치우는 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천무진의 왼팔까지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왼팔이 재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한다.
“끄아아악!”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천무진이 비명을 질렀다.
강기의 검이 발현되었을 때부터 이미 대련의 범위를 명백하게 넘어선 싸움이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중재할 수 없었다.
석찬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힘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덜덜-
당하는 입장이 아님에도 절로 몸이 떨려왔다.
‘저걸… 어떻게 석찬 님이….’
의문만이 가득 늘어설 뿐이었다. 그 순간 엘리자베스의 눈에 사라져가는 천무진의 왼팔이 들어왔다.
‘위험해!’
파괴라는 기술의 특성은 한번 잠식한 대상을 완전히 없애버릴 때까지 힘이 퍼지는 걸 멈추지 않는다.
‘막아야 돼.’
그제야 이성이 돌아온 엘리자베스가 빠르게 천무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마침내 0초.
이미 힘을 다한 석찬은 쓰러졌고, 아직 그대로 서서 비명을 내지르는 천무진이 있었다.
탁.
이미 팔꿈치까지 없어진 천무진의 왼팔. 엘리자베스는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고, 다른 손에 마력을 둘렀다.
“조금 따끔할 거야.”
경고에 대답할 틈도 없이, 엘리자베스가 마력을 두른 손으로 그의 팔을 내려쳤다.
서걱-
“커헉!”
팔이 잘려 나갔지만, 어찌된 것인지 천무진은 비명을 멈추고 엘리자베스를 쳐다봤다.
“이게 무슨… 방금 일은 뭐…”
“내가 너 살려준 거니까, 고맙게 생각해.”
그때 천무진의 눈에 피가 묻은 엘리자베스의 손이 보였다. 정확히는 피 사이로 보이는 검은 재에.
“앗, 당신 손….”
곧이어 몰려오는 아찔한 통증에 손을 바라보니, 새끼손가락 끝이 사라지고 있었다. 아마 절단 과정에서 옮은 듯했다.
“칫.”
서걱.
엘리자베스는 미련 없이 오른손 전체를 잘라냈다.
부글부글.
잠시 후, 피가 끓던 절단면에서 새로운 손이 솟아났다. 공작급 악마이기에 가질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재생 능력이었다.
“일단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어.”
바닥을 구르는 손이 이내 완전히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만약 바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자신 또한 소멸을 면치 못했으리라. 아무리 공작급 악마여도 파괴 능력 중 하나인 완전 소멸은 버틸 수 없었다.
“나도… 고맙소.”
“팔은 어쩔 수 없었어. 최선의 선택이었으니까 너무….”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 걱정 마시오.”
그 말이 사실이라는 듯, 천무진은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도포를 찢어 상처를 지혈했다.
“…….”
그런 그를 뒤로하고, 엘리자베스는 말없이 의식을 잃은 석찬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눈에 찢어진 상의 사이로 드러난 작은 주먹 문신이 보였다.
‘반쯤은 안 믿고 있었는데….’
그의 문신을 가리며, 엘리자베스는 생각했다.
그가 깨면 지금까지 들었던 모든 의문을 해소해야겠다고. 조금 과격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말이다.
* * *
처음 석찬이 신력을 발휘했을 때, 그러니까 엘리자베스가 놀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를 바라보는 한 쌍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석찬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미녀의 이름은 에피르, 천계의 천사장이었다.
“이게… 뭔….”
석찬의 손에 신력이 실렸을 때, 에피르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일이란 말인가. 인간이 신력이라니.
‘말이 돼?’
수천 년간 탑을 관찰하면서 인간이 신력을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손에 꼽다. 그마저도 저 위층에서 놀고 있는 최상위권 강자들이나 쓰는 게 바로 신력.
절대 50층의 애송이가 사용할 만한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벌써 주신이 생겼다고?’
인간이 신력을 발현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 바로 신의 화신이 되는 것.
‘누구지?’
에피르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신들의 이름이 쭉 지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 힘을 빌려준 신을 유추할 수 없었다.
‘천신? 마신? 투신? 누구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석찬이 기술을 발현했다.
파괴(破壞).
현재 파괴신을 상징하는 그 기술의 등장에 에피르의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파괴신의 기술? 설마 파괴신이 녀석의 주신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파괴신은 화신을 두지 않기로 유명한 신이다. 하지만, 그가 파괴신의 주력 기술을 사용하는 걸 보고 확신이 섰다.
‘파괴신이 강석찬의 주신이다!’
천계가 발칵 뒤집힐 수도 있는 정보였지만, 우선 에피르는 이를 비밀로 부치기로 했다. 질 좋은 정보는 독식할수록 힘이 되는 법이니까 말이다.
‘나중에 협상 카드로 써먹을 수 있겠어.’
에피르는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섰다. 오늘은 천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날이다. 빨리 천계 중앙으로 가봐야 한다.
‘늦으면 안 되지.’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자리를 떠난 에피르는 보지 못했다.
석찬의 어깨에 새겨진 검은 주먹, 투신을 상징하는 문신을.
그의 주신이 파괴신이 아닌 전 투신 라우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녀가 이를 알게 되는 날은 이로부터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른 뒤이고, 그때가 되면 에피르는 지금의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