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석찬의 방 안.
그곳에는 땀을 한두 방울 흘리고 있는 석찬과 얼굴이 퉁퉁 부어있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우우… 죄송해…요.”
원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맞은 그는 석찬에게 부모 욕을 한 남자였다.
[오우야. 이건 조금 심한데?]
그 정도가 어찌나 심한지 라우르도 조금은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평소 욕할 때는 나무토막처럼 가만히 있던 놈이… 하긴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님을 욕하는데 참으면 병신이지.]
‘후우….’
부모 욕을 참을 순 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열이 뻗쳐 많이 때린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마세요. 아셨어요?”
“옙… 명심하겠…습니돠….”
입술도 퉁퉁 부르터 발음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남자는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고는 조심스레 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워후, 꼬라지가 말이 아니던데, 얼마나 팬 거예요?”
손에 묻은 뻘건 무언가를 닦으며, 엘리자베스가 유유히 방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피? 무슨 일 있었어?”
“아,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피를 닦아내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맞다. 좋은 걸 주웠는데 말이죠….”
엘리자베스가 무언가를 건넸다.
짤그랑-
그것은 고급스러운 은팔찌였다.
그리고 석찬은 그것의 주인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엘리… 죽인 거야?”
“감히 석찬 님을 낳아주신 분들을 욕한 놈이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보이지 않는 곳에다가 잘 처리해놨으니.”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가시지 않은 미소와 함께 석찬을 바라봤다.
‘죽일 필요까진 없었는데 말이야. 역시 악마는 악마인가.’
죽도록 팬 덕분에 화는 어느 정도 풀린 상태였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한 일인데 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턱.
잘했다는 의미로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주는 석찬.
이에 그녀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한 층 더 진해졌다.
“고마워요.”
“뭘. 내가 더 고맙지.”
작게 웃는 석찬의 얼굴을 보며, 엘리자베스의 심장박동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이거… 각인가?’
처음 봤을 때도 느꼈던 귀여움이 한 층 더 강해졌다.
‘걍 덮쳐?’
그녀의 머릿속에 노예와 주인이라는 주종 관계는 이미 사라지고, 악마로서의 본능만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한 다음에….’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에서 행복회로가 돌아가고 있던 와중이었다.
똑똑.
누군가 석찬의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석찬은 문으로 걸어가고, 김이 팍 샌 엘리자베스는 무서운 살기와 함께 문을 노려봤다.
‘누구야?’
김진현? 이브? 누가 되었든 가만히는 안 둔다.
섬뜩한 생각을 하며 남몰래 검은 마력을 끌어올린다.
끼이익-
그렇게 열린 문 앞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시커먼 흑발에 흑안을 지닌, 석찬과 비슷한 동양풍의 남자였다. 심지어 그가 입고 있는 도포, 흡사 무협지에 나올 법한 옷이었다.
눈매가 날카로운 것이 상당히 짜증난 듯한 표정이었다.
“누구세요?”
석찬의 물음에도, 남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신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척 봐도 잘 벼려져 있는 검이었다.
척.
석찬의 목 끝에 검을 겨눈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나와 겨뤄라.”
“응?”
갑작스러운 결투 신청에 석찬이 고개를 기우뚱했다.
“뭐?”
엘리자베스도 마찬가지였다. 당황스러움에 검은 마력마저도 사라진 채 석찬의 옆에 달라붙어 남자를 유심히 뜯어봤다.
‘이쁘장하게 생겼네.’
피부는 새하얗고, 그에 대조되는 시커먼 머리와 옷의 색이 잘 어우러졌다.
‘근데 누구야? 이놈? 누군데 감히 나와 석찬 님의 러브러브한 시간을….’
석찬은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김칫국만 마시고 있는 엘리자베스. 그런 그들에게 남자가 물었다.
“옆의 여자는 본처인가?”
“에?”
“에?”
이번에는 엘리자베스도 고개를 기우뚱했다.
방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무의식적으로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하지만 석찬은 적극적으로 부정했다.
“아니, 단지 주종 관계다. 그리고, 이거 이만 치우지?”
석찬의 손에 잡힌 검이 천천히 바닥으로 향했다.
“어이가 없네, 다짜고짜 찾아와서 싸우자니, 예의가 없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괜한 호승심이 생겨나서 기별도 없이 찾아오고 말았군. 미안하다.”
허리를 살짝 숙이는 남자. 석찬은 일단 남자를 방 안에 들여보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들어보기라도 할 심산이었다.
“그래서, 너는 누구냐.”
“본좌의 이름은 천무진. 위대한 천마신교의 교주였지.”
“천마신교?”
무슨 무협지에서나 들을 법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본좌라니? 듣는 입장에서 절로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질 수 없지. 석찬아, 자기소개로 이렇게 말하는 거다. 이 몸은 강석찬. 위대한 투신 라우르의 화신이다!]
‘그건 비밀이잖아요.’
[맞다. 그러니까, 이 몸은 강석찬, 올킬러다!로 가는 건 어떠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좀.’
“그대의 명성은 익히 들었다. 올킬러 강석찬.”
[봐바! 쟤도 올킬러라 하잖아.]
‘젠장.’
“같은 50층 시험 합격자로서 정식으로 대련을 요청하는 바이다.”
“아아, 같은 50층 합격…자?”
그 말에 석찬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뭐야, 그럼 당신이….”
“맞다. 본좌가 이번 50층 시험의 첫 합격자, 탑에서는 귀검(鬼劍)이라고 불리고 있지.”
들은 적 있다. 석찬, 진현, 이브보다 먼저 50층 시험을 합격한 남자, 귀검. 마을에 들어온 뒤로 모습을 비추기는커녕 거주지도 명확하지 않아 한번 만나보고는 싶었지만 불가능했던 자이다.
그런 자를 지금 만나다니.
“이전 무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사과하지. 그러니, 한 번만 해줄 수 없겠나. 대련.”
“흐음….”
원래는 신원만 듣고 바로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그의 정체를 들으니 고민이 됐다.
‘같은 50층 합격자.’
그것도 최초. 이브보다 하루 일찍. 그렇다 보니 궁금했다.
‘저 자의 무력은 어떠할까.’
물론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렇게 말하기 뭐하지만, 자신은 강했으니까.
‘그래도 궁금하니….’
잠시 고민하던 석찬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말에 천무진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눈매도 날카롭던 것이 푸근하게 변했다.
“정말 고맙네. 그럼, 자세한 날짜를….”
“굳이 미룰 거 있어? 최대한 빠르게 하는 걸로 하지.”
그 말에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네. 그렇다면 내 거처 근처로 가는 것이 어떠한가? 그쪽은 한적해서 말이야. 자유롭게 힘을 쓸 수 있을 거라네.”
“좋아, 그 전에 잠시만.”
석찬은 방을 나와 옆방 문을 두드렸다.
“이브, 잠깐 나와볼 수 있어?”
잠시 후, 이브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는 것이, 마력 수련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바빠?”
“아뇨, 괜찮은데… 옆의 남자 분은….”
“어머… 나는 무시하는 거니?”
“…저 분은 누구시죠?”
석찬의 곁에 꼭 달라붙어 있는 엘리자베스를 가볍게 무시한 채, 천무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반갑소. 본좌는 천무진, 귀검이오.”
그 말에 이브도 석찬처럼 놀라 되물었다.
“아… 당신이 귀검이군요? 그런데 어쩐 일로….”
“아, 이 사람이 나랑 대련 한 판 하자고 해서. 잠깐 밖에 나갔다 올 거야. 일찍 올게.”
전에 몇 번 그녀를 걱정시킨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어딜 혼자 갈 때는 꼭 그녀에게 말하고 가는 석찬이었다.
[애처가가 따로 없네, 따로 없어.]
‘애처가는 무슨.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래, 그래. 네가 뭘 알겠냐….]
“너무 세게 하진 말고. 일찍 들어와요.”
“그래. 진현이한테도 대신 말해줄 수 있어?”
“그러죠, 뭐.”
“고마워.”
“별 말씀을… 그보다, 당신도 따라가겠다는 건 아니죠?”
“응? 나?”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럼 당신이지, 누구야. 두 분이 대련한다는데 왜 당신이 쫓아가요?”
“내 맘이지. 너도 따라오던가.”
“됐어요. 갈 거면 가시든지.”
평소와는 다른 이브의 모습에 엘리자베스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어머, 웬일이래?”
“어차피 석찬 오빤데,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요. 신경 안 쓰려고요.”
무언가 체념한 듯한 말투였다. 그런데, 왠지 엘리자베스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건 맞지… 그럼 갔다올게!”
“네, 잘 다녀오세요들.”
이브에게 말도 했겠다, 석찬은 은신 마법으로 여관에서 빠져나와 천무진과 나란히 걸었다.
“방금 전의 여인이 본처인가?”
“컥!”
갑작스러운 질문에 사레가 들린 석찬이 기침을 토해냈다.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면 됐다. 괜찮은 여인 같던데, 놓치지 말길.”
[내가 하고 싶은 말 다해주네. 아오 사이다.]
‘진현이한테 이상한 말 배우지 말라니까요?’
[뭐, 내 맘인데?]
“크흠….”
그렇게 어색한 발걸음으로 마을 밖을 나온 석찬이 천무진에게 물었다.
“뭐야? 마을 밖에서 사는 거야?”
“그렇다만.”
“위험하지 않아?”
왜 마을이 존재하는가. 안전 때문이다. 괜히 몬스터 소굴인 숲속에서 자다가 의문사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혼자 살면 위험하지 않아? 불침번을 설 수도 없고.”
“그정 도야, 온 몸의 감각을 곤두세워 놓으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다.”
“간단한 거 맞지?”
“기초적인 거다만?”
“그래?”
전혀 기초적으로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그래, 저기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천무진이 머물고 있다는 동굴에 다다를 수 있었다.
동굴 안에는 모닥불 자리와 장작, 몬스터 가죽으로 만든 이불 등이 놓여 있었다.
“검소하게 사네.”
“굳이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지.”
“따라와라.”
천무진을 따라 그의 거처 근처로 향하니, 대련하기 딱 좋은 넓직한 공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오, 어떻게 찾았대?”
“수련장으로 쓸 겸 만들어놨다. 나무는 장작으로 요긴하게 쓰고 있지.”
“좋네. 그래서 대련 룰은?”
대련 룰은 간단하게 정해졌다.
장비는 사용 불가능. 검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천무진은 목검을 사용하기로 했다. 마력은 사용 가능했지만, 석찬은 강마력은 쓰지 않기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마력은 진짜 사기란 말이지….’
천무진에게는 미안하지만, 좋은 취지로 하는 대련에서 상대를 죽일 수는 없었다.
“자~! 두 사람 다 준비하시고!”
어느새 심판이 된 엘리자베스가 중간에 서서 팔을 높이 들었다.
“정정당당히 승부하세요, 시작!”
그 말과 함께 엘리자베스의 몸이 사라지고.
훙-
‘흡!’
쾅!
천무진의 목검과 석찬의 주먹이 맞부딪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