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땅, 땅-
거대한 작업실 안에서 청아한 망치질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한 곳을 향해 정확히 망치를 내리찍는 노인은 프레드릭이었다.
석찬 일행에게 받은 의뢰는 굉장했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고급 재료들 덕분에 일할 맛이 났다.
그렇게 몇시간 동안 망치질을 했을까, 그의 귓가로 소음이 들려왔다.
쿵, 쿵-
위층에서 나는 소리였다. 무언가를 찾는 듯 급하게 뛰는 발소리.
문제는 이 집이 프레드릭 혼자 사는 집이라는 것이었다.
‘침입자인가.’
그는 말없이 작업하던 망치를 내려놓고, 다른 망치를 꺼내 계단을 올랐다.
빼꼼.
계단 위로 살짝 상황을 확인해보니, 한 남자가 집 안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었다.
‘도둑이군.’
예전에도 몇번 도둑이 든 적 있었기에, 프레드릭은 조심스레 도둑의 뒤로 다가가 그의 머리 위로 망치를 겨눴다.
“변명은 나중에 듣겠다, 도둑.”
한 마디와 함께 망치를 내리찍으려는 순간.
“프레드릭?”
고개를 돌린 도둑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도둑의 생김새가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굉장히 닮았다.
“클레드?”
그의 집을 뒤지던 도둑, 클레드 퍼지는 엉망이 된 양복을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망치는 뭔가? 작업하고 있었던 건가?”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마터면 가장 친한 친구의 뒤통수를 깨버릴 뻔한 프레드릭이 황급히 망치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내 집엔 무슨 일인가. 뭘 찾고 있는 거고.”
“아, 오랜만에 제작 의뢰가 들어와서 말이지. 이 집에 두고 갔던 내 도구들이 떠올라서, 찾으려고 왔지. 시끄러웠나?”
프레드릭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클레드가 곧장 사과했다.
“미안하구만. 자네도 오랜만의 의뢰일 텐데 방해해 버렸어.”
“괜찮네, 그나저나… 벌써 거기로 간 건가?”
“그래. 놀랐지. 자네가 다시금 의뢰를 받다니.”
“받을 자격이 충분한 녀석들이야.”
그 말에 클레드가 의심하는 투로 물었다.
“호오? 자네, 정말로 내가 아는 프레드릭이 맞는가?”
“웬 시비인가?”
“반응 보면 프레드릭이 맞는데… 설마 노망?”
“이 영감탱이가….”
“허어,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왜그러실까?”
백 년이 넘는 절친답게 한동안 티격태격한 두 사람은 차를 타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네도 보았나?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자네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가?”
“그 녀석들, 정체가 뭐야?”
클레드는 석찬 일행이 제시했던 재료들을 떠올렸다.
‘블루 하이 오크의 피, 우베의 심장, 바실리스크의 정수, 스톤 골렘 엠페러의 핵….’
그 외로도 줄지어 늘어선 귀한 재료들을 보니 없던 탐구심이 마구 솟아났다.
“뭔데 그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는 거야?”
“나도 정확히는 모르네. 그런데 녀석들, 생각보다 유명했던 모양이야.”
“응?”
“올킬러라는 이명이 있다던데. 몬스터들을 모조리 한 방에 때려 죽여서 붙은 별칭이랬나. 하긴, 자네는 옛날부터 이런 거에 관심 없었지.”
그 말에 클레드가 툴툴거리며 답했다.
“모를 수도 있지. 그나저나, 그 정도면 정말 대단한 녀석들인가 보군.”
“게다가 강석찬이란 녀석이 데리고 있던 붉은 머리 여자, 다크니스 길드 지부장이야.”
“응?”
클레드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무리 세상사에 어두운 클레드라고 하더라도 다크니스 길드가 어떤 길드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탑의 뒷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거대 길드이며, 규모 하나만 따지자면 2대 길드라고 불리는 사냥꾼 길드나 심부름꾼 길드보다 거대한 최고의 길드.
그런 곳의 지부장이 동료라고?
“노예라고 하더군.”
덧붙인 말에 클레드는 놀라 뒤로 넘어갈 뻔했다.
“노예?”
“맹세인지 뭔지를 했던 모양이야.”
“허허, 보면 볼수록 놀랍군. 고맙네.”
잔을 받아든 클레드는 놀란 속을 다스리기 위해 차를 쭉 들이켰다.
“역시 맛있군. 자네가 만든 차는.”
“별말씀을….”
“그나저나….”
클레드는 빈 잔을 내려두며 입을 열었다.
“프레드릭, 자네는 진짜 녀석들이 탑을 정복할 거라고 믿는 겐가?”
클레드의 표정에 장난기는 없었다. 진지한 질문에 프레드릭도 진지하게 답했다.
“모르지. 하지만, 녀석은 지금까지 봤던 녀석들과는 달라. 다른 녀석들보다 더욱 굳건한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어. 무력도 출중하고 말이야.”
“녀석이 다른 녀석들처럼 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
“솔직히 말하면 걱정이야. 자네… 이번에도 똑같은 일을 겪으면….”
10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보내며, 클레드는 프레드릭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걱정했다.
이번에도 이전처럼 배신당한다면, 친구는 정신적으로 정말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그때 프레드릭이 작게 웃었다.
클레드는 당황해서 물었다.
“왜 웃나?”
“그냥, 갑자기 녀석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네.”
“녀석? 석찬?”
“그래.”
프레드릭이 볼 때 다른 건 몰라도 하나만은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었다.
‘강석찬이라는 녀석은 지금까지 본 녀석들 중에 가장 탑의 정상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인간이다.’
단순한 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백 년 넘게 탑에서 살아오며 쌓아온 지식으로 얻어낸 결론이다.
그의 얼굴에 묻어나오는 강한 믿음에 클레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내가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 잘해보게나. 나도 최고의 장신구를 만들 생각이니.”
“자네, 오랜만에 제 실력을 발휘하려는 건가. 그렇다면 나도 최고의 방어구를 만들어 보지.”
“기대하겠어.”
오랜만에 두 사람 사이의 경쟁심과 장인 정신이 불타올랐다.
이 모든 것이 석찬이 건네준 고오급 재료의 힘이었다.
* * *
51층.
숲속에 들어온 석찬 일행은 몬스터를 찾아 주변을 거닐고 있었다.
“어디 보자… 북서쪽 방향으로 500m 쪽에 놀 무리 다수.”
사냥에 열중인 세 사람과 만사 귀찮은 표정의 한 여인이 몬스터가 포착된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방에서 쉬고 싶은데 말이죠….”
엘리자베스의 칭얼거림에 석찬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장비를 제작하고 있다고 놀고만 있을 수는 없다.
프레드릭에게 말했던 것처럼 자신의 최종적인 목표는 결국 탑을 끝까지 오르는 것. 이를 위해선 사냥을 해 퀘스트 진행도를 꾸준히 올려놔야 했다.
[메인 퀘스트 - 51층(플레티넘)]
[강화 놀 처치 100,000 마리 (미완료)]
[검은 숲 고블린 처치 100,000 마리 (미완료)]
[……]
[검은 숲 오크 처치 10,000 마리 (미완료)]
이번 51층에서는 히든 보스나 보스를 잡으라는 말은 없었다. 대신.
‘잡아야 하는 몬스터의 수가 엄청 늘었어.’
처음 처치해야 할 몬스터의 숫자를 확인했을 때는 시스템이 메시지를 잘못 출력했나 의심했을 정도였다.
‘무슨 몬스터를 이렇게….’
아무리 탐색 마법으로 몬스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정도가 있다. 10만 단위의 몬스터를 잡으려면 대체 얼마의 시간을 소비해야 할까.
감이 전혀 오질 않았다.
‘원래 51층부터 난이도가 이렇게 급격하게 올라가는 건가?’
“크릉.”
그때 작은 울음소리와 함께 놀 무리가 출현했다. 각자 창이나 할버드를 치켜들며 석찬 일행을 위협했지만, 전혀 상대되지 않았다.
펑! 퍽!
단숨에 10마리의 놀을 처리한 석찬이 두 눈을 빛냈다.
‘신경쓰지 말자.’
고민한다고 퀘스트 내용이 바뀔 것도 아니었고, 고민할수록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몬스터를 사냥하면 될 뿐이었다.’
게다가 보스급들이 없으니 부담은 훨씬 줄어들어서 나쁜 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후딱 처리하고 쉬자.”
“네.”
“가자고.”
다음 몬스터가 있는 곳을 향해 이동하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자고 싶어… 난 사냥할 필요도 없는데. 그립다, 길드 일.’
엘리자베스는 잔뜩 불만을 가지면서도 그들을 쫄래쫄래 쫓아갔다.
* * *
천계.
에피르의 방.
“쿨럭, 쿨럭!”
기침을 할 때마다 붉은 피가 한 움큼씩 흘러나온다.
‘너무 무리했나….’
에피르는 윤기를 잃은 날개들을 어루만지며, 얼마 전에 있었던 의식을 떠올렸다.
석찬이 50층 시험을 통과했다는 보고와 함께 에피르가 진행한 의식의 내용은 바로 석찬 일행의 퀘스트를 개조하는 것이었다.
‘이번 시험으로 녀석들은 안 그래도 층수에 비해 강한 무력이 더욱 강해졌어.’
이제는 어지간한 히든 보스 몬스터로도 그들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에피르는 결국 가엔과 함께 다른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것은 바로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데 필요한 몬스터의 수를 터무니없이 늘리는 것. 아무리 녀석들이 강해도 층 전체에 퍼져 있는 몬스터들을 한 번에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놈들이 따로 텔레포트 마법 같은 걸 익힌 것도 아니고 말이지.’
에피르가 알기론 파랑 등급의 마력 운용자는 아직 텔레포트를 사용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번 의식으로 얻은 이득이 상당하다고 말이다.
물론 그 여파로 상급 천사 가엔은 상급 천사의 힘을 거의 잃었고, 천사장인 자신도 몸에 꽤나 심한 손상을 입어 기껏 회복한 몸 상태가 다시 최악이 되긴 했다.
‘그래도….’
녀석들이 탑을 오르는 데 걸리는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다.
다음 계획은 이번 의식을 통해 번 시간으로 몸을 회복한 뒤 시행하면 되는 것이다.
‘후훗.’
한껏 만족한 에피르는 방 한쪽에 놓여 있는 수정구를 불러들였다.
석찬을 감시하기 위해 직접 구해온 수정구였다.
‘어디 보자….’
의식 이후로 집중 치료와 이런저런 일이 겹쳐 50층 시험 이후의 석찬의 모습을 확인하지 못했던 그녀였기에, 석찬의 모습이 궁금했다.
‘지금쯤 엄청 고생하고 있겠지?’
예상대로 석찬 일행은 몬스터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쏘다니고 있었다.
‘그래, 이래야 내가 보람이 있지.’
옆에 일행이 하나 더 늘긴 했지만, 별로 신경쓰지는 않았다.
‘40층의 드래곤 같은 애만 아니면 되지, 뭐.’
솔직히, 40층 마을에서 드래곤과 동료가 되었을 때는 정말 식겁했다.저 녀석과 함께 탑을 오르면 어떡하지 하며 노심초사하다 드래곤은 층 이동이 제한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안심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누군지 궁금하네.’
후드로 가려져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뭐, 언젠가는 벗겠지.’
그렇게 얼마를 더 돌아다녔을까. 석찬 일행이 자리잡고 야영을 준비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후후훗.’
그들이 하루종일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 점점 기뻐졌다.
이전까지의 의식과는 달리 이번에는 원하는 만큼 효과가 발휘되고 있었다.
그렇게 기뻐하던 순간이었다.
‘후아, 지금은 벗어도 되죠? 후드.’
‘알아서 해.’
여태껏 계속 후드를 뒤집어 쓰고 있던 여인이 드디어 머리에 손을 가져다댔다.
‘음… 드디어 벗는 건가?’
하루 종일 그녀의 얼굴을 궁금해 했던 에피르가 그녀의 모습을 보기 위해 수정구 가까이 눈을 가져다댔다.
‘잠깐만… 근데 뭔가 들어본 목소린데?’
곧이어 여인이 후드를 걷어내고, 붉은 머리칼과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어?’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에피르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저 쌍년이 왜 저기에 있어?”
엘리자베스 살리나스. 에피르의 오래된 앙숙의 이름이자, 수정구에 비친 여인의 이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