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쓰러져가는 외관과는 다르게, 노인의 집은 깔끔했다.
대장간의 주인이라길래 주변이 온통 무기나 자재로 둘러싸여 있을 줄 알았지만, 필요한 가구 이외에 어떤 도구나 자재도 보이지 않았다.
“왜, 너무 누추한가?”
“아닙니다. 깔끔하시네요.”
“주변 환경이 깔끔해야 마음도, 작품도 깨끗해지는 법이지.”
“그렇군요.”
“앉아있게나. 차를 내올 터이니.”
의자가 딱 하나밖에 없었기에, 네 사람은 거실 바닥에 둘러앉은 채 차를 제조하고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들어오긴 했네요…?”
“그러게, 이번에도 쫓겨날 줄 알았는데.”
“흥흥, 들어온 건 처음이네요.”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는 세 사람과는 달리, 석찬은 정자세를 유지한 채, 노인의 몸을 유심히 지켜봤다.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노인의 몸은 대단했다.
비단 근육의 강도뿐만 아니라 균형도 잘 잡혀 있었고, 멀리서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엄청난 탄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단 증거.
게다가 손에는 수많은 굳은살과 상처가 박혀 있는 것이 딱 봐도 장인의 손임을 알 수 있었다.
‘대단하신 분이야.’
그때 석찬의 눈에 한 검이 들어왔다.
‘저건?’
모닥불 위에 전시된 장검이었다. 장검을 바라보는 석찬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엄청나다….’
비록 석찬이 검을 쓰지는 않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저 검은 명품이다.
[좋은데? 이런 실력으로 50층이라고?]
라우르도 보자마자 감탄해 칭찬 일색이었다.
‘한 번 만져보고 싶다.’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석찬의 손이 움찔하려는 순간.
“자, 여기. 받게나.”
어느새 차 다섯 잔을 쟁반 위에 올린 노인이 네 사람에게 다가왔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에….’
석찬이 충동을 참아내며 찻잔을 받아들었다.
“참고로 말하는데… 이야기만 들어볼 생각이니 기대는 하지 말게나.”
“그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차 식기 전에 들게나.”
“예.”
석찬이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맛이 좋아.’
그냥 좋은 수준이 아니었다.
이브도 나름 차를 잘 타는 편이었는데 그런 이브보다 실력이 뛰어났다.
“차 맛이 좋네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만.”
“진짜 맛있네요. 혹시 어떤 잎을 사용했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브 또한 차를 맛보더니 감탄하며 노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몇 분 동안 그녀의 질문에 답해주던 노인이 차를 들이켜며 말했다.
“궁금한 게 많은 아가씨일세.”
“앗, 죄송해요… 오랜만에 좋은 차를 마시니 조금 흥분해서….”
“뭐, 괜찮네. 조용한 거보다는 낫지.”
“그보다 어르신, 이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못 여쭈었는데…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프레드릭 레나토라고 하네. 자네는 분명 강석찬이라고 했었지.”
“맞습니다, 어르신.”
탁.
다 마신 찻잔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프레드릭은 말했다.
“그래서, 용건이 뭔가.”
이제부터 본론이다.
“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르신이 만든 장비를 원합니다.”
“진짜 그게 용건이라면, 싫네. 거절하지.”
프레드릭의 대답은 여전히 ‘NO’였다.
“혹시,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유? 더 이상 내가 너희 같은 쭉정이에게 장비를 만들어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
“쭉정이?”
[뭐라는 거야, 이 영감탱이가? 내 화신이 쭉정이면, 난 뭐 쭉정이 신이라는 거냐?]
라우르가 날뛰었지만, 석찬은 개의치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쭉정이라는 것은… 어떤 이들을 뜻하는 말입니까.”
“거 참, 별걸 다 물어보네. 탑의 정상에 오를 생각도 안 하는 녀석들이 말이야.”
‘탑의 정상에 오를 생각도 안 하는 녀석들’이라.
그 말에 석찬이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만, 어르신. 그런 게 쭉정이라면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어중간한 쭉정이는 아닙니다.”
“뭐?”
“저는 탑의 끝을 보고 싶으니까요.”
석찬의 눈이 강하게 빛났다.
‘저 눈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실만을 말할 때나 볼 수 있는 맑고 깨끗한 눈이었다.
“…진심이냐?”
“물론이죠.”
“내가 그걸 어떻게 믿고? 자네 같은 녀석을 처음 보는 줄 아나?”
프레드릭이 과거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오늘부터 나는 장비 제작을 중단한다.”
“에?”
“뭐라고요?”
아직도 경악에 찬 대장간 사람들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왜 그러십니까? 당신이 아니라면….”
“좋은 장비를 만들면 뭐하나. 제대로 쓰는 녀석이 없는데.”
프레드릭은 원했다. 자신의 장비가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를. 그들이 자신의 장비로 탑의 끝을 보기를.
정말 간절히 소망했다.
하지만 수십 년간 대장간 일을 하며 정보를 모아온 결과, 자신의 장비는 같은 인간끼리의 전쟁에서 사용되거나, 대부분의 일이 본인이 뜻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내가 장비를 제작할 이유가 없어.’
그래도 혹시 모를 의인의 등장을 기대하며 탑의 정상에 다다를 그릇인 녀석에게는 장비를 제작해 주겠다고 공표했다.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며.
하지만 돌아온 것은 역시나 실망감이었다.
“제가 꼭 탑의 끝을 보고 말겠습니다!”
“탑의 정상을 올라 당신의 염원을 해결해드리죠.”
말은 뻔지르르하게 잘하는 녀석들이었다. 물론 진심으로 탑을 오르고 싶어 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아본 결과, 모든 녀석들은 탑을 오르는 걸 중단하거나 다른 이들과 다름없이 전쟁이나 쓸데없는 짓에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인간을 믿지 않게 된 것이.
그렇게 몇십 년이 흘렀다.
* * *
프레드릭의 이야기를 들은 석찬은 굳건한 눈과 함께 답했다.
“전 다릅니다.”
“네 녀석이 그 녀석들과 다르다는 걸 어떻게 믿지? 내가 한두 번 당할 줄 아나?”
“그렇다면, 증명해 보이면 되겠습니까?”
“뭐?”
석찬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가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과는 다르다는 걸, 증명해 보이면 되겠냐고 여쭈었습니다. 어르신.”
석찬의 몸에서 푸른빛의 마력이 넘쳐 나왔다.
‘저 마력은…!’
탑에 지내온 지 백 년이 넘어가는 만큼, 프레드릭도 들은 적이 있었다.
‘마력운용자.’
탑에 극소수만 존재한다는, 자유자재로 마력을 운용하며 신출귀몰한 방식으로 싸운다는 괴물들.
‘저 녀석이…?’
“네 녀석의 그 마력… 진짜냐?”
석찬은 단박에 그가 묻는 것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입니다. 다른 것도 보여드릴까요?”
석찬의 손에서 유형화된 마력이 집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다시 석찬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저런 스킬이 있을 리는 없고… 진짜인가?’
눈빛이 조금은 풀리는 프레드릭을 보며, 석찬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좋았어, 이제….’
“하지만, 부족해.”
“응?”
프레드릭의 말에, 석찬의 입에서 맥 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르…신?”
“내가 마력운용자를 처음 보는 줄 알았나?”
보아왔던 녀석들보다 수준이 높은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문제는 강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녀석들도 똑같았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고, 재능의 한계에 부딪혀 탑을 오르는 걸 포기했지.”
“그런가요?”
하지만 프레드릭이 모르는 점이 하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석찬에게는 재능의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그가 잠재력이 무한이라는 점을 말이다.
‘그걸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렇다면 어르신, 어떻게 해야 믿으시겠습니까. 제가 어르신의 장비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이 방법밖에 없다.
“보스 몬스터를 하루만에 잡아서 대령해 보일까요? 아님 몇 달 안에 60층까지 올라가 보일까요?”
그에게 직접적으로 인정을 얻는 방법밖에는.
프레드릭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 보았다.
“왜 그러나?”
그리고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내 장비를 얻고 싶어하는 거지?”
“…….”
“탑에는 내가 만든 것보다 훨씬 좋은 장비가 널렸다네. 자네의 무력을 보아하니 육‧칠십층까지는 무난히 올라갈 것 같은데, 고층의 마을에는 더 좋은 품질과 재료를 사용하는 대장간이 즐비하다네.”
맞는 말이다. 위층에 가면 이 자 말고도 석찬이 가진 재료로 좋은 장비를 만들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당장 석찬도 그의 집에 들어오기 전, 정녕 회유가 불가능하다면 포기하고 위층에 올라가는 것을 계획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계획은 프레드릭의 검을 보고 나서 완전히 사라졌다.
석찬은 벽난로 위에 걸린 검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검. 어르신께서 만드신 거죠?”
“당연하지.”
“저런 품질의 검을 만드신 분이 계시는데, 왜 굳이 수고를 들여서 다른 곳을 갑니까?”
석찬의 진심 어린 말에 프레드릭이 움찔했다.
“그것 말고도, 당신의 손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내 손?”
프레드릭은 상처투성이의 손을 펴 보였다.
“어르신의 손. 매일 같이 대장일을 하지 않으면 그런 손이 나올 수가 없어요. 아마 수십 년간 문을 닫은 동안 혼자서라도 대장일을 계속하셨겠죠.”
“…….”
프레드릭은 말이 없었다. 맞는 말에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당신 같은 진정한 장인을 만나길 언제나 꿈꿔왔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저의 장비를 제작해 주십시오.”
석찬이 다시금 허리를 숙이며 간청했다.
“…….”
프레드릭은 말없이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했다.
‘만약 여기서도 거절하신다면 정말 어쩔 수 없다.’
“…흐음.”
그때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 들게나.”
“어르신…?”
프레드릭은 석찬의 몸을 훑더니 그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경갑, 중갑 중에 무엇을 더 선호하나?”
“무기는 뭘 쓰나? 장검? 건틀릿?”
그의 질문에 대답하며 석찬이 작게 웃었다.
“허락해주시는 겁니까?”
“이번 한 번만이다. 그리고 항상 지켜보겠어. 만약 네 녀석이 내 장비를 허튼 데 쓴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프레드릭의 몸에서 석찬을 죽일 듯한 강대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노인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석찬은 여유로운 얼굴로 답했다.
“걱정 붙들어 매십쇼.”
“방금 한 말, 기억하겠어. 좋다, 따라와!”
“감사합니다!”
완전한 허락이 떨어지자, 옆에서도 축하의 말이 들려왔다.
“축하해요!”
“자식, 부러운데?”
“저 고집불통 영감을 설득하다니. 대단하군요.”
“누가 고집불통 영감이야!”
프레드릭의 고함이 들려왔지만, 엘리자베스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말을 이었다.
“영감님, 저도 따라가도 되나요?”
“뭐?”
“제가 석찬 님의 ‘노예’라서요.”
“노…예?”
그 말에 프레드릭의 눈이 단숨에 찡그려졌다. 이내 진한 경멸의 시선이 석찬에게 쏘아졌다.
“자네….”
“아닙니다, 어르신! 사정이 있어서….”
결국 석찬은 해명하는 데 한 시간이 넘도록 진땀을 빼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