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거기 문 닫은 거로 알고 있어요.”
“응?”
엘리자베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문을 닫았다고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정말 아쉬운 순간 중 하나였죠.”
대장간.
평범한 이름과는 다르게, 그곳은 항상 장비를 구매하러 온 사람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했다.
“대장간의 명성은 대단했어요.”
50층을 넘어, 90층 마을까지 뒤져봐도 이 정도로 품질 좋은 장비를 제공하는 대장간은 몇 없었고, 상층에서도 장비를 구매하러 올 정도라고 했다.
“저희 악마들도 대장간 무기는 정말 애용했죠. 특히 주인장이 애지중지 아끼던 작품은 저의 보물 창고에 모셔두고 싶을 정도였다니까요?”
‘얼마나 대단했기에… 엘리자베스 입에서 칭찬 일색이….’
“석찬 님이 거길 알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문 닫은 지가 워낙 오래 되어가지고.”
“그래서 왜 문을 닫은 거지?”
그녀가 말한 명성대로라면, 대장간이 문을 닫을 이유가 없었다.
“80년 전, 거기 주인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제부터 탑의 정상을 노릴 만한 그릇을 지닌 자에게만 장비를 제작해 주겠다.’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폭탄 선언이었죠. 탑의 정상을 노릴 만한 자에게만 장비를 만들어주겠다니.”
이후로 아무리 큰돈을 들고 찾아와도, 대장간의 주인은 장비 제작은커녕 사람들을 문전 박대 하기 바빴다고 한다.
“5년 정도는 사람들도 계속 대장간을 찾아갔어요. 대충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탑의 유명 인사들도 포함해서 말이죠.”
개중에서는 90층대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유명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주인장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어요.”
웬만한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간 후, 대장간을 향한 발걸음은 점점 줄었다고 한다.
“3년 정도가 더 지나자 대장간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아예 잊혔죠. 아마 지금 와서는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상당할 거예요.”
“그런가….”
잠시만 그러면 G는 왜 수십 년 전 문을 닫은 대장간을 추천했단 말인가?
의문이 피어오르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어요.”
“내가? 뭘?”
“뭐긴 뭐겠어요. 그 양반한테서 무기를 뜯어내는 거죠.”
“내가 어떻게? 90층의 대단한 인간들도 안 됐다면서?”
[띨빵아.]
그때 라우르가 석찬의 머리를 내리쳤다. 물론 영혼이라 타격은 없었지만, 기분이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뭐가요?’
[아까 저 악마가 말했잖아? 그 ‘대장간’이란 곳의 주인장이 내건 조건.]
‘조건? 분명… 아.’
대장간의 주인이 내건 조건.
탑의 정상을 노릴 만한 그릇을 지닌 자.
“엘리가 볼 때는 내가 ‘그릇을 지난 자’라고 생각해?”
“물론이죠.”
답은 옆에 있는 이브에게서 나왔다.
“석찬 오빠 아니면 누가 탑을 끝까지 오를 수 있겠어요?”
이제 고작 50층에 도달했을 뿐이지만, 그의 무력은 어지간한 강자도 혀를 내두를 정도이며, 동층 대비 수십 배는 강력했다.
엘리자베스도 웃으며 말했다.
“꼬맹이 말이 맞아요. 당신이 아니면 누구도 그에게서 장비를 받아낼 수 없을 거예요.”
“잠깐 꼬맹이 아니라고요, 할망구야.”
“젖비린내도 안 가신 꼬마 아가씨가 하는 말이라 하나도 안 들리는걸?”
두 여인의 싸움이 또다시 시동 걸리려 했다.
“자자, 두 사람 다 그….”
진현이 두 사람을 제지하려 했지만.
“조용히 계세요.”
“가줄래?”
“넵….”
두 사람에게서 뿜어 나오는 거대한 살기에 바로 꼬리를 내리며 물러섰다.
“두 사람 다 멈추고. 건물 또 부술 거야?”
안 그래도 엘리자베스가 부순 벽 때문에 골치 아픈데 여기서 더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쳇.”
혀를 찬 엘리자베스가 먼저 기운을 가라앉혔다.
“엘리, 혹시 대장간 주인장분이 어디 계신지 알아볼 수 있어?”
“그 점은 걱정하지 말아요.”
엘리자베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검은 구멍이 생겨났다.
아공간 마법이었다.
‘역시 대단해.’
아직 석찬은 물론 이브도 아공간 마법의 ‘ㅇ’자도 꺼내기 힘들 정도로 아공간 마법은 고급 마법이었다.
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펼치는 엘리자베스를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감사합니다, 라우르.’
[응?]
‘덕분에 엄청난 전력을 손에 넣은 것 같아요.’
[하! 알겠으면 조금 더 날 공경하도록 해라.]
‘물론이죠.’
아공간 속을 잠시 뒤적이던 엘리자베스는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여기요.”
그녀가 건넨 쪽지에는 한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건?”
“주인장이 사는 곳 주소예요.”
이런 것까지 가지고 있다니.
“대단하네.”
“별말씀을. 그 양반의 명성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예요. 아마 다른 길드도 다 하나씩 가지고 있을걸요?”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대장간 주인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치솟았다.
“주소도 있는데 언제 출발하실 거예요?”
석찬은 이미 어둑어둑해진 밤하늘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최대한 빨리 방문할 생각이었다.
“좋아요.”
“그래.”
“네~.”
“좋아, 그럼 내일 동트기 전에 여관 앞에서 모이자.”
어두울 때 출발해야 다른 이들의 시선이 조금은 분산되리라.
여기까지 모두 동의하자 길었던 대화는 끝이 났다.
“안 가고 뭐하는 거예요?”
“석찬 님 옆에서 자려고 한다만….”
“에?”
“노예가 주인 곁에서 자려고 하는데 무슨 상관이지, 꼬마 아가씨?”
“좋은 말 할 때 본인 방에서 주무시지 그래요? 망할 할망구.”
“이참에 그 거친 입이나 손봐줘야겠네?”
“두 사람 다… 내 방에서는 싸우지 말아줄래?”
“그치만, 이 할망구가!”
“엘리도 나가줘. 혼자 자고 싶으니까.”
“잡은 방이 없는데요?”
“이 층 전체가 우리 것이니까, 아무 방이나 골라잡고 자.”
“쳇.”
잠시 소란이 일기는 했지만, 그날 밤은 무사히 지나갔다.
* * *
다음날 아침.
다른 이들보다 일찍 여관 앞으로 나온 석찬은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득 들이켰다.
“후아.”
폐를 가득 채우는 찬 공기 덕분인지 약간은 몽롱했던 기운이 싹 가시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몸을 풀고 있으니,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뭐야, 벌써 다 나왔네? 쏘리요.”
마지막으로 진현까지 도착하고, 네 사람은 쪽지에 적힌 주소로 향했다.
‘여기인가….’
마을 가장 외곽에 위치한 낡은 집 앞에 도착한 석찬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안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쇼.”
잠시 후 한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묵직하고 오랜 관록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안녕하십니까. 강석찬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나누고 싶어 찾아왔는데요.”
“…….”
노인은 말이 없었다.
“저기….”
끼이익-
그때 문이 열리며 건장한 체격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코와 턱 밑에 난 지저분한 수염과 깎지 않은 머리와는 다르게, 낡은 천 옷 위로 드러나는 근육이 상당했다.
“우와. 근육 무슨 일….”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상체 근육에 진현이 눈을 반짝였다.
“무슨 일로 왔소. 나는 그대들을 모른다만?”
“대장간의 주인장님 맞으시죠?”
“나가시오.”
석찬의 질문에 노인의 축객령이 떨어졌다.
“조금만 제 말을….”
“나가라고 했소이다. 이 자리에서 경비를 부를 수도 있소.”
강경한 노인의 태도에 석찬 일행은 집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덜컥.
강하게 잠긴 문 앞에서 한참을 방황한 석찬 일행은, 결국 아무런 소득을 못 보고 돌아와야 했다.
방에 도착한 석찬은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어떡하죠?”
“…….”
석찬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쫓겨날 줄은 몰랐다.
“흐음….”
“어떻게 해야 하지….”
세 사람이 향후 계획에 대해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저기….”
가만히 있던 진현이 조심스레 손을 들며 말했다.
“석찬아. 어렵게 생각할 거 있냐?”
“응?”
“안 되면 어떻게 해야겠어? 다시 찾아가면 되지.”
“에?”
“그게 무슨.”
이브와 엘리자베스가 동시에 의문을 표했다.
“혹시 두 사람 다, ‘삼고초려’라는 말 알아요?”
“삼고초려?”
두 사람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가 살던 행성에 있던 말인데요. 어떤 뜻이냐면….”
삼고초려(三顧草廬)
인재를 들이기 위해서는 참을성 있게 노력하거나 마음을 써야 한다는 뜻을 가진 사자성어이다.
삼국지에서 유비‧관우‧장비가 제갈량을 군사로 영입하기 위해 그의 집에 세 번 찾아간 것에서 유래된 말이다.
“한 번 안 되면 두 번, 그게 안 되면 세 번 가면 되는 거지. 그러다 보면 그 할아버지도 귀찮아서 한 번쯤은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실까?”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브와 엘리자베스도 설명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웬일이래요, 진현 오빠답지 않게.”
“똑똑한데?”
“헤헤….”
두 미인의 칭찬에 진현이 정신을 못 차리고 헤벌레 웃었다.
“좋아, 그럼 앞으로 매일 아침 그분의 집에 찾아가는 걸로 하자. 어때?”
“좋아요.”
“좋았으!”
그렇게 대장간 주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첫째 날.
“돌아가시오.”
소득은 없었다.
둘째 날.
“돌아가시오.”
여전히 소득은 없었다.
셋째 날.
“또 왔나… 꺼지시오.”
노인의 입이 조금 거칠어졌지만, 석찬 일행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날이 더 지나….
노인의 집에 찾아간 지 열흘째 되던 날.
“또 너희들이냐… 왜 계속 찾아오는 거지?”
처음으로 노인이 나가라, 꺼져라 말고 다른 말을 꺼냈다.
‘지금이다. 지금밖에 없어!’
다시는 없을 기회라는 것을 직감한 석찬이 빠르게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첫날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이름은 강석찬이라고 합니다.”
“강석찬? 그럼 네 녀석이 올킬러냐?”
자신의 이명을 아는 노인의 모습에 석찬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맞습니다, 어르신. 어르신께서 제작하신 장비를 받고 싶어 염치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내 장비를?”
“예. 제가 탑의 정상을 볼 그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르신의 장비와 함께라면 탑의 정상을 밟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반은 진심이고, 반은 아부이다.
아직 그가 만든 장비를 본 적은 없지만, 엘리자베스의 극찬이 끊임없이 쏟아진 그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적었다.
“부탁드립니다.”
석찬이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간청했다.
“…….”
잠시 그를 쳐다보던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실패인가.’
좌절하려는 순간이었다.
“뭐 하나, 찬바람 들어오는데 빨리 들어와라.”
노인의 입이 열렸고, 석찬의 입가에 큰 미소가 그어졌다.
“감사합니다!”
삼고초려를 넘어선 십고초려의 위력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