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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잠재력 무한-105화 (105/200)

제105화

“뭡니…까.”

긴장한 그의 대답에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직 답을 못 들어서 말이야.”

“뭐를요?”

“사과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대화에 휩쓸려 사과에 대한 답을 하지 못했다.

석찬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용서 안 할 겁니다.”

“응?”

“이유가 어찌됐든 당신은 절 죽이려 하셨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치. 호구도 아니고, 그걸 누가 용서해줘?]

엘리자베스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어… 그럼 어떻게 하면 내 사과를 받아줄 거야?”

“안 받아준다니까요?”

완강한 거절 의사에 엘리자베스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낭패다.’

석찬과 라우르의 예상대로, 엘리자베스는 그가 라우르의 화신이 되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석찬과 관계를 틀고 싶지는 않았다.

‘투신 라우르는 과거부터 전설이었던 존재.’

그의 화신인 자와 적이 된다는 건 악수 중의 악수라고 볼 수 있었다.

‘젠장.’

그 점 말고도 엘리자베스는 석찬이 마음에 들었다.

출중한 재능, 훤칠한 키와 외모, 인간치고는 강한 무력까지. 라우르의 화신이라는 점을 빼도 그는 훌륭한 인간이었다.

결국 엘리자베스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대신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게. 뭐든 말만 해. 네가 부탁한다면 다크니스 길드 차원에서 대대적인 지원이 내려올 거야. 내 보물 창고도 마음껏 이용해도 좋아. 그러니까… 내 사과를 받아줘.”

상당히 파격적이었지만 석찬의 마음은 여전했다.

“아….”

그녀의 사과를 다시금 거절하려는 순간이었다.

[잠깐.]

라우르가 그를 멈춰 세웠다.

‘왜요?’

[석찬아. 일단 사과를 받아줘라.]

‘예?’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는 소리인가. 아까 사과를 거절할 때는 자기도 좋다고 맞장구쳐 놓고, 지금와서 말을 번복한다고?

[날 믿고 사과를 받아.]

장난이라고 보기에는 라우르의 얼굴이 진지했다.

‘뭐, 그렇다면.’

석찬은 목을 가다듬은 채 말했다.

“좋아요. 받겠습니다. 당신의 사과.”

“진짜?”

“에?”

이번엔 이브 쪽에서 의문부호가 날아왔다.

그녀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보내며, 라우르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요? 당신 말대로 사과는 받았어요.’

[좋아. 이제….]

라우르가 작전을 설명했다. 들어보니 나름 신빙성이 있는 작전이었다.

‘만약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어쩌면 예상치 못한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뭔데?”

엘리자베스가 반색하며 물었다.

“우선 당신이 말했죠. 제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신다고.”

“그래 그래. 난 같은 말 번복하지 않아.”

“맹세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제 부탁이 무엇이든 들어주신다고.”

‘맹세까지?’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급한 쪽은 엘리자베스. 결국 엘리자베스는 존재에 대한 맹세를 진행했다.

“자, 됐지?”

[걸려들었어.]

그 모습에 라우르가 씨익 웃었다.

“좋았어요. 그렇다면 원하는 걸 말하죠.”

곧이어 석찬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저는 당신을 원합니다.”

“?”

“?”

그 말에 두 여인이 동시에 얼음장이 되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석찬은 최대한 근엄한 표정과 목소리를 유지한 채 다시금 요구 조건을 말했다.

“말했잖습니까. 당신을 원한다고.”

서늘한 공기가 세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

“오호라. 꽤나 재밌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군요.”

“오셨어요?”

어느새 다가온 G가 환하게 웃으며 석찬을 쳐다봤다.

“그 고자 석찬 씨가 이렇게 강력하게 대시하다니… 몇 년간 당신을 지켜본 저로서는 정말 감격스럽네요. 그나저나 옆에 숙녀분이 걱정이네요.”

G는 얼굴이 새빨개진 이브를 보며 작게 웃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역시 한 번 고자는 영원한 고자인가요. 아직도 모를 리가 없는데.”

“…….”

“그나저나 엘리자베스. 아직도 그런 옷 좋아하십니까? 어떻게 사람 취향이 삼천 년 동안 한번도 안 바뀌지? 사람이 아니라 그런가….”

어느새 엘리자베스 옆으로 자리를 옮긴 G는 그녀가 입은 붉은 드레스를 이곳저곳에서 훑어보았다.

“시비 걸지 말고 꺼져, G.”

“말씀이 심하시네.”

시무룩해진 G가 다시 석찬 뒤로 넘어갔다.

“그래서 방금 한 말씀의 뭡니까? 사귀자는 뜻은 아닐거고.”

“엘리자베스. 당신이 가진 것 중에 노예 계약서 있죠?”

“어? 응. 물론이지. 지금도 가지고 있는걸?”

[오, 좋군.]

“그렇다면 노예 계약서에 대고 맹세해 주시죠. 앞으로 당신은 저의 ‘종’이 된다고.”

종. 다른 말로 하면 노예.

그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진한 당황이 묻어났다.

“무슨 소리야? 종이라니….”

“말하셨잖아요. 뭐든 들어주신다고.”

게다가 ‘존재의 맹세’라는 탑의 최고 맹세까지 함께하고 있으니, 이 약속은 절대 깰 수 없다.

“진짜야…? 다른 건 없어?”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없어요. 자 빨리 계약서 꺼내세요. 가지고 계시다면서요?”

석찬이 빙긋 웃으며 펜을 꺼내 들었다.

[넌 뒤졌다! 크하하! 공작급 악마가 노예라니! 상상도 못 했을 거야, 크하하!]

뒤에서 라우르가 배가 터지도록 웃고 있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웃을 수 없었다.

‘낭패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설마 그런 조건을 걸다니.

“호오?”

G 또한 의외라는 듯 석찬을 쳐다보았다.

“빨리 계약서 주시죠.”

솔직히 말해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탑에 있는 한 ‘존재의 맹세’는 공작급 악마인 그녀 앞에서도 절대적인 강제력을 부여했으니 말이다.

부들부들.

엘리자베스가 떨리는 손으로 꺼낸 노예 계약서에 석찬이 갑이라 적힌 공란에 자신의 이름을, 그리고 을 ‧ 노예라 적힌 공란에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자, 사인하세요.”

까드득-

사인을 하는 데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파앗-

계약서 작성이 완료되자, 효력이 발생했음을 나타내는 붉은빛이 엘리자베스를 감쌌다.

“하아….”

목에 채워진 검은 초커가 그녀가 석찬의 노예가 되었음을 증명했다.

“어떻게… 내가 당했네. 아니지, 제가 당했네요, 주인님.”

이제 그녀는 석찬의 노예이니 더 이상 말을 높일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노예라고 해도 별로 부려 먹을 생각은 없어. 그리고 주인님이라고 하지 마. 명령이야.”

아무래도 ‘주인님’이라는 단어의 어감부터가 듣는 데 상당히 거북했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알아서 해. 대신 주인님은 안 돼.”

“알겠습니다. 그럼, 석찬 님이라고 하죠.”

예전에 계약 관계였을 때 불렸던 호칭과 같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나저나 놀랐어요. 석찬 님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사실 라우르의 머리에서 튀어나온 작전이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너도 좋을 거야. 공작급 악마를 부하로 두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이런 걸 실제로 볼 줄이야.]

“뭐 어찌되었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석찬 님.”

엘리자베스는 예를 다해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래.”

“흐아암.”

그때 이브의 옆방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마구 헝클어진 흑발을 사정없이 문지르는 남자는 진현이었다.

“어, 석찬아. 왜 나와….”

진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앞에 무릎 꿇은 엘리자베스와 옆에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이브, 그리고.

“어이구, 이거이거.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진현 님 아닙니까?”

어느새 다가와 몸을 훑고 있는 G 때문이었다.

“어?”

비몽사몽했던 정신이 순식간에 말끔해졌다.

“뭐, 뭐가 어떻게 된 일이야?”

기절초풍한 진현이 뒤로 후다닥 물러섰다.

“아, 그게 말이지.”

아무래도 설명이 길어질 것 같았다.

* * *

“에?”

“뭐?”

“으잉?”

설명이 이어질수록 진현의 입에서 보다 다양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층 전체를 대여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소란에 다른 사람들을 전부 깨울 뻔했다. 그랬다면 일이 더욱 복잡해졌으리라.

모든 설명이 끝난 후, 진현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네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미쳤네… 엘리자베스…님이라고 했던가요?”

“네. 친구분도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건 좀… 저는 계약서 쓴 것도 없고, 저보다 나이도 많으신데.”

“그러면 누나라고 불러도 좋고요.”

“예?”

그 말에 반응한 건 G였다.

“그게 무슨 개똥 씹어 먹는 소립니까?”

“왜?”

“진현 님, 잘 들으십시오. 엘리자베스 저 여자 말입니다. 나이가 만….”

퍽!

그때 엘리자베스의 검은 마력구가 G의 입을 강타했고, 그대로 벽을 뚫고 날아간 G의 몸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마.”

그녀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끄윽. 아프네요.”

피를 닦아내며 일어선 G가 절뚝이며 자리로 복귀했다.

“숙녀의 나이를 함부로 발설하려고 한 벌이야.”

“하하….”

진현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 * *

상처를 어느 정도 회복한 G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시간이 늦었다며 변명거리니 뭐니 하는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사라졌고, 남은 네 사람은 석찬의 방에 모여 앉았다.

“…….”

이브는 석찬 옆에 착 달라붙어 앉은 엘리자베스를 무섭게 노려봤다.

“어머? 왜 그래요? 노예가 주인 옆에 꼭 붙어 있어야 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만?”

“그래요? 잘났네요.”

“벌써부터 이 언니에게 밀리면 나중에 어떡하려고 그래요?”

“누가 언니야? 이 할망구가.”

“할망구? 어린 친구가 입이 험하네?”

“자자, 두 사람 다 그만하고.”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겨우 떼어 놓은 석찬은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엘리자베스.”

“엘리라고 부르셔도 돼요.”

“엘리?”

“그분만이 불러주시던 애칭인데, 뭐 당신이라면 상관없어요.”

“그럼 엘리. 혹시 ‘대장간’이라는 곳에 관해 아는 거 있어?”

대장간. 50층 시험 첫번째 퀘스트가 끝난 후, G가 50층 마을에 가면 꼭 찾아보라고 했던 대장간의 이름이었다.

그의 말대로 50층 마을에 온 뒤로 대장간을 찾아 한참을 헤맸지만, 어디에서도 대장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었고 말이야.’

G를 다시 만나면 꼭 물어보리라 다짐했는데, 이번 만남에서는 더 큰일이 있어서 까먹고 말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알까?’

수천 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온 엘리자베스이기 때문에 물어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장간이라면… 알고 있긴 해요.”

그 말에 석찬의 입에 단박에 미소가 걸렸다.

“진짜?”

며칠을 헤매도 찾을 수 없던 곳이다. 대체 어떤 곳이길래 그렇게 찾기 어렵단 말인가.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요.”

“문제?”

엘리자베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문제라 하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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