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석찬은 무한의 잠재력에 관한 사실을 깔끔하게 털어놓았다.
중간에 진현도 난입해 같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 된 거야.”
“잠시만요. 그러니까, 석찬 오빠의 잠재력이 무한이라는 거죠?”
“응.”
“마력 회복 속도가 말도 안되는 것도 사실 그것과 관련된 거고?”
“그렇지.”
“하아….”
설명을 들은 이브는 물론 진현까지 얼빠진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대단한 분인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러니까 말이다.”
“진현 오빠는 몰랐어요? 친구라면서.”
“아니, 쟤가 안 알려 주는데 어떻게 알아?”
그러고 보니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변했다.
“둘이 말 놨어?”
“아, 네.”
계기는 지난 40층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며칠 동안 단둘이 석찬을 찾아 헤매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전보다 더 친해졌고.
“이번에 오빠 기다리면서 아예 말 놓기로 했어요.”
“이브는 여전히 존댓말 하지만 말이야. 하하!”
뭐, 나쁜 건 아니다. 두 사람 사이가 그만큼 더 친밀해졌다는 것이니, 좋은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뭐가 좋아. 저러다 저 새끼가 채가면 어쩌려고.]
‘응? 뭘 채가요?’
석찬의 물음에 라우르가 경멸의 시선과 함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에효. 고자 새끼. 알아서 해라.]
“?”
“왜요?”
“어… 별거 아니야.”
“그나저나, 진짜 부럽다. 마력 회복 속도가 무한. 이제 이해가 가네요. 어떻게 상대가 마법을 수십 발씩 쏠 수 있었는지 말이죠.”
“나도 놀랐어. 설마 그렇게까지 가능할지는 몰랐거든.”
“이론상 가능하죠. 하지만….”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론상이에요. 마법을 사용하는 데 정신력이 소모되는 건 알죠?”
“물론이지.”
마력은 마법을 사용할 때 소모되는 에너지일 뿐, 원하는 대로 마력을 다루려면 그만큼 정신력이 필요했다.
“잠재력이 무한이라고 정신력이 무한인 건 아니니까요. 수련해서 정신력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어요.”
“정신력을 강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이브는 정신력을 늘리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반복 사용이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긴 해요. 하지만 다른 방법에 비하면 성장 속도가 더뎌요.”
“그럼 다른 방법은 뭔데?”
이브는 살짝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세뇌 같은 정신 공격 마법에 저항하는 거예요. 물론 더욱 강한 마법에 저항할수록 성장폭도 넓어져요. 하지만… 너무 위험해요.”
당연한 말이었다. 정신 공격 마법 자체가 가장 위험한 공격계 마법 중 하나로 꼽히며 저항하는 것도 어지간한 초인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그리고 지금 추가할 수도 없는 방법이고요.”
“그치.”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반복해서 사용할 수밖에.’
[진짜 마법 수련도 하려고?]
‘네.’
석찬의 대답에 라우르는 가장 먼저 우려를 표했다.
[괜찮겠냐? 지금 무력 하나 잡기도 힘든데….]
‘괜찮아요.’
안 괜찮아도 괜찮게 만들면 그만이다.
[뭐, 네 생각이 그렇다면, 나도 최대한 도와주마.]
‘라우르, 마법도 알아요?’
그의 물음에 라우르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물론이지. 투신이라고 불릴 정도면 전투에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야.]
‘헐, 그럼 왜 지금까지 안 알려준 거예요. 마법?’
[그야 먼저 기본적인 능력을 완성하고 차근차근 알려주려고 했지. 이브가 마법사 역할을 해줘서 조금 미룬 것도 있고 말이야.]
그렇게 변명하는 라우르를 보니 또다른 의문이 들었다.
‘아니, 일점폭파술이랑 파괴는 뭔데요, 그럼. 설마 그게 기본이라고 하는 건 아니겠죠?’
두 기술 다 습득하는 데까지 꽤나 시간이 들었던 고등 기술이었다.
라우르는 하늘을 쳐다보며 모르쇠로 일관할 뿐이었다.
[그건 네가 생각보다 잘 따라오니까~. 곧 마법도 가르치려고 했어, 임마!]
‘그러셨구나….’
믿음이 가지는 않았지만 뭐, 무려 신님이 하신 말씀이니 믿기로 했다.
[개기냐, 지금?]
‘에이, 아닙니다.’
[개기면서 아니긴 무슨.]
‘큭큭.’
허공을 향해 웃는 석찬을 보며, 진현과 이브는 영문 모를 상황에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 * *
50층 마을에 도착한 지 어느덧 나흘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석찬은 50층 제일의 유명인 반열에 올라 있었다.
이브, 진현과 함께 천재 트리오로 불리며 활약해 오던 명성이 이번 시험의 통과로 더욱 커진 탓이었다.
“어이, 저기 올킬러다!”
그 여파는 수년 전 사냥꾼 길드 지부장 올레드 그리젤이나 포이그 레바돈을 처치했을 때보다 더욱 컸으니, 석찬은 밖조차 잘 나가지 못했다.
“허억. 힘들다.”
간단한 식료품을 사러 갔다 오는 데 30분 정도의 시간이 소모되었다. 보통 식료품점에 다녀오는 데 왕복 5분이면 충분하다는 걸 고려하면 정말 피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서 이브가 밖을 안 나왔던 건가.’
오해를 푼 후, 이브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이브, 식사는 어떻게 하고 있었어? 아까 직원분이 나흘 동안 방에서 아예 안 나왔다고 했는데.’
‘아 그거. 밖이 너무 복잡해서, 그냥 아공간 주머니에 있는 식량으로 버티고 있었어요.’
아공간 주머니 안에 있는 식량이라고 해봐야 말린 육포나 빵 정도가 전부이다. 밖에 더 맛있는 음식도 많은데 그런 거만 먹으면 안 질리나 생각해 봤지만.
‘저 인파를 생각하면 현명한 거였어.’
음식을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할까 고민해 봤지만, 이미 한 번 시도해봤고, 방이 무너질 뻔했다는 이브의 말에 깔끔하게 포기했다.
“후….”
사온 재료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방에서 쉬고 있는 와중이었다.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진현인가?’
“누구세요?”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누구지?’
석찬은 경계하며 천천히 문 앞에 섰다.
‘분명 인기척은 있다.’
그런데 아무런 대답도 없다는 건.
[…….]
라우르도 알 수 없는 얼굴로 문을 노려봤다.
끼이익.
그때, 문이 열렸다.
‘어?’
분명 잠겨 있었는데?
알 수 없는 상황에 석찬이 뒤로 물러나며 가드를 올렸다.
‘뭐지?’
문이 완전히 열리고,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후드로 완전히 모습을 가리고 있었지만, 굴곡진 몸매와 고혹적인 입술로 보아 상당한 미인인 듯 했다.
‘왜 갑자기 쳐들어온 거지?’
석찬은 경계를 유지한 채 여인을 노려봤다.
‘상당한 강자다.’
문의 잠금을 가볍게 해제한 것도 그렇고, 느껴지는 마력이 굉장했다. 얼핏 봐도 마력 스탯이 600을 넘어선 자신보다도 많아 보였다.
그런데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이 마력… 이 느낌. 잠깐만.’
분명 어디선가 느껴본 것이었다. 눈앞의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을.
‘분명, 그래.’
곧이어 한 인물을 특정한 석찬이 라우르를 흘끔했다.
[음….]
라우르 또한 누군가를 떠올렸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탁, 탁.
석찬은 경계를 푼 채 천천히 여인에게 걸어갔다.
분명 그녀가 자신이 아는 그녀라면 안전할 것이다.
탁.
예상대로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여인은 미동도 않은 채 지그시 석찬의 눈을 쳐다봤다.
후드 안에서 빛나는 붉은색의 눈. 이것을 보자 확신이 섰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엘리자베스.”
그의 물음에 여인, 엘리자베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떻게, 생각보다 일찍 알아보네? 조금은 더 놀려주려고 했는데 말이지.”
후드를 걷어내자, 눈동자만큼이나 붉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거대 암흑 길드인 다크니스 길드의 지부장 중 하나인 엘리자베스 살리나스였다.
과거, 포이그 레바돈과의 대결에서 자신의 후원자가 되어주고, 결정적으로 라우르의 두 번째 영혼 조각을 얻는 데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은 아닌가.’
석찬은 엘리자베스의 붉은 눈을 바라봤다. 이 눈, 50층 시험에서도 본 적이 있다.
‘최하급 악마.’
첫 번째 시험의 보스로 등장했던 말도 안 되는 괴물. 녀석과 비슷한 느낌의 눈과 마력이 엘리자베스에게서 느껴졌다.
[그래. 악마였어. 어디서 느낀 기운인가 했더니.]
라우르도 과거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아 개운한지 날뛰며 말했다.
“뭘 그렇게 쳐다봐? 내 눈에 뭐가 묻었나?”
“별건 아닙니다. 그냥 오랜만에 뵀더니 더 예뻐지신 것 같아서.”
“입에 발린 소리는 그만하지? 그 뜻이 아니잖아?”
그 순간, 석찬의 정신이 아찔해졌다.
턱.
무릎 꿇은 석찬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큭. 이건.’
[조심해, 매혹이다.]
마력을 끌어올린 석찬이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게 본모습이십니까.”
그녀의 머리 위로 두 개의 긴 뿔이 생겨나 있었다.
“혹시, 악마이십니까.”
“응. 한 번 본 거로 깨닫다니. 기특한걸?”
그녀의 등 뒤에서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어때?”
아찔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석찬은 공포를 느꼈다.
‘그때는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과거 처음 엘리자베스를 만났을 때 느꼈던 기운은 엄청났다. 그때만 해도 그녀의 기운은 웬만한 50층 주민들보다 강했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기운은 달랐다. 지금의 그녀는 50층을 홀로 멸망시킬 수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나한테….’
그녀와의 인연은 20층에서 있었던 후원 일이 전부다.
‘그때 결과도 좋았고, 원한 따위를 가질 일은 없었을 텐데.’
그때 엘리자베스가 입을 열었다.
“궁금할 거야. 내가 왜 갑자기 네 앞에 찾아왔는지. 그리고 왜 널 공격하려하는 지도.”
‘존나게 궁금합니다.’
“미안하지만 말해줄 수는 없단다. 그저, 무슨 이유가 있다고만 알아주렴.”
‘젠장, 그럼 어쩌라는 거야?’
“이해해주렴.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넌 좋은 인간이니까….”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엘리자베스는 슬픈 얼굴로 석찬을 내려다봤다.
[…….]
라우르는 말없이 엘리자베스를 노려봤다.
[강신할까?]
짧은 물음에 석찬이 고개를 저었다.
‘강신은 안 돼요.’
[왜? 너도 알잖아. 저 녀석. 최하급 악마 녀석보다 훨씬 강해. 내가 볼 때는 상급? 최상급? 아니, 그것도 넘어갈 수 있어. 강신해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할 정도라고.]
라우르의 입에서 처음으로 약한 소리가 나왔다.
‘알아요. 하지만….’
지금 강신을 사용한다면 파랑 등급이 된 이후 더욱 강해진 신체 능력으로 라우르의 힘을 더욱 많이 재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라우르와 엘리자베스가 전력으로 싸우면….’
주변이 초토화될 뿐만 아니라, 50층 마을 전체가 멸망할 수도 있다.
‘특히 일점폭파술이나 파괴를 쓴다면….’
석찬은 최하급 악마를 상대할 때 라우르가 사용했던 일점폭파술의 위력을 되새겼다.
그때 옆에서 또 다른 인기척이 생겨났다.
“당… 신은?”
익숙하면서도 그리 보고싶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이야, 이거. 오랜만입니다. 엘리자베스.”
“너는? 왜 여기에?”
“이거이거, 석찬 님의 동향을 살피다 익숙한 분이 보여서요.”
노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작게 미소 짓는.
“오랜만입니다. 3,000년 만이죠?”
양복이 잘 어울리는 미남자.
“그럼,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해주셔 볼까요?”
석찬의 든든한 조력자 중 하나, 안내자 G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