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우우웅-
공기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쿠궁.
대련장이 흔들렸다.
돌 부스러기가 또 다른 석찬의 머리에 떨어졌다.
머리가 점점 잿빛이 되었지만, 또 다른 석찬은 전혀 신경쓰지 못했다.
“하하, 이 와중에 돌파라니.”
그는 온 신경을 집중 중인 석찬의 주변에 보호막을 두른 채 그를 관찰했다.
“나지만 정말 신기한 녀석이군.”
비록 시험으로 인해 임의로 생성된 것이라 해도 또 다른 석찬은 엄연히 석찬과 같은 존재였다.
같은 잠재력, 같은 신체 능력, 같은 장비 등, 오직 라우르의 존재 여부 하나만 빼면 그는 석찬과 동일했다.
그렇기에 또 다른 석찬은 생각했다.
눈앞의 녀석은 말도 안 되는 괴물 새끼라고.
잠재력 무한도 그렇고 층의 평균을 훨씬 웃도는 신체 능력, 그리고 강마력이라는 어이없는 기술까지.
무엇 하나 범상치 않은 것이 없었다.
이제는 전투 중에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경지로 돌파까지 한다.
“미친놈.”
기운이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석찬을 보며 또 다른 석찬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나는 곧 퇴장이겠구만.”
‘이 몸, 개쩔었는데 말이지. 아쉽구만.’
그로부터 정확히 하루 뒤, 대련장이 무너져 내렸다.
원인은 돌파로 인한 폭발.
예전부터 돌파할 때마다 뭘 많이 부숴 먹었던 석찬이지만, 월드컵 경기장만 한 대련장이 통째로 무너져 내린 것을 보며 침을 삼켰다.
‘엄청나다.’
눈앞에서 일어난 폭발도 그러고, 지금 몸 안에서 느껴지는 기운도 마찬가지였다.
손을 피자, 푸른빛의 마력이 손바닥 위로 둥실둥실 맴돌았다.
‘마력이 더 깨끗해졌어.’
게다가 돌파 영향으로 신체 능력을 포함해 마력 회로도 더욱 강해졌다.
[힘 : 445 + 89]
[민첩 : 440 + 88]
[체력 : 440 + 110]
[내구 : 455 + 131.75]
[마력 : 512 + 92.4]
스탯창을 보니 모든 스테이터스가 50씩 올라 있었다.
‘어쩐지 몸이 가볍더라니.’
엄청나다. 레벨로 따지자면 50레벨의 효과. 모든 스탯이 500을 초과하고 마력은 무려 600을 넘어섰다.
넘쳐흐르는 힘을 느끼며, 석찬은 저 멀리서 미소 짓고 있는 또 다른 자신에게로 다가갔다.
“어떠냐?”
“엄청나.”
“그러겠지. 지금의 너는 확실하게 네 녀석의 한계를 돌파했으니 말이야. 아마 곧 여기서 나가게 되겠지.”
그 말에 석찬이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만, 한계를 돌파했다고?”
분명 마력 저장소를 돌파하긴 했다만, 그걸로 된 거라고?
“너는 분명 너를 쓰러트려야 한다고….”
“깜빡하고 설명하지 않았군.”
또 다른 석찬은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모든 것에는 한계가 존재해.”
신체 능력, 두뇌, 노력, 재능 등.
“마력 저장소도 엄연히 ‘한계’의 범주에 포함된다. 넌 방금 너의 한계였던 초록 등급의 마력 저장소를 파랑 등급으로 만들었으니 한계를 돌파한 게 맞는 거지.”
“그런가?”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것은 시험을 클리어하는 한 가지의 조건일 뿐이다. 만약 진짜로 날 이기는 게 유일한 조건이었으면 시스템이 뭉뚱그려서 한계를 돌파하라고 하진 않았겠지.”
“그런 거였군.”
생각해보니 그랬다.
지금까지 시스템은 퀘스트를 부여할 때 몬스터를 몇 마리 이상 잡아라, 뭘 얼마나 모아라 등등 명확한 목표를 표기했다.
‘조건이 여러 개일 줄은 생각도 못 했어.’
“훗.”
스크린 속에서 놀라워하는 석찬을 바라보며 G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게 이번 과제의 핵심입니다. 석찬 님.”
또 다른 석찬이 설명한 것처럼 세 번째 시험을 통과하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퀘스트 내용이 애매했던 것은 나름의 함정이라면 함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잘 통과하셨군요. 훌륭합니다.”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뭐 어떤가. 통과했는데.
나중에 만나면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해줘야겠다고 다짐한 G였다.
* * *
“어쨌든, 지금까지 수고했다. 너는 모든 시험을 통과했어.”
또 다른 석찬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였습니다.]
[모든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50층 마을이 개방됩니다.]
[……]
그의 말에 대답하듯, 여러 시스템창이 출력되었다.
석찬은 그의 손을 마주잡으며 물었다.
“그럼, 너는 이제 사라지는 건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또 다른 자신과는 꽤나 정이 든 상태였다.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낯간지럽게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어차피 난 만들어진 존재. 너와는 달라.”
또 다른 석찬의 몸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라지는 와중에도, 그는 말을 계속했다.
“앞으로 위로 가면 갈수록 많은 시련이 기다릴 거다. 특히 너 같은 놈한테는 더더욱.”
“그러겠지.”
“뭐, 너라면 잘 헤쳐 갈 거라고 믿는다. 물론 내가 했던 걸 똑같이 해낼 수 있다는 가정하에 말이야.”
또 다른 석찬이 비실비실 웃었다.
“물론이지. 꼭 해내겠어. 아니, 해내는 것으로는 부족해.”
“응?”
“나는 네가 보여줬던 경지를 뛰어넘을 거다. 그리고 탑의 꼭대기에 오르겠어.”
그 말에 또 다른 석찬이 안심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래야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있지.”
또 다른 석찬의 몸은 이제 실루엣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즐거웠고, 앞으로도 많은 한계를 돌파해 보라고, 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또 다른 석찬은 완전히 사라졌고, 홀로 남은 석찬 앞에는 시스템 창만이 남아 있었다.
“…….”
아쉬운 마음은 있을지언정 슬프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더욱 불타올랐다.
‘마지막 녀석의 말처럼….’
한계는 많고, 모든 한계를 돌파해낼 것이다.
열정에 불타오른 채로 석찬은 시스템 창을 하나둘 확인했다.
퀘스트가 어려웠던 만큼 보상도 컸다.
우선 레벨이 5개 올랐다.
이걸로 레벨은 229.
장비 재료 같은 것도 몇 개 나왔고, 포션이나 귀한 약으로 보이는 것도 몇 개 있었다.
“괜찮은데?”
보상은 전체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모든 보상을 아공간 주머니에 잘 보관해둔 석찬은 마지막 시스템 창을 읽었다.
[50층 마을로 이동하려면 ‘이동’이라고 외쳐주십시오.]
아무래도 시험에 통과하면 50층 마을로 바로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이동.”
다 부서진 대련장에서 따로 할 것도 없었기에 석찬은 바로 명령어를 읊었고, 눈앞이 점멸했다.
“여긴?”
50층 마을에 도착한 석찬은 눈을 빛냈다.
지금까지의 마을은 나무로 지은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기껏해야 영주성, 벽이나 주요 시설 정도가 돌을 이용할 뿐, 대부분 나무를 사용했다.
하지만 50층 마을은 달랐다. 모든 건물이 중세시대에서 볼 법한 비주얼이었고, 돌, 나무 외에도 많은 자재를 쓴 것이 느껴졌다.
‘마을 벽도 엄청나.’
돌을 쌓아올려 만든 다른 벽들과는 달리, 50층 마을의 벽은 뼈대가 제대로 잡혀 있었고, 난공불락의 성을 연상하듯 견고했다.
“당신은?”
그때 경비로 추정되는 사람 둘이 다가왔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혹시 명패를 보여줄 수 있으신지.”
“아, 알겠습니다.”
40층에서 갱신했던 명패를 내밀자, 두 사람은 50층 시험 통과자인지 한 번 더 물은 뒤, 명패 갱신소의 방향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석찬을 바라보는 경비들의 눈빛이 이상했다.
무언가 부끄러워하면서도, 힐끔거리는 것이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저기,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헉! 저기….”
한 경비가 우물쭈물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팬입니다!”
“응?”
“팬입니다, 올킬러 님!”
석찬의 팬이라고 설명한 경비가 품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들었다.
“사인 하나만 해주십쇼!”
“어, 네.”
팬이라고 밝혔는데 사인을 해주지 않을 수는 없었기에, 석찬은 받은 종이에 이름을 필기체로 휘갈겨 건넸다.
그의 사인을 받은 경비는 아이처럼 기뻐했고, 곁에 있던 경비도 사인을 부탁했다. 이에 석찬은 그에게도 사인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올킬러 님까지 오시다니. 이번 50층 시험 응시자들은 대단하네요.”
“혹시 저 말고 시험에 통과한 사람이 있나요?”
석찬의 물음에 경비는 손가락 세 개를 펴 올렸다.
“세 명이나 있었습니다. 한 명은 닷새 전에, 나머지 둘은 나흘 전에 여길 왔죠.”
그 말에 석찬은 적지 않게 놀랐다.
‘세 명이나?’
알렉산더나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매해 시험에 통과하는 사람은 잘해야 한두 명인 경우가 허다하다고 했다.
“그중에는 은발의 천사님이랑 킹갓코리안좀비 님도 있었죠.”
“이브랑 진현이도요?”
“네, 두 분 다 도착하자마자 당신의 안부에 대해 묻더군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너무 미안해지는데.
“혹시 두 사람이 어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휴, 물론이죠! 갱신소에서 이렇게 저렇게 가면….”
이브와 진현이 묵고 있는 여관의 위치까지 알아낸 후, 석찬은 명패를 갱신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석찬이 50층 마을에 입성하고 사흘이 흘러, 마을에 한 후드의 여인이 찾아왔다.
정체를 숨길 때나 쓸 법한 검은 후드였다. 평범한 사람이 쓸 리가 없었다.
“당신 누구야?”
당연히 경비들은 그녀를 경계했다. 만일의 공격을 대비해 창까지 빼 들며 말이다.
이에 여인은 대답 대신 명패를 던져 주었다.
탑 내에서도 발급받은 자가 몇 없다는 백금색 명패. 게다가 갱신된 층을 나타내는 칸에는 ‘90’이라는 숫자가 당당하게 쓰여 있었고, 경비들은 그제야 허둥지둥 그녀를 안내했다.
고층의 존재는 함부로 자극해서는 안 된다. 탑 내의 진리다.
아무리 층 페널티로 약해져도 그들은 강하다. 때문에 경비들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최대한 애쓰면서도, 무슨 이유로 마을을 방문했는지 물었다.
‘네가 물어봐!’
‘싫어! 네가 해!’
두려움에 가득 차 물어보고 싶지 않았지만, 고층의 존재가 저층 마을에 방문할 때 방문 사유를 적어야 하는 것이 규율이었기 때문에, 석찬에게 이름을 물었던 경비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녀에게 방문 사유를 물었다.
“저기… 탑에는 무슨 이유로….”
딱 봐도 공포에 질린 모습에, 여인은 작게 웃으면서 말했다.
“후훗, 별일 아니에요.”
여인의 목소리는 공포에 떨던 경비를 녹게 만들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그냥, 사람 하나 만나려고요.”
“사…람 이요? 혹시 그분 성함이….”
“굳이 경비가 알 필요는….”
여인의 말에 경비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앗, 죄송합니다! 저희 불찰을….”
“장난이에요. 혹시 강석찬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 있나요?”
그 물음에 경비는 며칠 전 마을에 도착했던 청년을 떠올렸다.
“아, 그 친구 말이죠? 네, 지금 여기 있는 걸로 압니다만….”
석찬이 있다는 소식에 후드 속 여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그럼 저는 이만.”
여인이 떠나간 이후, 경비들은 한동안 멍하니 서서 그녀가 사라진 쪽을 바라봤다.
“뭘까.”
본인들에게 일어난 비현실적인 일에 두 사람은 넋이 나간 채로 허공을 응시했다.
“모르겠다.”
한 경비가 창을 제자리에 내려놓은뒤 주저앉았다.
“뭔 일 없었으면 된 거지 뭐.”
“그런가?”
다른 경비도 그의 옆으로 가 털썩 앉았다.
“그나저나, 그 여자, 아니 그분은 왜 강석찬을 찾는 걸까? 목소리 들으니까 엄청 예쁘실 거 같은데.”
“낸들 아냐?”
경비들의 궁금증은 점점 커져만 갔다. 나중에 석찬을 보게 된다면 꼭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한 둘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