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쾅!
턱을 제대로 얻어맞은 또 다른 석찬이 붕 떴다.
‘이때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석찬은 위로 올라와 또 다른 석찬의 몸이 땅에 닿기 전 무자비한 연타를 갈겼다.
퍼버버벅!
지구에서부터 길러온 석찬의 연타 실력은 최강이었다.
몇 초 사이에 수십 발의 주먹을 꽂아 넣자, 또 다른 석찬의 몸이 힘없이 날아갔다.
털썩.
“쿨럭!”
또 다른 석찬이 처음으로 피를 뱉었다.
‘회복할 틈을 줘서는 안 돼!’
어느새 또 다른 석찬의 위에 올라탄 석찬이 연타를 이어갔다.
퍼버벅! 쾅! 쾅!
분명 싸움을 리드하는 것은 석찬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또 다른 석찬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뭐지?’
석찬은 의문이 들면서도 연타를 멈추지 않았다.
펑!
그때 석찬의 등 뒤로 마법 하나가 날아와 꽂혔다.
“큭.”
약간의 틈이 생긴 사이 또 다른 석찬은 귀신같이 빠져나와 흙을 털며 일어섰다.
“젠장. 아프네. 역시 약해도 나는 난가?”
녀석은 한껏 부은 얼굴을 어루만지더니 다시 씩 웃었다.
샤르륵.
그때 또 다른 석찬의 얼굴에 잔뜩 새겨져 있던 멍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치유 마법인가.’
“아 개운해.”
어느새 치료를 마친 또 다른 석찬은 다시 석찬에게 다가왔다.
“방금 공격은 매서웠어. 간보다가 죽을 뻔 했다고?”
또 다른 석찬은 킥킥거리며 주먹을 올려 들었다.
“너, 나랑 주먹으로 싸우고 싶지?”
“뭐라고?”
“처음에 너무 맞아서 안 들리나? 주먹으로 싸우고 싶냐고.”
‘주먹으로라.’
솔직히 말하자면 예스다. 지구에서도 탑에서도, 석찬은 주먹을 주로 썼으니 말이다. 방금 또 다른 석찬처럼 마법을 이용해 싸우긴 했지만, 결국 피를 본 것도 주먹으로 한 것이었다.
결국 석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안 되겠지만….’
혹시 녀석이 거절할 경우를 대비해 마법 생성까지 준비하던 그때였다.
“좋아. 지금부터 주먹으로 싸워주지.”
“뭐?”
예상보다 간단하게 수락하는 모습에 김이 다 빠졌다.
“네가 주먹으로 싸우고 싶다매.”
물론 그러긴 했다만.
“생각보다 간단하게 알았다고 해서.”
“내 목적은 너를 죽이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응?”
또 다른 나의 입에서 지금까지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어이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죽이는 게 아니라고?”
“이건 전투이기 이전에 시험이다.”
“하지만….”
“물론 첫 번째와 두 번째 시험에서 사망자가 나오긴 했지. 하지만.”
또 다른 석찬은 말했다.
첫 번째, 두 번째 퀘스트에서 죽은 쭉정이들과는 달리 세 번째 퀘스트까지 올라온 자들은 나름 51층에 도달할 자격이 갖춰진 녀석들이다.
“그런 놈들을 왜 죽여. 나는 너를 죽일 생각이 없어. 단지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게 도와줄 뿐.”
“도와준다고?”
어이없는 말의 향연이다. 하지만 라우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석찬아. 저게 맞을 수도 있다.]
‘예?’
[생각해봐라. 아까 전에 녀석을.]
또 다른 석찬은 진현의 비기를 자기 입맛대로 개량해 더 강한 기술로 만들고, 마법을 자기 손발처럼 다뤘다.
[아까 마법으로 널 공격할 때 녀석이 근접 공격까지 병행했으면 어땠을까?]
‘그건.’
상상할 필요도 없다. 만약 녀석이 그랬으면 자신은 분명 죽었다.
“이제 내 말을 믿는 건가.”
“조금은… 믿지.”
“좋아, 그럼 마저 싸워볼까?”
또 다른 석찬이 익숙한 가드 자세를 잡았다.
“잠깐, 궁금한 게 있다.”
“뭔데?”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근데 왜 이렇게 싸우는 거지.”
한계를 돌파하려면 수련을 해야 정상인 거 아닌가. 그리고 도우미라면 스승 같은….
“말했을 텐데. 난 너라고. 그리고 이번 시험의 내용을 잘 생각해봐라.”
“음….”
시험 내용을 상기하던 석찬의 눈빛이 변했다.
‘잠시만… 분명.’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시오.
세 번째 퀘스트 통과 조건이었다.
‘그 말은.’
“넌 나를 이겨야 한다.”
“씨발.”
반사적으로 욕이 흘러나왔다.
* * *
G의 앞에는 언제나처럼 시험 응시자들의 화면이 띄워져 있었다.
[씨발.]
그의 앞에 찰진 욕설을 내뱉는 석찬의 모습이 비쳤다.
“석찬 님….”
G는 50층 시험 세 번째 퀘스트에 대해 생각했다.
한계를 돌파해라.
간단명료한 조건이지만, 한계를 돌파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범인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인데다 천재라고 해서 쉬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천재 쪽이 더 어렵다고 할 수 있나.’
G의 생각으로는 천재, 특히 잠재력이 높을수록 한계를 돌파하기 어려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천재들은 불합리한 존재다.
남들이 한 발자국 두 발자국 힘겹게 나아갈 때 열 발자국, 스무 발자국씩 쭉쭉 뻗어나가는 게 천재다.
그중에서 석찬은 백 발자국씩 앞서 나가는 천재 중의 천재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인간일수록 자신의 한계에 대해 모르고 산다. 아니, 한계라고 할 것이 없었다. 남들이 죽어라 노력해서 얻은 것을 시작할 때부터 깨우치고, 아니더라도 몇 번 보고 실현 가능한 녀석들이 무슨 한계를 알겠는가.
그렇기에 세 번째 퀘스트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 번째 퀘스트에 나오는 상대는 자신과 똑같은 몸을 지닌 채로 사용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의 전술을 구사 할 수 있다.
물론 벽에 부딪힌 천재라면 나름대로 손쉽게 세 번째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석찬 같은 경우는 아직까지 벽에 부딪혀본 적이 없다.
마력 등급을 초록색으로 올리기 전에 마주친 벽? 그런 건 벽의 범주에도 끼어들지 못한다.
그렇기에 같은 경지, 같은 재능에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신에게는 쪽도 못 쓸 것이라는게 G의 예상이었고,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 떨어졌다.
‘뭐, 마지막 과제에는 시간제한이 없으니…. 한번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시죠.’
세 번째 퀘스트의 탈락 여부는 시험 감독관의 결정에 좌지우지된다.
때문에 감독관이 탈락 사인을 주지 않으면 응시자는 며칠이든, 몇 달이든 시험을 볼 수 있다.
‘정 안 될 것 같으면 탈락시키지 뭐.’
G는 자리 옆에 마련되어있던 팝콘을 집어 들었다.
‘석찬님이 자란 곳. 지구라고 했나? 좋은 음식이 많아.’
팝콘 옆에는 핫도그, 피자, 치킨 등등 여러 음식이 놓여 있었다.
아삭.
‘음식이 떨어질 때까지는 기다려 주죠. 한번 해보십쇼.’
팝콘을 한 입 베어 물던 G의 눈에 또 다른 화면이 들어왔다.
[크헉!]
또 다른 자신에게 먼지나도록 털리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흠.’
G의 머릿속에 고민은 없었다.
“7번 탈락.”
그와 동시에 남자의 몸이 사라졌다.
그렇다. 석찬 외에는 누구에게든지 귀신처럼 매정한 감독관으로 변하는 G였다.
* * *
일주일이 흘렀다.
“다시.”
쾅!
석찬은 여전히 또 다른 자신을 이기지 못했다.
마력 회로가 완전히 회복되었는 데도 말이다.
“처음보다 나아지긴 했는데, 여전히 부족해.”
“젠장.”
일주일간 몰라볼 정도로 마력 컨트롤 실력이 향상한 석찬이지만, 또 다른 석찬은 압도적인 마력 컨트롤 실력으로 석찬을 찍어 눌렀다.
[이야. 역시 몇 번을 봐도 진국이네 진국이야.]
얼마나 압도적이냐면 그 라우르조차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저 정도 마력 컨트롤이라니. 같은 몸 맞아?]
“칫.”
석찬은 몸을 털고 일어난 뒤,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요 일주일간 석찬은 또 다른 자신에게 패배하고 다시 도전하는 행위를 반복했다.
“또? 참 징글징글하다. 감독관 새끼는 뭐하는 거야. 이 정도면 탈락시킬 법 한데.”
석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세를 잡았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막연한 생각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이틀 전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절대로 이기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패시브로 장착한 채 싸움에 임했다.
하지만 어느 기점부터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깃들었다.
이길 수 있다.
무언가 갈피만 잡으면 되는데 그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이 생각은 몇 시간 전부터 더욱 강해져 석찬의 머릿속을 완전히 지배했다.
훙-
석찬의 주먹을 가볍게 피한 또 다른 석찬이 무심하게 말했다.
“날카롭긴 한데, 그것뿐이다.”
퍽!
녀석의 발에 차인 석찬이 바닥을 굴렀다.
“또 덤빌 거냐.”
석찬은 기계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마치 좀비 같은 움직임이었다.
“음, 망가져가고 있는 건가.”
이쯤 되면 또 다른 석찬도 궁금해졌다. 왜 시험 감독관이 탈락 사인을 내리지 않는 것인가.
이 정도면 녀석이 자신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걸 잘 알 텐데 말이다.
훙!
그때 석찬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빠르고 강한 주먹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무언가 달랐다.
‘주먹에,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다.’
또 다른 석찬에게 있어서 이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퍽!
이번 주먹은 제대로 또 다른 석찬에게 적중했다.
‘힘도 더 실린다. 뭐지?’
또 다른 석찬은 매섭게 석찬을 노려봤다.
석찬의 눈은 여전히 흐리멍텅했다. 하지만 자세는 그 어느 때보다 각이 잡혀 있었다.
‘저 녀석….’
그때 석찬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훙!
휭!
주먹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들리는 소리가 사뭇 다르다. 이전보다 배는 날카로워지고 강력해진 주먹.
‘어떻게 이런 갑작스러운 발전이.’
물론 여전히 또 다른 석찬에게는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놀라움을 주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그 시각, 석찬은 아무 생각 없이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
라우르는 말없이 그런 화신을 바라보았다.
수십 번의 패배에도 다시금 일어선 석찬이었지만, 육체도 그렇고 정신마저 꽤 피폐해진 상태. 나름 위험한 상태라고도 할 수 있었다.
특히 방금 전의 패배에 그의 마음이 조금 꺾이는 모습마저 보였다. 생기 있던 눈은 무력하게 변하고 동작마저 흐느적거렸다.
[이제 말려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 참이었다.
석찬의 움직임이 갑자기 달라졌다.
라우르도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었다.
[저 상태가 오히려 깨달음을 준 건가?]
그렇다기에는 깨달음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두르는듯 보였다.
[도대체 뭐냐.]
라우르도 의문을 표하고 있는 가운데, 석찬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훙!
그저 몸이 시키는 대로 주먹을 휘두르고 있을 뿐.
그러던 와중 석찬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놀라움으로 가득 찬 또 다른 자신의 표정이었다.
‘저 녀석,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었나?’
처음 보는 표정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보다, 나 지금 어떻게 녀석을 압도하고 있는 거지? 주먹이 조금 세진 거 같은데.’
전혀 짐작 가지 않았다.
‘모르겠다.’
석찬은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이대로 몸이 이끄는 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펑!
그때 석찬의 주먹이 매섭게 또 다른 석찬의 볼을 스쳐 지나갔다.
녀석의 뺨에 한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어라.’
“네 녀석. 뭐냐. 방금 건.”
피를 보니 석찬의 눈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방금 주먹은….’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석찬은 방금 전 느꼈던 감각을 떠올려 보았다.
또 다른 석찬은 그런 그를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미증유의 기운.
‘저건….’
돌파의 징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