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안면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통증과 함께 석찬이 본 것은 거대한 대련장의 천장이었다.
‘왜 천장이… 그보다 나는….’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등에서 아릿한 통증이 몰려왔다.
“커헉-”
입에서 한줄기 혈이 흘러나온다.
‘뭐야, 이건.’
등 뒤에서 마법으로 기습이라니.
석찬은 마음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진정시킨 그는 저 멀리서 자신을 구경하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바라봤다.
“오, 일어났네? 역시 나야. 큭큭.”
그는 뭐가 재밌는지 계속해서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석찬에게 다가왔다.
휘오오-
마주보고 선 두 사람 사이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하나만 묻자.”
“뭔데 뭔데?”
“너, 나와 똑같은 몸을 가진 거냐.”
“맞아보면 알잖아?”
그래, 확실히 자신의 마력과 똑같은 마력이었다.
“그럼 하나 더. 아까 한 말의 의미가 뭐냐?”
“아까 한 말? 뭐?”
석찬은 싸움 전에 눈앞의 자신에게 들었던 말을 읊었다.
“내가 이 몸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말.”
“아, 그거!”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너 말이야. 이렇게 좋은 몸을 들고 어떻게 그렇게밖에 못 싸울 수 있어? 그래도 네가 잠재력 무한이냐?”
잠재력 무한.
그 말에 석찬의 눈이 부릅떠졌다.
“네가 어떻게 그걸.”
“말했잖아. 난 너라고. 그리고 많이 실망했어. 아무리 부상을 입었어도 이 정도라니.”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주먹이 석찬을 때리려 했다.
훙-
하지만 석찬은 재빨리 허리를 틀어 주먹을 흘러낸 뒤 녀석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쿵!
“오. 조금 아픈데? 히.”
밀려나면서도 전혀 웃음을 멈추지 않는다.
녀석의 몸에서 초록빛 마력이 흘러나온다.
“이렇게 하는 거였지, 아마도?”
녀석의 주먹에 둘러져 있던 마력이 점점 거대해지더니 주먹의 형상을 이뤘다.
진현의 비기, 얼티밋 피스트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였다면 이렇게 했을 텐데 말이야.”
얼티밋 피스트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네 녀석.”
거대하게 키워 놓았던 마력을 작게 압축한 것이다. 더욱 색이 짙어진 얼티밋 피스트가 녀석의 주먹을 감쌌다.
[저건 위험해 보이는데?]
일반적으로 마력을 압축한 것과는 달랐다. 한 번 폭발시킨 거대한 힘을 다시금 압축함으로써 위력이든 내구력이든 몇 배는 상승됐다.
쇠가 담금질을 하면 할수록 단단해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마력을 사용해 몸의 대부분을 오른 주먹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엄청난 공격성을 지니면서도, 극강의 방어력까지 갖춘 미친 기술의 등장이었다.
“넌, 네 재능을 반의 반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어.”
또 다른 석찬의 등 뒤로 거대한 불의 창이 생겨났다.
‘파이어 스피어….’
과거 초록 등급 시절의 이브가 애용하던 마법 중 하나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워터, 어스, 윈드, 라이트닝 등등.거의 모든 속성의 창이 하나씩 생겨나 석찬을 겨냥했다.
“이 마력통을 왜 그렇게 활용하지 못하는 거야? 짜증나게.”
‘뭐야, 저 괴물은.’
방어력, 공격력이 모두 최상급인 공방일체의 괴물이라니.
“너, 지금 나보고 괴물이라고 생각했지?”
석찬의 생각을 읽은 또 다른 석찬이 피식 웃었다.
“말했잖아. 난 너라고. 너도 다 할 수 있는 것들이야.”
“나도… 가능하다고?”
“그래.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또 다른 석찬이 손을 뻗자, 원소의 창들이 석찬을 향해 쇄도했다.
[알아서 피해라.]
‘젠장!’
또 다른 석찬의 말에 대해 생각해볼 틈도 없이 석찬은 이곳저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창들을 피하기 바빴다.
“잘 피하네. 어디 서커스단에 보내면 정말 좋아하겠어.”
또 다른 나는 도발까지 잊지 않았다.
‘이 새끼가….’
저 녀석의 면상에 주먹을 꽂고 싶지만, 끊임없이 쏟아지는 창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조차 못했다. 하지만 또 다른 석찬은 끝이 아니라는 듯 수시로 마법을 만들어냈다.
‘도대체 뭐야?’
“무한의 마력이라면 이런 거라도 해줘야 인지상정 아니겠어?”
퍼버벙-
연속으로 쏘아진 파이어볼이 석찬의 명치에 적중했다.
“캬학!”
아슬아슬해 보이던 서리 거인의 갑옷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젠장.’
이길 방법이 없다.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나, 조금 더 발악해보라고!”
콰과광!
번개가 치고, 불꽃이 튀고, 물이 쏟아진다. 마법만으로도 정신없을 지경인데 본체인 녀석을 어떻게 치란….
그때, 석찬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생겨났다.
‘잠깐, 강석찬. 생각을 해보자. 녀석의 나와 같은 몸이다. 게다가 녀석이 그랬어.’
나도 자신과 같은 걸 할 수 있다고.
[그걸 이제야 생각하냐. 멍청한 화신 놈아.]
이례적으로 라우르의 말에 동의했다.
‘이번엔 내가 너무 바보였다.’
석찬은 계속 몸을 움직이는 와중에 마법식을 그려나갔다.
“파이어 볼.”
펑!
파이어볼에 직격한 또 다른 석찬의 마법 하나가 파괴되었다. 하지만 석찬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걸론 부족해.’
눈앞의 나는 마법을 무한의 마력을 이용해 무한정으로 마법을 쏘아내는 존재. 이 속도로는 새로 생겨나는 마법을 따라가지 못한다.
‘큰 위력의 마법이 필요해!’
석찬이 머리를 굴렸다. 마력을 최대한 덜 먹으면서도 위력이 괜찮게 나오는 마법이….
그때, 석찬의 머릿속에 한 마법이 떠올랐다.
‘맞다. 그게 있었지.’
수년 전, 처음 탑에 발을 들인 날이었다.
재수 없게 첫날부터 고블린 습격이라는 사건을 겪으며 사용했던 마법. 이름하야.
“마력구.”
모 유명 일본 만화들에서 착안해 만든 최초의 공격 마법이었다.
석찬의 손에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우웅-
마력탄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주변의 마법조차 그 안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호오? 뭐야. 그건?”
어째서인지 또 다른 나는 마력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모르면… 한번 맞아봐!”
석찬의 손 위에 올려진 농구공 크기만 한 마력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후우웅-
거대한 마력구가 회전하며 더욱 힘을 응축시키자 또 다른 석찬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흠. 내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마법인데. 혹시 네가 만든 거야?”
“그럼 어쩔 건데.”
“일단 한번 쏴봐. 위력을 한번 봐야 되니.”
어찌된 일인지. 또 다른 석찬은 강대한 힘을 지닌 마력구를 보고도 전혀 긴장한 기색을 풍기지 않았다.
‘자신감이 있다는 건가.’
팔까지 벌리며 들어오라는 시늉을 하는 녀석을 보며, 석찬은 씩 웃었다.
‘그렇게 나오면 나야 땡큐지.’
후회하지나 마라.
팔이 짜릿해질 때까지 마력구를 성장시킨 석찬은 그대로 마력구를 던졌다.
쿠구궁-
거대한 파공음을 일으키며 날아간 마력구가 또 다른 석찬에게 직격했다.
콰과광!
또 다른 석찬과 마력구가 부딪치는 순간, 엄청난 폭풍우가 그를 감쌌다.
“커헉! 굉장해!”
그 위력이 크진 않았지만 얼티밋 피스트를 두른 또 다른 석찬에게 대미지를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생각보다 위력이 센데?’
[너 저런 게 있으면서 지금까지 안 쓰고 있었던 거야?]
라우르가 어이없단 표정으로 석찬을 째려봤다.
‘그게 말이죠.’
솔직히 석찬의 마력구 위력이 저렇게 강할지 몰랐다. 물론 예전에 고블린 한 마리를 소멸시켜 버리긴 했지만, 고블린 자체가 약한 몬스터 중 하나였기에 회전 마력구가 그렇게 강한지 몰랐다.
게다가 굳이 근접 전투라는 전문 분야가 있는데 마법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그 말에 라우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갑갑아. 너 이번 시험 끝나면 무조건 마법도 배워라. 난 뭐 거창한 이유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그런 거였어?]
라우르는 여전히 거대한 폭풍우에 갇혀 있는 또 다른 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석찬아. 네 마력이 무한이라는 걸 잊지 마. 물론 그게 근접 전투에서 충분한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게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건 바로 마법이다. 쟤를 봐라.]
확실히 마법을 무한정 발사하는 또 다른 나는 상대하기 많이 빡셌다.
[쟤가 말한 것처럼, 너도 할 수 있다. 왜냐고? 넌 무한의 마력을 가졌으니까. 생각해보니 너도 해본 적 있잖아?]
‘제가요?’
[두 번째 퀘스트 때 말이다. 띨빵아.]
‘그때요? 아.’
생각해보니 두 번째 퀘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석찬은 마력 회로가 버티는 한 무한정 치유 마법을 쏟아부었고, 대부분의 신체 능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래. 나도 할 수 있었어.’
[진짜….]
라우르의 한 마디에서 많은 것이 느껴졌다.
[그래, 지금부터 알았으니 다행이지. 젠장 그 할망구가 보면 지 제자 삼겠다고 난리도 아니겠어.]
‘할망구요?’
[있어. 요망한 할망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보니 거대 회전 마력구가 사라졌고, 피투성이가 된 또 다른 석찬이 걸어나왔다.
“이야, 방금 것은 정말 대단했어!”
녀석은 뭐가 좋은지 실실 웃으며 석찬에게 다가왔다.
석찬은 말없이 마법을 생성했다. 파이어 볼, 아이스 볼, 체인 라이트닝, 락 스마이트 등등. 전부 마력 회로가 버틸 수 있는 초중급 마법들이었다.
“하하! 이제야 깨달은 거냐? 너의 천부적인 마법 재능을? 조금 더 재밌어 지겠어.”
또 다른 석찬의 등 뒤에서도 마법이 생성되었다. 파이어 스피어, 라이트닝 썬더, 허리케인, 그리고.
“그건.”
석찬이 만들었던 마력구까지.
“이거, 유용해 보이더라고?”
마력구가 회전하며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마력구의 위력을 절감한 석찬에게 있어 그것은 기피 대상 1호였다.
‘힘을 모으기 전에 친다.’
마법이 일제히 또 다른 석찬을 향해 쏘아졌다.
“뭐냐. 이 장난감들은?”
또 다른 석찬은 손짓만으로 마법을 지우고는 석찬을 향해 달려들었다.
“받아라! 쾅!”
입으로 효과음까지 내며 마력구를 던진 또 다른 석찬은 눈을 가늘게 떴다.
“호오?”
어느새 만들어낸 마력구로 또 다른 석찬의 마력구를 상쇄해낸 석찬의 몸에서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포그.
초급 마법이지만, 도망갈 때나 시선을 끌 때 적격인 마법이었다.
“흥, 이까짓 안개쯤이야.”
또 다른 석찬은 바람 마법으로 안개를 쓸어버린 뒤 사라진 석찬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으면… 위냐? 아니면 뒤?”
또 다른 석찬은 위를 올려다보며 뒤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석찬은 느껴지지 않았다.
“뭐냐?”
“여기다.”
그때 아래에서 석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굴을 파고 들어간 석찬이 얼굴만 내민 채 주먹을 꽉 쥐었다.
또 다른 석찬이 처음으로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럼 맞아야지.”
“음… 그래야겠네.”
쾅!
석찬의 주먹이 또다른 석찬의 턱을 강타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