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12시간이 흘렀다.
이브는 아직까지도 석찬의 치료에 집중하고 있었다.
파랑 등급에 도달하면서 치유 능력이 몇 배는 향상된 이브가 한나절 동안 치유 마법을 퍼부었지만, 석찬의 몸은 아직까지도 엉망진창이었다.
‘마력 회로가 다 꼬였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다음 퀘스트가 시작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12시간.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전에 치료가 끝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보스가 악마라고 했죠? 얼마나 강했던 거야, 대체?”
“엄청 강하드라. 엄청….”
물론 지금 부상의 대부분은 보스에게 입은 상처보다는 라우르가 강신으로 마음껏 날뛴 영향이 컸다. 하지만, 강신이 없었다면 자신은 필시 죽었을 것이었다.
“말하지 말고 최대한 체력을 아끼세요.”
“그래….”
“…….”
치료 현장을 보호하던 진현도 엉망인 친구의 몸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또다시 12시간이 흘러 다음 퀘스트가 시작되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어느덧 10분. 대량의 마력을 쏟아부은 끝에 석찬은 거동과 간단한 마법 정도는 사용이 가능했다.
“그래도, 무리하지 마세요. 지금 치료는 말 그대로 응급조치예요. 나중에 시간 들여서 제대로 사람들이 붙어서 치료해야 돼요.”
“그래, 고마워.”
“…힘내요.”
간단하게 몸을 푸는 석찬을 보며 이브는 목구멍 바로 밑까지 튀어나온 말을 간신히 집어삼켰다.
‘최선은 시험을 포기하는 거지만….’
지금 석찬의 상태로 시험을 탈락한다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최악이다.
‘두 번째 퀘스트가 어렵지 않으면 좋겠는데….’
이브가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석찬은 진현과 짧게 대화를 나눴다.
“괜찮냐?”
“조금 불편하긴 한데, 괜찮아.”
“다음 퀘스트, 뭔진 모르겠지만… 넌 할 수 있을 거다.”
“고맙다.”
“그리고… 조심해라.”
“응?”
진현은 주변 사람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른 녀석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아. 잘못하면 널 덮칠 수도 있어.”
치료에 전념 중인 이브를 보호하는 동안, 진현은 주변 사람들의 동향을 계속 살폈다. 그러니 몇몇 미약한 살기가 이쪽을 향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석찬은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석찬은 냉정하게 현재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내상 때문에 근접 전투는 거의 불가능. 불완전한 마력 회로 때문에 마법도 큰 출력을 내지 못한다.’
[게다가 약점 파악도, 부분 강신도 못쓰지.]
‘당연한거 이야기하지 말아요.’
지금 자신은 원래 힘의 20%도 내지 못하는 상황. 그렇다고 해서, 습격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이는 막연한 자신감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능력치를 대충 훑어본 결과, 강하긴 해도 석찬과 그들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스탯.’
[힘 : 395 + 79]
[민첩 : 390 + 78]
[체력 : 390 + 97.5]
[내구 : 405 + 101.125]
[마력 : 462 + 92.4]
마력 운용자이기에 이득을 봤던 수백 개의 스탯과 이따금 먹은 영약으로 인해 석찬의 스탯은 동층 대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압도적인 수치를 자랑했다.
‘혹시 모르니 잔여 포인트도 전부 사용해놨고.’
이제는 모든 스탯이 500에 가까워진 상황에서, 스탯으로 석찬을 넘어설 사람은 적어도 이 시험장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뭐, 넌 옛날부터 알아서 잘했으니까, 믿는다.”
“그래.”
[그래도 너무 방심하지 말고, 지금 네 꼴은 걸레짝이나 마찬가지니 말이지.]
‘옙.’
이런저런 준비를 하니 어느새 G가 나타나 다음 퀘스트에 대해 공지해 주었다.
“다시 돌아온 안내자 G입니다! 모두 잘 쉬었는지요?”
“잡담은 말고 빨리 다음 퀘스트에 관해 이야기나 하지?”
그때 한 남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G에게 시비를 걸었다.
G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곧장 평소 표정으로 돌아와 퀘스트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바로 전달해 드리죠 다음 과제는 바로~! 몬스터 웨이브 방어입니다!”
두 번째 퀘스트의 내용이 공개되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몬스터 웨이브 방어?”
“설마, 0층?”
“예, 맞습니다! 0층 문의 시험에서 치뤘던 바로 그 과제지요! 다만, 난도는 그때에 비해 훨씬 높아져 있을 것이란 사실을 명심해 주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퀘스트도 혼자 진행하는 겁니까?”
한 여자의 질문에 G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아뇨! 이번 시험에서는 서로 파티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럼 과제를 시작하기 앞서, 파티를 짜주시죠! 파티원의 수는 자유! 원한다면 여기 계신 모든 분이 한 파티를 이루셔도 괜찮습니다!”
G의 설명이 있고 바로, 사람들은 저마다 파티를 이루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열 명 정도가 한번에 모이는 경우도 있었고, 두세 명끼리 작게 파티를 결성하는 곳도 있었다.
“잘됐네요. 저희 같이 파티해요!”
“좋다, 석찬아.”
“그래.”
석찬 일행도 평소처럼 삼인조를 구성했다. 파티가 만들어지자, 이전 30층 이벤트 퀘스트 때처럼 파티창이 활성화되었다.
[올킬러 파티]
[파티원 목록]
[강석찬 - Lv. 224]
[이브 올가 - Lv. 298]
[김진현 - Lv. 200]
“이브 씨, 곧 300레벨이네요?”
“네. 290레벨부터 진짜 안 오르더라고요. 그보다 진현 씨도 엄청 빠르네요. 벌써 200레벨이라니.”
이브와 진현이 레벨 관련 이야기 삼매경인 와중, 석찬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파티라….’
확실히 파티로 퀘스트를 진행한다면 몬스터 웨이브를 방어하기 훨씬 수월할 것이 분명했다.
진현과 이브하고만 파티를 이뤘기에 모르는 이에게 습격당할 걱정도 없다.
‘하지만 저 녀석들이 시험을 마냥 쉽게 낼 생각은 없을 거야.’
흠칫.
아니나 다를까. 파티원끼리 잡담을 나누는 것을 보며, G는 기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젠장, 뭐지?’
“자, 모두 집중해 주세요.”
석찬은 긴장을 유지한 채 이어지는 G의 말에 집중했다.
“이번 과제는 말이죠. 어쩌면 ‘쭉정이’에게 있어서는 가장 어려운 과제가 될 수 있어요.”
‘쭉정이?’
다소 거친 단어의 등장에 몇몇 사람들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쭉정이?”
“지금 말 다 했어?”
“조용.”
G는 유쾌했던 이전까지와는 달리 다소 진중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을 이었다.
“쭉정이라는 말을 들으니 화가 납니까? 그럼 증명하세요. 과제를 통과해서 말이죠.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번 과제에 선착순 같은 건 없습니다.”
“선착순이… 없다고?”
“예. 대신 몬스터 웨이브 방어에 실패한 파티는 가차 없이 탈락시킬 예정입니다.”
“뭐?”
그 말인즉슨, 잘못하면 모든 사람들이 이번 퀘스트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는 말 아닌가.
사람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러니 모든 분들은 최대한 열심히 이번 과제를 임해주시길 바랍니다. 모두 알아들으셨죠? 그럼 전 이만.”
G가 사라진 이후, 퀘스트 창이 나타났다.
[메인 퀘스트 - 50층-2(플레티넘)]
[몬스터 웨이브를 방어하시오(미완료)]
[무작위 순서로 이동이 시작됩니다.]
마지막 메시지가 사라짐과 동시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라졌다.
“지금부터 시작인건가….”
“긴장해야겠네요. 이번 퀘스트.”
“후….”
고조된 분위기 속, 석찬의 눈앞이 점멸했다.
“응?”
눈을 떴을 땐, 튜토리얼 때 봤던 것과 비슷한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는 어디죠?”
“뭐지?”
이브와 진현도 잔뜩 경계한 채 주변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는데? 여기서 뭘 하라는….’
그때 궁금증을 풀어주겠다는 듯,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파티원의 수를 확인합니다.]
[파티원의 수 : 3]
[무작위로 난이도를 설정합니다.]
[파티원 중 플레티넘 등급의 도전자가 존재합니다.]
[난이도가 ‘극상’으로 설정됩니다.]
[극상급 몬스터 웨이브는 총 3000마리의 일반 몬스터, 1000마리의 정예 몬스터, 100마리의 중간 보스급 몬스터, 10마리의 보스급 몬스터, 그리고 1마리의 히든 보스급 몬스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잠시 후, 수정이 생성됩니다. 수정을 보호하십시오.]
[수정 보호에 실패할 시, 퀘스트에 실패합니다.]
극상.
미궁에서 보았던 모든 등급 체계 중 두 번째로 높았던 등급이다.
‘물음표 등급보다는 낮지만, 그래도 방심할 순 없다.’
게다가 몸 상태도 최악인 상황. 어찌 보면 대위기라고 할 수 있는 노릇.
그럼에도 이브와 진현은 긴장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극상급? 해볼 만할 거 같은데요?”
“그러게. 최상급 보스는 조금 쉬워서 아쉬웠는데.”
“진현 씨도 그랬어요? 저도 그랬는데.”
50층 시험 그 첫 번째 퀘스트인 미궁. 가장 높은 등급을 선택했다가 온갖 개고생이란 개고생은 다했던 석찬과는 다르게 이브와 진현은 최상급 난이도의 보스를 선택했고, 어렵지 않게 미궁을 클리어했다고 했다.
“긴장되지 않아?”
석찬의 물음에 이브가 지팡이를 닦으며 말했다.
“물론 긴장되긴 하는데… 재밌을 거 같은 마음이 더 커요.”
“강한 적이랑 싸우는 건 언제나 즐거운 법이지. 인정?”
[그래, 저게 진정한 남자지! 인정이다, 인정! 석찬아, 친구 놈 좀 보고 배워라!]
‘뭐, 그래. 강한 적이랑 싸우는 건 언제나 환영이지.’
다만 지금 몸 상태가 문제일 뿐.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 퀘스트에서 가장 큰 짐은 나다.’
이브와 진현이 아무리 강해도 자신처럼 전신의 가호 같은 버프 없이 4000마리가 넘어가는 몬스터를 처리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잘못했다간 혼자가 아닌 셋이서 함께 시험을 탈락할 수도 있었다.
“젠장.”
왜 그때 호기롭게 가장 높은 난이도를 골라서 상황을 이런 꼴로 만든 것인가.
자신에 대한 환멸을 느끼기 시작할 때쯤.
딱!
진현의 딱밤이 석찬의 이마를 강타했다.
“악! 뭐야?”
이마를 부여잡은 석찬 앞에 진현이 쭈그려 앉아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지금 자책하고 있지? 표정에 다 써져 있어.”
“…….”
“석찬아. 너는 짐이 아니야. 물론 지금 같이 싸우는 건 힘들겠지만, 우리는 절대 널 불편하게 생각 안 해.”
이브도 거들었다.
“맞아요. 그리고 생각해봐요. 우리가 오빠한테 입은 은혜가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 가지고 오빠를 싫어하겠어요?”
“너희들….”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수정이 생성됩니다.]
때마침 석찬의 등 뒤로 성인 남자 키만한 크기의 자색 수정이 생겨났다.
“거기 앉아 있어.”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저 멀리서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쿠어어어!”
“캬아악!”
“오랜만에 날뛰어 볼까?”
수정만을 바라보며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향해, 진현이 거대한 주먹을 날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