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눈을 뜬 석찬이 가장 먼저 본 것은 저 위에 지어진 출구였다.
눈앞에 출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위쪽에 있었다. 그것도 한 10m 정도 위에.
‘이게 무슨….’
게다가 분명 자신은 최하급 악마란 녀석이랑 싸우고 있었는데.
영문 모를 상황에 석찬이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크악…”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뭐야, 라우르?”
[깼냐?]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악마 새끼가 너를 죽이려 했고, 어쩔 수 없이 강신을 썼어.]
“강신… 결국 썼군요.”
[그래. 이참에 말해두는 건데, 악마 말은 절대 믿지 마. 걔네가 왜 악마라고 불리겠냐.]
“제가 너무 안일했어요.”
[뭐, 이겼으니 됐어. 앞으로 안 그러면 된다.]
“예. 그나저나, 강신 건은 그렇고. 여기는 왜 이렇게 된 거예요? 설마 라우르가 이렇게 만든 거예요?”
완전히 무너진 지반을 가리키며 묻자, 라우르가 가슴을 쫙 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물론이지. 근데 그 악마놈. 약해 빠졌더라, 일점폭발 한 번에 죽다니. 역시 최하급이야.]
“일점폭발 한 번이요?”
[그래.]
그의 대답에 석찬이 기염을 토했다.
일점폭발 한 번으로 주변을 완전히 부숴버리다니.
‘분명 몸안의 마력은 똑같을 텐데.’
엄청나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도 나중에 이렇게 할 수 있어.]
“진짜요?”
[물론이지. 넌 내가 선택한 화신이다.]
“알겠습니다. 자신감을 가질게요.”
[그래, 그나저나….]
라우르는 조심스럽게 출구를 힐끔 쳐다보았다.
[안 가냐? 빨리 안 가면 다른 사람들이 먼저 들어갈 수도 있는데? 기억 안 나냐? 이 시험 선착순인 거.]
“아… 빨리 가야죠.”
너무 거대했던 전투 때문에 시험 중이라는 것을 잠시 망각하고 있던 석찬은 비명을 지르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출구를 향해 올라갔다.
“젠장… 힘 조절 좀 하시지.”
[그렇지만 나도 네 녀석 몸이 벌써부터 이렇게 큰 출력을 낼 줄 몰랐단 말이야.]
“젠장…”
평소 같았으면 금방 올랐겠지만, 지금 석찬의 몸은 강신 후유증으로 만신창이다. 10m의 높이가 10km처럼 느껴졌다.
“후아…”
간신히 위로 기어 올라온 석찬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미궁의 출구로 몸을 던졌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안녕하십니까.”
6개월 전에 와봤던 검은 공간이었다.
“또 당신?”
“이번에… 정말 크게 저질러 놨더군요.”
G가 손가락을 튕기자, 완전히 붕괴된 미궁의 모습이 비쳤다.
“저건….”
“당신의 주신이 만든 풍경입니다. 정말이지, 예전부터 무식하게 힘만 세서는….”
[뭐 임마? 무식하게 힘만 세?]
“그럼, 틀렸습니까?”
G는 투덜거리며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석찬에게 건넸다.
“자, 받으십시오.”
“이게 뭡니까?”
“보스 몬스터 잡으셨잖아요? 물론 당신의 주신이 잡은 거긴 하지만… 보상입니다. 종이를 찢으면 나타날 겁니다.”
그 말에 석찬은 부들거리는 팔로 받아든 종이를 찢었다. 그러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급 보스 몬스터 ‘최하급 악마’를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14]
[’최하급 악마의 뿔’이 지급됩니다.]
[’최하급 악마의 날개’가 지급됩니다.]
[’유혹적인 악마 상의’가 지급됩니다.]
[’유혹적인 악마 신발’이 지급됩니다.]
최하급이라고 해도 악마를 잡은 보상은 엄청났다. 우선 레벨이 14나 올랐다.
‘엄청나네.’
이로써 석찬의 레벨은 224에 도달했다. 게다가 최상급 재료도 두 개나 주어지고 장비도 지급되었다.
‘그런데.…’
장비의 상태가 이상했다.
‘유혹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을 땐 눈치채지 못했는데, 막상 받아보니 상의는 AV 영상에서나 나올 법한 노출 심한 여자 속옷이었다. 신발 또한 여자가 신는 구두였다.
[유혹적인 악마 상의]
[등급 : 레전더리]
[방어력 +100]
[내구도 : 50/50]
[체력 스탯 +10%]
[이 상의를 본 상대에게 확정적으로 상태 이상 ‘매혹’을 부여합니다.]
“와.”
장비의 성능 자체는 엄청났다. 수 년 간의 탑 생활 중 처음 본 레전더리 등급일 뿐만 아니라 상태 이상을 확정적으로 부여한다는 것에서 이 장비의 가치는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방어력이나 추가 스탯이 낮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속옷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었다.
구두 또한 레전드 등급으로 발소리를 들은 상대에게 높은 확률로 환청을 부여하거나 발소리를 못 듣게 할 수 있게 만드는 말도 안 되는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해.’
자신이 여자 속옷이나 신발을 신을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답답한 마음만 들었다.
“하아…”
이브에게 줄까 생각도 해봤지만, 신발은 몰라도 상의를 주었다간 변태로 오해받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냥 너가 입자.]
‘닥쳐요. 일단… 챙겨만 놓자.’
눈물을 머금고 장비를 챙긴 석찬이 G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감상은 다 하셨습니까?”
“예… 아주 기쁩니다. 기뻐.”
“레전더리 장비니 소중히 다뤄주시길….”
“그나저나 보상 하나 주자고 절 부른 건 아닐 테고, 절 부른 진짜 이유가 뭔가요.”
“눈치가 빠른 분이시군요. 제가 당신을 부른 이유는 보상 말고 하나 더 있습니다.”
G는 한 가지 당부 메시지를 전했다.
“강신, 사용하지 말아주십시오.”
‘강신. 역시 그건가….’
라우르의 존재까지 이미 알고 있는 G라면 강신을 썼을 때 어떻게든 눈치를 챘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었다. 때문에 이 당부에도 그리 큰 반발은 들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호? 반대하지 않으시네요.”
“보시다시피 한 번 쓰면 몸이 이 꼴이 나서, 저도 가능하면 안 쓰고 싶습니다.”
석찬의 긍정에 G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요. 물론 석찬 님의 몸 상태도 중요하지만, 다른 점도 있긴 합니다. 라우르. 들리나요?”
[그래.]
“지금 당신이 강신을 사용하면 위쪽에서 당신의 정체를 어렴풋이 눈치챌 수도 있어요. 솔직히 아까 전 기술도 사용한 사람이 누구냐고 계속해서 물어보고 있는 상황이고요.”
[그건 네 새끼들이 50층 시험 따위에 악마 같은 걸 넣어두니까 그런 거 아냐! 그래, 이참에 물어보자. 무슨 생각으로 시험 보스로 악마를 넣어둔 거야?]
분노가 가득 담긴 라우르의 질문에 대한 G의 대답은 간단했다.
“저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라우르를 더욱 분노하게 했다.
“몰랐다고? 그게 말이 돼? 시험 감독관이라매! 내 화신이 죽을 뻔했어, 임마!”
“그건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아무리 제가 시험 감독관이어도 시험 그 자체는 ‘■■■’이 관리하고 있어서요. 아시잖아요?”
“뭔 소리야, 그게?”
영문을 모르겠다는 라우르의 표정에 G가 손뼉을 탁 쳤다.
“아, 아직 완전한 기억이 돌아오시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의도치 않게 비밀 하나를 들킨 라우르가 표정을 잔뜩 구겼다.
[닥쳐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에 대해 발설하지 않기로. 전 악마가 아니라서 약속 잘 지킵니다. 소멸되고 싶지 않거든요. 그나저나 기억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라… 하긴 그런 일을 당했는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G는 석찬을 의식하곤 다시 원래 주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제 말만 했네요. 어쨌든 악마 건에 대해서는 죄송합니다. 뭐라 할 말이 없네요.”
“됐어요. 어차피 끝난 일인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래도 죄송하니 조금의 정보는 드리고 싶네요. 어디보자… 석찬님께서 알고 싶어 하시면서도 필터링에 걸리지 않는 정보가…”
잠시 고민하던 G는 좋은 걸 떠올렸다는 듯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그게 좋겠군요. 석찬 님. 만약 당신이 시험을 통과하시면 50층 마을로 이동하게 될 겁니다.”
“예.”
50층에는 두 가지 장소가 존재한다. 하나는 처음 50층을 밟은 사람이 오게 되는 시험장. 그리고 두 번째가 바로 시험을 끝마친 자들이 거주할 수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 가시면 대장간이라는 곳이 있을 겁니다. 참고로 간판에 대장간이라고 적혀 있는 거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대장간 이름이 대장간이라니. 진현만큼이나 성의 없는 네이밍 센스였다.
“아무튼 대장간에 가시면 늙은 노인이 하나 있을 겁니다. 대장간 주인인데 그분한테 지금까지 모은 재료를 들고 찾아가면, 당신이 원하는 장비를 만들어 줄 겁니다.”
“제가 장비 필요한 건 또 어떻게 알았습니까?”
“저는 항상 당신을 응원하고 있으니까요.”
[계속 응원하는 게 아니라 염탐하고 있는 거 아니야?]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죠.”
G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보다 얼추 시험이 마무리된 것 같군요. 석찬 님은 통과니 걱정하지 마시고,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다음 과제까지 하루 정도 시간이 있으니 그 동안 몸을 회복해 두시지요.”
그렇게 G와의 세 번째 만남이 끝났고, 석찬은 초원으로 이동되었다.
초원 위에는 첫 번째 과제에 통과한 응시자들이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마지막인가?”
“그런 것 같군. 꼴을 보니 아주 고생한 모양이야.”
여전히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몸이라 석찬은 고개만 돌려가며 진현과 이브를 찾았다.
‘어디있지?’
[야, 네 친구들 오고 있다.]
‘어디요?’
[저기.]
‘어디….’
라우르가 가리킨 곳을 보려는 순간, 두 사람이 먼저 석찬을 덮쳤다.
“얌마! 왜 이렇게 늦었어! 꼴은 또 그게 뭐고?”
“뭐에요, 떨어진 줄 알았잖아요!”
울먹이는 이브를 보며 석찬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떨어질 리가 없잖아?”
“근데 왜 이렇게 늦게 온 건데요?”
“일이 좀 있어서. 걱정시켜서 미안해.”
“정말이지. 몸은 또 왜 이래. 무슨 짓을 한 거예요?”
“하하. 그게 말이지…”
이브는 석찬의 몸을 훑어본 후 질린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근육이랑 내장이 엉망이 되었잖아요? 무슨 일이야, 이게.”
이브가 잔소리와 함께 최상급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몸 좀 아끼라고 옛날부터 계속 말했는데, 정말. 무슨 보스랑 싸운 거예요?”
“있어. 조금 강했던 놈이.”
“보스 썰이나 조금 풀어봐라, 석찬아.”
“진현 씨는 잠깐 비켜 있어 주실래요? 치료에 방해가 돼서.”
“예…엡. 쩝.”
진현은 아쉬워하면서도 이브의 말대로 조금 떨어진 채 쪼그려 앉았다.
‘저 녀석 삐졌네.’
치료가 끝나면 진현에게 꼭 보스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줘야겠다고 다짐한 순간이었다.
[메인 퀘스트 - 50층-1가 클리어되었습니다.]
푸른 하늘 위에 모두가 볼 수 있는 거대한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24시간 후 메인퀘스트 - 50층-2가 진행됩니다.]
[23:59:59]
타이머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아마 저게 0이 되면 두 번째 과제가 시작될 것이다.
‘그 전까지 최대한 몸 상태를 회복해놔야겠어.’
“이브, 치료 좀 빡세게 해줄 수 있을까?”
“알았어요.”
이브의 지팡이가 더욱 밝게 빛났다. 집중 치료가 시작된 상황 속에서, 24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