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툭- 툭-
소멸한 키메라와 함께 파괴된 동굴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졌다.
“…….”
가루 때문에 후드가 더럽혀졌지만, 사내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방금, 무슨 일이….’
예상하지도 못했다. ‘보스급’ 키메라가 한 방에 나가떨어진다니, 그것도 하찮은 잡졸로 생각했던 녀석한테 말이다.
“내가 완전히 잘못 생각했군.”
“이제야 알았냐?”
진현이 팔을 빙빙 돌리며 사내에게 다가갔다.
“탈리야…님, 네가 데리고 갔지?”
“…….”
사내는 말이 없었다. 그저 품속에서 캡슐을 하나 꺼내 입안에 던져 삼켰다.
‘방금 그건….’
불쾌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캡슐이었다.
“어이, 뭐라도 말을 좀 해…”
그때 진현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후웅-
서늘한 바람이 세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
탓.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벌린 진현이 사내를 노려봤다.
“눈치가 빠른 녀석이군.”
주륵-
왼쪽 뺨에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이건….”
손가락에 붉은 피가 묻어났다.
“보스급으로도 네 녀석들을 상대하지 못한다는 건 잘 알았다.”
사내의 몸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2m 정도로 불어난 사내가 섬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최선을… 다… 하겠다.”
사내가 후드를 벗었다.
드러난 맨 얼굴은 솔직히 말해 역겨웠다. 얼굴 곳곳에 흉터가 가득했으며, 머리도 듬성듬성 나 있었고, 눈동자에 검은자위가 없었다.
“뭐냐, 그 모습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사내는 모습을 감추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
어느새 진현의 코앞까지 다가온 사내가 그의 명치에 주먹을 꽂았다.
퍼억!
“크헉!”
크게 밀려난 진현이 바닥을 굴렀다.
“진현아!”
사내는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훈타. 일곱 번째의 칭호를 부여받은 키메라 제작자다.”
‘역시 키메라 제작자였어. 근데 일곱 번째라고?’
“너희는 ‘위쪽’에 방해가 될 것 같군. 지금 처리한다.”
‘위쪽? 타 층과 관련있다는 건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훈타가 석찬에게 달려들었다.
‘빨라.’
마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움직임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 정도다.
탁.
날아온 주먹을 쳐낸 석찬이 훈타의 턱에 주먹을 날렸다.
우지끈.
“쿠엑!”
턱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훈타가 벽에 박혔다.
“커헉!”
훈타의 코와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훈타는 개의치 않고 공격을 이어 나갔다.
‘회복…한 건가?’
이후로도 훈타는 석찬과 육탄전을 이어갔고, 쓰러져도 계속해서 일어나 그를 압박했다.
[뭐냐, 저 회복력은… 절대 이 층에 있을 수준이 아닌데?]
경이로운 회복력은 라우르조차 기함을 토할 정도였다.
‘조금… 까다로운데?’
동굴이 무너질 위험이 있더라도 조금은 진심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한 석찬이 주먹을 고쳐 쥔 순간이었다.
“잠깐만.”
진현이 석찬을 가로막았다.
“왜?”
“이번 싸움은 내가 마무리한다.”
“무슨 소리야?”
“내가 싸울 거니까, 너는 쉬고 있어.”
진현이 석찬을 밀치며 훈타 앞에 섰다.
“뭐하는 거야!”
“가만히 있어. 이 녀석과 먼저 싸운 상대는 나야. 그러니까 내가 마무리한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투기와 살기에 석찬도 결국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래, 한번 해봐.”
“고맙다.”
진현은 잔뜩 사나워진 눈으로 훈타를 올려다 보았다.
“약한 녀석은 옆에 빠져 있어라.”
“약한… 녀석?”
그 순간, 진현의 몸에서 진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이내 유형화된 마력이 사나운 기세로 훈타를 찔렀다.
찢어진 살 사이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훈타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뭐냐? 간지럽군.”
어느새 회복된 그의 모습은 오우거를 보는 것만 같았다.
“간지럽다고? 이건 어때?”
유형화된 마력의 색이 점점 더 진해졌다.
‘저건…’
강마력의 발현에 장내의 공기가 변했다.
“뭐냐, 그 특이한 마력은.”
대답 대신 진현은 훈타의 명치에 강펀치를 선물해 주었다.
“컥!”
훈타가 뒤로 밀려나는 일은 없었다. 명치에 큰 구멍이 있을 뿐이었다.
“지금 그게 중요해?”
본인이 했던 이야기를 돌려받자, 훈타의 표정이 구겨졌다.
꾸륵, 꾸륵.
훈타는 금방 메워진 구멍을 어루만지며, 진현에게 달려들었다.
퍽!
하지만 반응도 하지 못하고 당했던 좀 전과는 달리, 진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훈타의 공격을 반격해냈다.
“뭐냐, 그 움직임은!”
악에 받친 채 감정적으로 공격하는 훈타에 비해 진현은 침착하게 공격을 하나하나 보고 피한 뒤 적절하게 카운터를 찔러 넣었다.
‘그래, 이게 진현이지.’
그간 여러모로 얻어터지고 개싸움만 해서 평가가 절하됐지만, 지구에서부터 그의 명석한 싸움 스타일은 정평이 나 있었다.
특히 기술 없이 힘만 믿고 날뛰는 녀석을 제압하는 데 탁월했다.
‘상대를 잘못 골랐어.’
“큭, 강하군. 네 녀석.”
훈타의 머릿속에 진현에 대한 분석이 약한 녀석에서 강한 놈으로 변경되었다.
“그래, 강해야지. 그래야…”
‘저 괴물 같은 녀석들이랑 같이 다닐 수 있지.’
진현이 뒷말을 삼키며 진현의 주먹 주위에 일렁거리던 마력을 순식간에 증폭했다.
얼티밋 피스트, 이번에는 일반 마력 버전이 아닌 강마력 버전이다.
거대한 마력의 풍압에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찌그러질 듯했다.
게다가.
쿠구궁-
동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그간 있던 싸움으로 대미지를 받은 동굴은 지금의 거대한 마력을 버틸 수 없었다.
“이브, 보호막을!”
“네!”
이브가 동굴 주변에 수 겹의 강화 보호막을 쳤다.
“뭐냐, 그 마력은!”
“알 거 없어. 뒤져라.”
진현이 주먹을 뻗었고, 거대한 폭발음이 동굴 내에 울려 퍼졌다.
* * *
콰과광-!
투둑, 투두둑.
“크윽…”
귓가를 찌르는 폭음과 함께 동굴이 크게 흔들렸다.
쿠구궁…
충격 때문인지 탈리야의 주변 벽면이 무너져 내렸다.
‘위험해!’
쾅!
‘나, 살아 있어?’
다행히도 벽면 잔해는 탈리야에게 떨어지지 않았고, 이에 그녀는 내심 안도했다.
‘잘못했다간 최초로 돌에 깔려 죽은 드래곤이 될 뻔했어.’
놀란 포인트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랬다. 그래도 나름 호재라면 호재라고 할 일도 있었다.
‘약물의 효과가 다한 건가?’
검은 사내, 훈타가 말했던 신체 능력을 억제하는 약발이 어느 정도 다한 것인지 힘이 돌아오는게 느껴졌다.
“좋았어….”
잠시 후,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탈리야는 간단하게 자신을 구속하고 있던 사슬을 부숴버렸다.
‘이것도….’
탈리야는 팔에 차여진 마력 구속구를 노려봤다.
쾅! 쾅!
하지만 아직 힘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서 그런지 마력 구속구는 아무리 애를 써도 부서지지 않았다.
“제기랄, 거추장스러운 것.”
어쩔 수 없이 마력 구속구를 부수는 것을 뒤로하고, 탈리야는 훈타가 나갔던 문을 힘껏 잡아당겼다.
쿠르릉!
그러자 문 뒤로 쌓여 있던 막대한 양의 동굴 잔해가 일제히 탈리야 쪽을 향해 쏟아졌다.
“어… 어?”
와르르-
피할 틈도 없이 잔해 속에 묻힌 탈리야가 잠시 후, 산처럼 쌓인 잔해 사이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콜록, 콜록, 뭐야 이거?”
검게 물든 피부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탈리야의 시선은 잔해 너머로 살짝 드러난 통로에 고정되었다.
“저건…?”
그녀의 눈에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세 명의 남녀가 보였다.
“어, 탈리야?”
“거기서 뭐해요? 빨리 나오세요, 지지에요, 지지!”
가볍게 적들을 물리치고 자신을 구하러 와준 세 사람을 향해, 탈리야가 방긋 웃어 보였다.
“히히.”
이브의 도움으로 밖에 나온 탈리야는 세 사람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석찬. 진…현이랑 이브라고 했던가? 구해줘서 고마워.”
“다치신 데는 없어요?”
“없어. 알잖아, 나 드래곤인 거.”
“드래곤이 납치를 당해?”
“윽….”
뼈를 때리는 석찬의 말에 탈리야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나라도, 마력이 봉인된 상태에서 몇백 명을 한번에 상대하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야.”
마력의 봉인. 그 말에 석찬이 탈리야의 팔에 채워진 마력 구속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건가? 드래곤의 마력마저 봉인한 물건이?’
겉보기로는 여타 마력 구속구랑 전혀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탈리야의 마력을 완전히 봉인할 정도면 다른 것과는 다른 점이 분명 있을 터였다.
[잠시만.]
‘왜요, 라우르?’
[이거 아다만티움 아니야?]
‘예?’
아다만티움. 탑 내에 존재한다는 최강 금속 중 하나.
겉모습은 철과 다를 것이 없지만, 무게가 더 무겁고 강도는 일반적인 철과 비교 자체를 거부할 정도로 단단하다는 꿈의 금속이다.
‘아다만티움이라고요? 거짓말 아니에요?’
[난 이런 걸로 거짓말 안 하는 거 잘 알잖아. 잠깐만 근데 아다만티움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제 말이 그 말입니다.’
40층에서 모을 수 있는 모든 진귀한 물건을 보관한 탈리야의 레어에도 아다만티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력 구속구에 그 귀한 아다만티움이 들어갔다고?
[가능성은 있어. 아다만티움의 성질 몰라?]
‘아다만티움은 분명 마력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고. 마력의 흐름도 막고… 아.’
때문에 아다만티움으로 만든 방어구는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마력 운용자와 최악의 시너지를 낸다고 알렉산더에게 들었다.
석찬은 즉시 이 사실을 세 사람에게 알렸다.
“이브, 이거 아다만티움인 거 같아.”
“아다만티움이요?”
이브도 놀라 되물었다.
“확실히… 문헌에서 본 특징이 여럿 드러나네요. 그리고 이거, 아다만티움을 통으로 써서 만든 것 같은데요?”
아다만티움을 통째로 썼다면 탈리야의 마력을 봉인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나저나 아다만티움이라면 석찬도 조금 난감했다.
‘아다만티움이라면 부술 수도 없어.’
아다만티움은 마력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순수 힘으로 부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아직 석찬의 근력이 조금 부족했다.
그리고 이건 탈리야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열쇠가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니.”
한참 방법을 고민하던 찰나 탈리야가 입을 열었다.
“너무 신경 쓸 필요 없다.”
“신경 쓸 필요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한동안 마력 없이 살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괜찮겠어?”
걱정 어린 석찬의 물음에 탈리야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래 봤자 뾰족한 수도 없는 거 아닌가? 그러니 차라리 이렇게 살아보는 거지 뭐. 설마 마력이 없다고 이 몸이 누군가에게 또 기습당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실제로 당했잖아.”
“그…그건, 이번 한 번만이다!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큰일을 겪었음에도 밝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석찬은 내심 안심했다.
“그래, 그럼 돌아가자.”
“돌아가서 맛있는 밥이나 먹자고! 탈리야 님, 밥은 제가 사드릴 테니까 걱정 마셔요.”
“기대하겠다.”
“끝나고 티타임도 가지자고요. 맛있는 홍차를 하나 발견해서 말이죠….”
“홍차는 무슨 맛이냐?”
화기애애한 분위기 네 사람은 마을로 돌아갔다.
* * *
석찬 일행이 떠나고 얼마 뒤, 무너진 동굴 안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훈타와 마찬가지로 검은 후드로 온 몸을 가린 사내였다.
훈타의 피가 흩뿌려진 장소에 도착한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실패한 건가.”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소멸한 훈타에게 실망감을 느낀 사내는 동굴을 벗어나려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이 냄새는…?’
코를 킁킁거리던 사내의 표정이 급속도로 찌그러졌다.
‘이 마력의 냄새는…’
사내는 아무 말 없이 얼굴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긴 흉터를 매만졌다.
‘오랜만이야 이 마력은… 노랑? 아니, 초록인가?’
색, 그것은 분명 마력의 등급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거야 원, 아주 재밌어지겠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사내의 모습이 흐릿하게 사라져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