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뭐, 납치?”
정신을 차리고 상황 설명을 들은 진현이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응.”
“무슨 일이래? 분명 드래곤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 애?”
“맞아. 구속구 같은 거에 당한 모양이야.”
석찬은 과거 1층에서 겪어봤던 마력 봉인 사슬을 떠올렸다.
“드래곤한테 구속구가 작동해요?”
“몰라. 근데 정황상 그래.”
“어쨌든 납치면 빨리 가야겠네요.”
“그래야지.”
석찬의 눈이 다시금 녹색으로 빛났다.
“그나저나 다시 들어도 믿기지가 않네요. 신이라니.”
“그러니까 말이야.”
“…….”
사정을 설명하던 중, 석찬은 라우르에 대한 사실을 말하기로 결정했다.
라우르 또한 반대하지 않았다.
[뭐, 저 녀석들은 믿을 만한 녀석들인 것 같으니까. 대신 입단속 똑바로 시켜라.]
‘물론이죠.’
그렇게 라우르의 진실을 알게 된 진현과 이브는 석찬의 녹색 눈에 대해 연신 감탄했다.
“신의 눈이란 말이지… 캬아. 간지네.”
“완전 예쁘다. 진짜 마력의 흐름이 다 보여요?”
“완전 사기.”
“그래. 사기지.”
그런 만큼 지속 시간이 짧고 사용 후 눈이 실명할 것같이 아프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 눈이 없었다면 납치 사실을 알았어도 탈리야가 어디에 있는지 감조차 잡지 못했겠지.’
다시 한번 라우르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고마울 필요까지야. 말했잖냐. 이번 일은 중요하니까 예외적으로 도와주는 거라고.]
‘그래도 감사해요.’
[진짜 고마우면 빨리 강해져서 내 영혼 조각이나 찾아줘라.]
‘물론이죠.’
이동하다보니 석찬 일행은 어느새 한 동굴 앞에 도착했다.
“이런 데에 동굴이 있네요.”
“여기야?”
“그런 것… 같아.”
동굴 안을 바라보는 석찬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겉으로도 음습해 보이는 동굴 안에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마력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이 기분 나쁜 마력. 뭔지 알 것 같군.]
‘알 것 같다고요?’
[그래, 아마도….]
푸드득-
그때 동굴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준비해, 온다.”
그 순간 무언가가 석찬을 향해 날아왔다.
콰직!
“케에엑….”
석찬의 주먹에 정통으로 가격당한 무언가가 짧은 신음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이건…?”
부딪힌 것의 정체를 확인한 진현이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녀석은 개과 몬스터였다. 자칼과 비슷한 크기였지만, 특이하게도 앞발에 비정상적으로 긴 발톱이 달려 있었고, 등에는 박쥐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역시, 키메라군.]
“키메…라?”
무심결에 몬스터의 이름을 언급하자 이브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키메라에 대해 아세요?”
“어… 아니?”
“그분이 말해주신 거에요?”
그분이란 라우르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어. 혹시 키메라에 대해 알아?”
“네, 아버지에게서 이름을 들은 적이 있어요.”
이브가 천천히 어렸을 적 알렉산더가 해줬던 이야기를 되새겼다.
때는 이브가 아직 어린아이 티를 내지 못할 정도로 옛날.
밤마다 잠을 안 자겠다고 떼를 쓰면 알렉산더가 말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이브, 빨리 안 자면 키메라가 와서 잡아간다!’
‘키메라가 뭐예요?’
‘키메라는 말이지… 여러 종류의 몬스터가 마구 합쳐진 괴물이야. 지능이 아주 높아서 우리 이브처럼 예~쁜 아기들이 밤에 안 자면 와서 잡아가 버린다?’
‘진짜요?’
‘물론이지! 이 아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저번에 늦게까지 안 잤을 때는 괜찮았는데….’
‘그건 말이지. 이 아빠가 너무 강해서 키메라들이 이브 곁에는 코털도 안 보이는 거란다.’
‘그럼 앞으로도 늦게 자도 돼요?’
‘그…그건 안 돼, 이브…’
“그랬던 기억이 있네요.”
“역시 사부…”
“저도 처음 봐요. 키메라라는 거, 굉장히 징그럽네요.”
[아무튼 키메라는 상대하는 데 조금은 조심해야 할 수도 있어. 여러 몬스터를 합성해 놓다 보니 별에 별 기술을 쓰는 녀석들이 다 있거든.]
‘참고하겠습니다.’
“안에도 계속 키메라가 나오는 건가?”
“마력을 보아서는, 그럴 거야.”
석찬의 예측은 정확했다. 동굴 속에는 굉장히 많은 수의 키메라가 포진되어 있었다.
“시스템이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면, 사람이 만든 거겠지?”
진현의 물음에 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은데, 사람이 만든 것치고는 꽤 대단한데요?”
그렇다.
별로 위협이 되지는 않았지만, 동굴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키메라가 점점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씁, 따가.”
어느 정도 안으로 들어오자, 강마력을 두르지 않은 진현의 피부에 상처를 낼 정도의 키메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심해요.”
“괜찮아요.”
여태껏 지루해 보이던 진현의 눈빛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다 뒤졌어.”
조금은 진심으로 싸우자, 키메라는 다시금 맥없이 쓰러졌다. 아무리 강해도 40층의 몬스터로는 석찬 일행을 막을 수 없었다. 석찬 일행은 파죽지세로 동굴을 돌파해 나갔다.
* * *
“이, 이건…”
자신이 만든 키메라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처리하며 다가오는 석찬 일행을 보며, 검은 사내는 혀를 내둘렀다.
“내가 말했지.”
탈리야가 웃으며 말했다.
“저 녀석들이라면, 여기까지 오는 데 5분도 안 걸릴걸?”
“닥쳐라….”
쾅, 쾅!
화면을 바라보는 사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젠장. 계획이 완전히 뒤틀렸어.’
본래 자신의 계획은 적당한 실험체를 구해 평소처럼 키메라 연구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어디선가 굴러온 돌들이 자신이 예쁘게 세팅해둔 돌들을 하나둘씩 부숴버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힘을 보아하니 자신의 ‘정예’로도 녀석들을 막기는 버거울 듯했다.
‘내 새끼를 쓴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겠지만, 혹시 몰라. 그걸 써야 하나?’
사내의 손에 작은 캡슐 하나가 생겼다.
‘일단 혹시 모르니….’
사내는 캡슐을 품은 뒤 황급히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저건… 뭐지?’
방금 사내가 쥐었던 캡슐.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신체 능력이 크게 하락한 탈리야였지만, 그 안에 담긴 무시무시한 것은 잘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두려움을 느끼는 존재라니.’
물론 몸을 완전히 회복한다면 거들떠도 안 볼 수준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탈리야는 생각했다.
‘조금은 위험할 수도 있겠어.’
마침 사내가 끄지 않은 화면에 석찬 일행과 사내가 만난 모습이 비쳤다.
‘석찬….’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탈리야는 속으로 석찬의 승리를 간절히 응원했다.
* * *
“쿠어어!”
어느 기점부터 키메라가 급격하게 강해졌다.
쾅!
상체는 인간이지만 하체는 말인, 지구에서는 켄타우루스라고 불리는 키메라가 석찬을 향해 할버드를 내리찍었다.
“예리한데?”
우지끈!
할버드를 발로 차 부러뜨린 석찬이 녀석의 얼굴에 연타를 꽂아 넣었다.
“꾸에엑!”
“정리 다 됐어?”
“거의 다!”
푹-
“키에에엑!”
진현 또한 발이 칼날로 되어 있는 거미의 배를 꿰뚫으며 전투의 끝마침을 알렸다.
“생각보다 강하네.”
“그치?”
건틀렛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낸 뒤, 석찬은 키메라의 시체를 살펴보았다.
‘역시, 사람이야.’
설마 했는데, 키메라의 상반신은 자신과 같은 사람이었다. 사람이 재료가 된 키메라는 생각보다 많았다.
“왜 사람한테까지 이런 짓을….”
분노에 찬 이브의 마력이 사납게 요동쳤다.
“빨리 주동자를 찾아 족치자.”
“그래요.”
그때, 석찬의 마력 감지망에 무언가 포착되었다.
“잠깐만, 조용히 해봐.”
탁, 탁.
곧이어 발소리와 함께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예까지 쓰러트리다니, 강하군.”
“너는 누구냐.”
“보면 모르겠나?”
사내가 유쾌한 표정으로 석찬 일행이 쓰러트린 키메라를 가리켰다.
“저것들을 만든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으면 된다네.”
“너였냐. 저런 걸 만든,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녀석이?”
“이런, 난 신성한 연구를 했을 뿐이라네.”
“신성한 연구?”
되도 않는 개소리에 이브의 마력이 검은 사내의 목을 죄였다.
“커헉!”
“신성한 연구라고? 같은 인간을 희생해 저런 괴물을 만들어내는 게?”
“주… 죽여라!”
그 순간 사내의 등 너머에서 무언가 날아왔다.
‘위험해!’
캉!
진현이 이브의 앞으로 달려가 날아온 것을 쳐냈다.
“이건….”
동굴 벽에는 날카로운 단검이 박혀 있었다.
뒤이어 한 남자가 달려왔다.
쾅!
“너는….”
석찬과 맞부딪친 남자의 모습은 괴기하기 짝이 없었다.
“…….”
대부분이 천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드러난 맨살 곳곳에는 수술 자국 같은 흉터가 가득했고, 눈은 초점이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또한 인간이었다.
“내 작품 중 최고인 녀석이지. 어디 한번 녀석을 상대해 보겠나.”
시선이 분산된 틈을 타 자유가 된 검은 사내는 뒤로 물러났다.
“너…”
“웬만한 층의 보스급이니, 아무리 네 녀석들이라도 애 좀 쓸 거야. 크하하!”
“애 좀 쓴다라… 하하.”
삼류 악당처럼 웃는 검은 사내의 모습에 석찬이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어떻게 할까. 진현이 네가 처리할래?”
“그럴까?”
탕!
마력으로 키메라를 밀쳐 낸 석찬이 뒤로 물러났고 진현이 나섰다.
그 모습에 검은 사내가 조소했다.
“뭐냐? 설마 혼자 상대하려는 것이냐?”
“응. 나만 해도 충분할 것 같아서.”
“건방진 녀석, 말이 짧군. 죽여버려라!”
“…….”
키메라는 말없이 허리춤에 매달린 단검을 뽑은 뒤 진현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콱!
하지만 단검은 건틀렛에 손쉽게 막혔다.
“조금 따끔하네.”
진현이 오랜만에 마력을 마음껏 해방했다.
“이 마력은…?”
“오랜만에 한번 날뛰어볼까?”
콰직!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현의 주먹이 키메라의 명치를 강타했다.
쿠구궁!
그대로 날아간 키메라가 동굴 벽에 처박혔다.
“크윽?”
“당신이지? 탈리야 님을 데려간 놈이?”
“그게 누구지? 그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어나라!”
사내의 말에 키메라가 좀비처럼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진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또 덤빈다고?”
콰직!
“……”
콰직!
하지만 몇 번이고 떼어내도 키메라는 끈질기게 진현에게 달라붙었다.
“이 정도로는 안 죽는다 이거지….”
진현은 마력을 응축하기 시작했고, 마력으로 이루어진 주먹 형상이 나타났다.
“그 힘은… 도대체 무슨 스킬이냐?”
“헤헤.”
일전의 대련에서 선보인 진현의 새로운 비기인 ‘얼티밋 피스트’, 그것의 축소판이었다. 얼티밋 피스트에 비해 크기가 훨씬 작아 주먹 위로 희미하게 또 다른 주먹 형상이 나타난 것이 전부였다.
크기가 작아진 만큼 위력이 훨씬 줄었지만, 몸에 가해지는 부담도 적고 위험 요소도 적어 진현이 자주 연습한 기술이었다.
진현은 이 기술을 마력 피스트라고 명명했다.
“이걸로 끝이다.”
진현이 주먹을 뻗었고, 키메라의 몸이 소멸되었다.
소멸.
말 그대로 흔적조차 안 남기고 사라진 키메라의 모습에 사내가 웃음을 멈췄다.
‘방금… 무슨…’
“보았느냐. 이것이 나의 마력 피스트다.”
자신의 오른팔을 쓰다듬는 진현을 보며 석찬은 생각했다.
“꼴값 떤다, 진짜.”
아니, 본심이 무심코 튀어나왔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브도 짧게 동의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