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후암.”
잠에서 깬 석찬은 반쯤 감긴 눈과 함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늘따라 잠을 푹 잔 것 같은데?’
평소에는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보니 잠도 옅고 적게 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그동안 피로가 많이 쌓인 탓인지 잠을 푹 잤다.
자는 사이에 누가 칼로 찔러도 모를 정도였다.
‘그래도 하루쯤은 이러니까 좋네.’
피로가 완전히 회복되어 몸이 더 날래진 것 같았다.
가볍게 씻고 나온 석찬은 아직까지 잠들어 있는 이브를 조심스럽게 깨웠다.
“이브, 그만 일어나자.”
“네… 에? 벌써 아침이에요?”
“응.”
“벌써 시간이…?”
중천에 떠 있는 해를 보며 이브가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푹 잔 것 같아요.”
“나도.”
“씻고 나갈 테니까 먼저 내려가 계세요.”
“그래.”
화장실로 들어가는 이브를 뒤로하고 문밖으로 나오던 찰나였다.
‘음?’
석찬의 감각에 이상한 것이 포착되었다.
“흠….”
평범한 여관 복도였다.
‘뭔가 이상한데?’
하지만 컨디션 회복과 더불어 더욱 날카로워진 석찬의 감각이 소리쳤다.
‘이질적이다.’
주변과 잘 어우려져 있는 듯했지만, 한 부분만 조금 더 깨끗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전혀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겠지만, 석찬은 달랐다.
‘마치… 일부러 흔적을 지운 것처럼….’
게다가 전혀 정체 모를 마력의 잔향도 남아 있었다.
석찬의 눈매가 좁아졌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그러고 보니.
“탈리야?”
탈리야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드래곤인 그녀의 마력은 마력 운용자와 비슷하면서도 좀 더 특이해 어디에 있든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수없이 마력 탐지를 사용했음에도, 그녀의 마력을 느낄 수 없었다.
‘설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복도에서 뭐하고 계세요?”
어느새 머리를 다 말리고 나온 이브가 물었다.
“아, 이브. 탈리야가 안 보여서.”
“탈리야요? 밑에 없어요? 진현 씨는 모르고요?”
이브와 진현 또한 탈리야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저녁 식사 중에 그녀가 드래곤임을 밝히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는 둘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물론 식사 중에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졌고, 말을 편하게 하는 것에 대해 탈리야도 전혀 불편하게 느끼지 않았다.
“마력 감지는 해봤을 거고, 아직도 안 찾아져요?”
“응.”
“설마 레어로 돌아간 건가?”
“그건 아닐 거야.”
물론 레어로 돌아갔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석찬의 감이 말했다. 지금 느껴지는 이질감과 탈리야가 사라진 것에는 분명한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라우르.’
[오냐. 마음대로 해라.]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아셨어요?’
[부분 강신 써도 되냐고 물어보려는 거 아니냐? 딱 보면 알지.]
말하지도 않았지만 라우르는 석찬의 생각을 완전히 꿰뚫고 있었다.
‘그런데 반대하지 않으시네요?’
부분 강신을 가르쳐준 이후, 라우르는 항상 부분 강신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때문에 탈리야와의 대련 같은 논외의 일이 아니면 부분 강신의 ‘ㅂ’자도 꺼내지 못했던 석찬이었다.
[이번 일은 상황이 다르지. 만약 탈리야란 녀석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건 정말 큰일이니까.]
‘라우르가 신경 쓸 정도로요?’
[그래.]
라우르의 확답에 석찬이 내심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하면 확답을 잘 안하는 그가 장담할 정도의 사안이라니.
[솔직히 말해 드래곤과 유대를 튼 너만 해도 이미 위험 대상 중 하나야. 아마 위쪽의 빌어먹을 새끼들이 너에 대한 평가를 2단계는 더 높였을걸?]
‘그 정도예요?’
[드래곤이란 그런 존재다. 그 녀석이 새끼라는 점을 참작해야겠지만,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새삼 드래곤의 위대함을 실감했다.
[만약 드래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한다면… 위쪽에서 개입이 일어날지도 몰라.]
‘개입이요? 페널티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라우르의 두 번째 영혼 조각을 얻으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였다. 위쪽의 존재, 즉 라우르와 같은 신이나 천사들이 탑에 개입하면 그에 상응하는 페널티를 얻는다.
실제로 천사장 에피아 같은 일부 천사들이 석찬에게 페널티를 주려다가 역으로 꽤 많은 페널티를 받기도 했다.
[녀석들 입장에서 드래곤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거에 비하면 페널티 정도야 껌이라고 생각할 거다. 그러니까 빨리 부분 강신을 써라! 무슨 일 생기기 전에!]
‘옙.’
석찬의 눈이 녹색으로 변했다.
“그 눈은?”
신의 눈을 본 이브가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미안, 나중에 설명해줄게.”
넓어진 시야와 도형화된 마력 회로를 바탕으로 석찬이 추적에 나섰다.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맞았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라우르의 눈으로 본 여관의 모습은 처참했다.
완전히 부서졌던 벽이 마력으로 봉합되어 있었고, 마력으로 강화한 시력으로는 볼 수 없던 미세한 핏자국들이 발견되었다.
‘꽤 큰 전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자고 있었다고 해도 어째서 내가 기척을 느끼지 못한 거지?’
전투의 흔적을 살펴볼수록 새로운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잠이 깨지 않은 것인가.
‘설마… 수면제 같은 걸 살포한 건가?’
하지만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수면제는 엄연한 독이다. 마력 운용자들은 기본적인 독 내성이 있는 데다 석찬은 독에 대한 면역까지 있다.
[아니. 독을 쓰지 않고도 충분히 강한 수면제를 만들 수 있어.]
‘그래요?’
[그래. 예전에 나를 노린 한 어리석은 신이 썼던 방법이지. 내가 독 면역이라고 그렇게 했던 모양인데… 어림도 없었지.]
‘젠장.’
너무 안일했다.
초조함이 커져가는 가운데, 석찬이 추적을 계속했다.
‘이쪽이군.’
희미한 마력의 실이 이끄는 대로 석찬이 길을 나섰다.
“같이 가요!”
“뭔데, 뭔데…? 같이 가….”
이브와 잠이 덜 깬 진현 또한 석찬을 따라 나섰다.
* * *
“음…?”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탈리야는 눈을 떴다.
“큭.”
온몸에서 심한 격통이 몰려왔다. 옷은 이곳저곳 찢어져 있었으며, 몸 곳곳에 자잘하고 큰 상처들이 가득했다.
모두 전투로 입은 상처들이었다.
‘빌어먹을 인간 놈들… 치사하게 그렇게 많이 몰려오다니.’
탈리야가 지난밤에 있었던 전투를 회상했다.
‘으랴!’
‘어서 포획해라!’
마력이 봉인된 상태로 날뛰는 그녀와 사방에서 떼거리로 몰려드는 검은 외투의 사내들.
마력을 사용할 수 없어도 탈리야는 강했다. 드래곤의 기본적인 신체 능력을 이용하여 사내를 차근차근 쓰러트려 나갔으나,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정도로 끊임없이 나오는 사내들은 계속해서 그녀를 압박했고, 수 시간의 공방 끝에 탈리야는 쓰러졌다.
‘어서 회복을….’
하지만 무슨 조치를 취했는지 회복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다. 게다가 마력이 봉인된 탓에 본체로 돌아가고 싶어도 마력이 단 한 톨도 움직이지 않았다.
‘젠장.’
끼이익.
그때 쇠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왔다.
빛 사이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저 녀석은….’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사내였다.
“잘 있었나?”
“날 여기로 끌고 온 것이 네 녀석이냐, 인간.”
탈리야의 눈에서 가공할 만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사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아직도 살아 있는 눈빛이군. 지금 네 녀석이 처한 상황은 알고 그런 행동을 하는 건가?”
“닥쳐라, 인간.”
“말투가 특이하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일까? 사내는 탈리야가 인간인 줄 아는 것 같았다.
“나를 이곳에 끌고 온 이유가 뭐냐?”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연구를 위해서네.”
“연구?”
“그렇다네, 강한 자들의 신체를 연구하는 것이 내 일이지.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멋지다고?”
탈리야의 물음에 사내가 신나서 말을 이었다.
“멋지지 않은가? 강자의 몸을 분석하는 이 기쁨은… 해보지 않으면 모르지. 근 몇십 년간 마음에 드는 녀석을 찾지 못해 아쉬웠건만… 네 녀석이 눈에 띄었지.”
“내가? 언제?”
“어제 구매할 것이 있어 갱신소 주변을 들렀다가 우연히 남자 넷을 때려 잡는 네 녀석을 보았다. 정말 천운이었지.”
사내가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네 녀석은 대단하다. 마력을 완전히 봉인했음에도 그 정도의 전투력에… 회복력도 엄청나. 네 녀석의 회복력을 억제하는 데 굉장히 많은 돈을 들였지.”
이후로도 사내는 계속해서 탈리야에 대해 주절댔다.
“그래서 내 몸을 가지고 뭘 한다는 거야.”
“말했잖나. 연구한다고. 네 녀석은 특등품 중의 특등품이니 특별히 소중히 다뤄주마.”
그 말과 함께 사내가 스위치를 내렸다. 그러자 컴컴했던 방 안이 밝아지며 주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눈앞에 벌어진 충격적인 광경에 탈리야는 할 말을 잃었다.
방 안에는 수많은 시험관이 널려 있었고, 그 안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의 사람들이 들어 있었다.
한 사람은 몸이 절반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마저도 심하게 훼손되어 근육과 뼈가 그대로 드러났다.
또 다른 사람은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있었으며 동물의 신체와 결합된 자도 있었다.
그 외로도 수없이 많은 끔찍한 몰골의 사람들에 탈리야가 헛구역질했다.
“우욱.”
“너무 그럴 것 없네. 곧 네 녀석도 저렇게 될 테니 말이야.”
후드 안에 비친 사내의 붉은 눈은 광기에 찌들어 있었다.
탈리야의 몸이 떨려왔다.
드래곤으로 살면서 수십 년 동안 느껴본 적 없던 공포심이 일었다.
‘무서워….’
“그래, 그 눈빛이다.”
사내는 즐거운지 더욱 눈을 빛내며 탈리야의 몸을 만지려고 했다.
그때.
삐익- 삐익-
시끄러운 경보음이 두 사람의 귀를 강타했다.
‘이 소리는…?’
“쳇, 침입자인가.”
사내는 김이 샜는지 혀를 차며 시험관 사이에 있는 책상으로 갔다.
“뭐냐.”
사내가 무언가를 만지자, 책상 위로 거대한 화면이 나타났다.
화면 안에는 눈으로 덮인 산을 헤매는 세 사람이 있었다.
‘석찬이랑 이브? 그리고 진현?’
“뭐냐,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냐…”
사내는 낭패라는 듯 얼굴을 찌푸렸으나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어떻게 여길 알았는지 몰라도, 나의 경비병들을 뚫을 수는 없겠지.”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뭐?”
“저 녀석들이 네 녀석의 경비병이라는 것을 못 뚫을 걸, 어떻게 확신하냔 말이다.”
그 말에 사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 내 경비병들은 모두 특등품으로 제작됐으니 말이다. 웬만한 녀석들은 공격조차 하지 못하고 쓰러지지.”
“큭.”
탈리야가 웃었다.
“왜 웃는 것이냐?”
“그냥, 지금 네 녀석의 모습이 웃겨서 말이다.”
“뭐가 웃기다는….”
그때 화면을 지켜보는 사내의 눈빛이 바뀌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