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후우웅-
차디찬 겨울바람이 부는 40층 사냥터.
“쿠어어!”
거대한 흰곰이 사람들을 향해 앞발을 내리찍었다.
“막아! 막아!”
방패를 든 사람들이 곰을 막는 사이, 검을 쥔 자들은 곰의 측면으로 돌아가 녀석을 난도질했다.
하지만 곰의 가죽이 워낙 단단한 나머지 칼이 박히기는커녕, 손잡이를 쥔 손이 저려왔다.
“제길! 너무 단단해!”
“버프! 버프 좀 더 줘봐!”
정예 몬스터 폴라 베어.
한 마리 한 마리가 평범한 사람 열 명 정도는 거뜬히 상대하는 무시무시한 몬스터를 사냥하는 사람들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거북이도 아니고, 가죽이 너무 단단해.”
“저 단단한 가죽을 뚫어야지 마법을 퍼붓든 뭘 하든 하는데!”
“대장님! 뚫, 뚫립니다!”
방패를 든 자들은 서서히 균열이 커져가는 방패를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이번 사냥에 얼마나 많은 돈을 퍼부었는데… 이대로 끝나는 거냐….”
좌절하는 순간.
콰앙!
어디선가 날아온 화염구에 폴라 베어가 쓰러졌다.
“이건?”
“쿠어어!”
털 한 쪽이 새카맣게 탄 폴라 베어가 공격이 날아온 곳을 사납게 노려봤다.
콰아앙!
“쿠에에!”
그 순간 또 하나의 화염구에 직격한 폴라 베어가 신음을 내뱉었다.
“이게 무슨….”
폴라 베어.
일반인에게는 한 마리 한 마리가 가히 재앙인 몬스터. 그 가죽은 단단함도 단단함이지만, 무식하리만큼 높은 마력 내성 때문에 마법이 거의 통하지 않는 거로도 유명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40층에서 구할 수 있는 최상위 마법 스킬도 폴라 베어의 가죽에는 본래 위력 10분의 1 정도 피해밖에 못 입힌다고 알려져 있다.
‘상위 스킬이 아닌 일반 스킬로는 아예 대미지조차 안 박힌다고!’
그런데 그런 폴라 베어의 가죽을 마법으로 뚫는다고? 심지어 일반 스킬로 보이는 걸로?
사내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휘이이-
눈보라 너머로 지팡이를 든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저 사람은….’
깊게 눌러쓴 후드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드러나는 몸매나 체격으로 보아 여자인 것 같았다.
“설마… 저 사람이….”
사내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여자의 지팡이에서 거대한 화염구가 생성되었다.
콰앙!
‘빠, 빠르다!’
또다시 화염구에 정통으로 맞은 폴라 베어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옆에 있던 파티원이 확인해 보더니, 숨이 끊어졌다는 사인을 보내왔다.
‘스킬 세 방에 폴라 베어를 잡다니!’
상층의 존재인가 싶었지만.
‘아니야. 아무리 위층에서 온 사람들이라도 페널티를 안고 압도적으로 폴라 베어를 무찌르는 건 거의 불가능해.’
여러 생각이 드는 와중, 사내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생겨났다.
‘혹시… 50층 위에서 온 사람인가?’
가능성은 있어 보였다.
‘50층을 통과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괴물 같다고 했지.’
오랜 탑생 중에 만났던 여러 지인을 통해 얻은 정보를 종합한 결과, 사내는 여자가 50층 이상의 상층 존재라고 확신했다.
“저기….”
폴라 베어의 사망 여부를 확인하고 주변에 몬스터가 없는 것을 꼼꼼히 살핀 사내가 조심스럽게 여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
여자는 말이 없었다. 후드 안에 감춰져 있던 은안이 어둡게 빛났다. 그녀는 말없이 길을 지나쳤다.
‘뭐야?’
“잠시만요! 시체 가져가십시오! 당신이 잡은 거잖습니까.”
“상관없어요. 가져가든 말든 알아서 하세요.”
“예?”
홀로 잡은 시체를 포기하다니. 사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을 때 옆에서 누군가가 어깨 위에 팔을 걸쳤다.
“그냥 가져가세요.”
“우왁?! 누, 누구십니까?”
진한 흑발의 사내였다. 건틀릿을 낀 것으로 보아 격투가인 것 같았다.
“당신은…?”
“저기 저 친구 동료입니다.”
‘도, 동료? 그럼 이 자도….’
흑발의 격투가, 진현은 말없이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이브를 씁쓸하게 바라봤다.
석찬이 사라진 지 어느덧 일주일이 넘어간다. 그동안 여관 안에서는 비상이 일어났다.
야밤에 술기운을 해소하려고 밖에 나간 석찬이 돌아오지 않자, 이브와 진현을 비롯한 여관 가족들은 석찬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 가지 정보를 듣기는 했었다.
‘마을 밖으로 나갔다고 했어.’
그날 밤 경비를 섰던 자의 말에 의하면, 석찬이 명패를 던져 주며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고 했다.
‘왜 그 밤중에 나간 거지. 눈보라도 심했을 텐데.’
혹시 몰라 있는 마력 없는 마력을 다 짜내며 탐색도 해봤지만, 석찬의 마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애를 태우며 석찬을 기다린 지 어느덧 일주일. 이브의 레이더에 무언가 잡힌 것이다.
‘분명 석찬 오빠의 마력이었어.’
혹시 몰라 한 번 더 돌린 마력 탐지에서 잡힌 석찬의 마력.
거리가 멀어 희미하긴 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이는 석찬의 마력이었다.
그 길로 진현과 이브는 후레이 일가에게 이야기를 한 후, 석찬을 향해 마을 밖 여정을 떠난 것이 지난 두 시간 동안 있던 일이다.
“저… 저기?”
“응?”
“정말 시체를 저희가 가져도 되는 겁니까?”
사내의 물음에 상념에서 깨어난 진현.
“정말이라니까? 왜 사람 말을 못 믿어요?”
짜증 섞인 진현의 말투에 사내는 욱하기는커녕 오히려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그럼 시체는 저희가 가지는 걸로.”
현재 사내의 머릿속에 이브와 진현은 50층 이상의 강자로 인식되어 있는 상태. 감히 대들 생각을 못 했다.
“그래요. 나도 이만 가야겠어요. 더 시간 끌었다간 저 친구의 남자 친구 걱정이 하늘을 찌를 거라.”
“빨리 와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예이! 지금 갑니다!”
짧은 대화를 마친 진현은 이브에게 향했다.
“쿠어어!”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또 다른 폴라 베어가 진현을 덮쳤다.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또 다른 폴라 베어라니?
본래 폴라 베어는 일주일 동안 한 마리를 채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희귀한 몬스터. 그런 녀석을 하루에 두 번, 그것도 연달아 보다니.
그보다 남자가 위험했다. 사내는 남자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 그런데 그 순간,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우리 곰돌이. 며칠 못 봤다고 많이 컸네?”
“끼잉….”
폴라 베어가 진현을 향해 엎드리더니, 동공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딱 한 번만 봐줄 테니, 가라.”
진현의 살기 어린 말에 인간의 언어 따위는 알아들을 수 없는 폴라 베어가 등을 보이며 부리나케 도망갔다.
“저게 무슨….”
“진짜 가볼게요. 곰돌이는 위험하니까 여우나 다른 애들부터 먼저 사냥하고, 레벨업 해서 다시 도전해 보세요.”
“가, 감사합니다.”
순식간에 사라진 두 사람을 보며 사내와 파티원들은 두 눈을 껌뻑일 뿐이었다.
그때 파티원 중 하나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손뼉을 탁 치며 입을 열었다.
“아 맞다! 대장님!”
“뭐냐?”
“방금 그 사람들 있잖습니까.”
“그 분들이 왜.”
“저 그 사람들 압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자세히 말해 보겠나.”
“아니, 대장. 진짜 모르겠어요? 아까 그 여자, 은발의 천사잖아요!”
“은발의…천사?”
여전히 못 알아듣는 사내와는 다르게 다른 이들은 하나둘 여자의 정체를 깨닫고 놀라워하고 있었다.
“맞다. 대장 이런 거 아예 모르지. 그러니까 말이죠.”
그는 사내를 향해 이브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엄청난 미모와 괴물 같은 실력을 겸비한 올킬러의 파트너.
“올킬러? 그건 또 누군데.”
올킬러를 모른다는 사내의 말에 모든 파티원들이 탄식했다.
“아니, 대장. 이건 조금 심한데. 진짜 올킬러를 모른다고?”
파티원들은 답답해하면서도 올킬러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다.
1층 최대의 난제인 고블린 왕 처치, 베테랑 사냥꾼과 지부장과의 전투 승리 외에도 수많은 보스급 몬스터 사냥 등등, 석찬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부 들은 사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게 가능해? 들어온 지 3년도 안 됐다매.”
“그래서 올킬러의 다른 별명이 그거잖아요. 역대급 천재 괴물.”
“역대급 천재 괴물이라… 엄청나군.”
그런 명성을 가진 이라면 그의 손길이 닿은 옷을 기념품으로 보관해도 좋지 않을까.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쯤, 다른 파티원이 손을 들었다.
“대장 설마, 방금 그 남자가 올킬러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뭐, 아니야? 둘이 듀오라며.”
“요즘은 한 명 더 같이 다닌다고 들었습니다. 이름이 뭐였지. 킹갓코리안좀비? 맞나?”
“맞아. 뜻은 모르겠지만, 분명 그런 이름이었어.”
“이름 한번 더럽게 길어서 오히려 기억이 더 잘 나더군.”
“어쨌든 대장, 인상착의를 보아 방금 그 남자는 킹갓코리안좀비였을 겁니다. 이런저런 소문에 따르면 무력은 올킬러보다 몇 수 아래라고 합니다.”
“그런데 폴라 베어를 기세로 물린다고?”
“그 점은…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만약 녀석들 말이 사실이라면….’
과연 올킬러라는 녀석은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군.’
* * *
또다시 며칠이 지났다.
석찬을 만나러 이동하는 동안, 눈보라는 더욱 거세져만 갔다.
“젠장. 눈도 더럽게 많이 온다!”
방어막도 뚫어버릴 기세의 눈보라에 진현이 질색하면서도 꾸준히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이런 곳에 뭐 하러 간 걸까요. 석찬 오빠는.”
“글쎄요. 저도 정말 모르겠네요!”
“둘이 친구라고 했잖아요?”
“친구라고 뭐든 다 아는 건 아니죠.”
“바람이 거세네요. 조금만 쉬었다 가실래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눈보라를 막기 위한 방어막과 텐트를 설치한 뒤, 두 사람은 불을 지펴 몸을 녹였다.
“으아, 살 거 같다!”
“좋네요. 잠시만요.”
쉬는 와중에도 이브는 마력 탐지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석찬의 마력이 이곳저곳에서 느껴지는 까닭에 진짜 마력을 찾기가 여간 쉬운 게 아니었다.
파랑 등급의 이브조차 몇 번 다른 길로 샐 뻔할 정도였다.
“후… 어렵네요.”
“너무 무리하지 마셔요. 그러다 몸 상할라.”
“말씀만이라도 고맙네요.”
배도 채울 겸 여관에서 챙겨온 건조식품을 꺼냈다.
“식량도 얼마 안 남았네요.”
“그러게… 빨리 석찬이 녀석을 찾아야겠네요.”
눈보라가 거세 주변에 몬스터도 없어서 사냥조차 불가능했기에, 추가적인 식량 보급도 불가능했다.
‘이 정도면 아껴 먹어도 앞으로 하루 정도가 한계인가?’
“…….”
예상대로 하루가 지나자, 식량이 완전히 바닥났다.
당장 석찬이 무사한지도 정확히 모르는 마당에 식량마저 바닥나다니.
최악의 상황이었다.
“괜찮아요. 뭐, 하루 정도는 안 먹고도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진현이 애써 긍적적으로 말했지만, 사실 불안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탐사를 강행하길 사흘.
허기와 갈증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젠장.’
몸에 힘이 쭉 빠진다.
털썩.
이브 또한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고?’
나름 각광받던 루키들이 굶어 죽는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추위 속에서 신체 스탯이 낮은 이브가 먼저 정신을 잃었다.
진현 또한 최대한 정신을 유지해보려고 했지만, 눈이 감겨왔다.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구만….’
의식이 끊기기 직전이었다.
터벅-
발소리가 들렸다.
‘뭐지… 환청인가?’
터벅- 터벅-
환청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런 곳에 사람이 있을 리….’
턱.
그때, 발소리가 멈췄다.
흐린 눈앞에 발 형상이 보인다.
‘누구….’
자세히 얼굴을 살펴보니,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강석찬.
며칠간 그토록 찾아 헤매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왜 여깄어?”
“너희들이… 왜 여기 있…어? 야… 이… 개새꺄… 그게… 할… 말이냐…….”
진현은 가운데 손가락을 뻗으며, 그대로 의식의 끈이 끊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