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마력을 회복하고 기운을 되찾은 드래곤은 본체로 돌아가더니, 무려 부서진 산을 복구해 버렸다. 자연이 되살아나는 광경에 석찬은 다시금 드래곤의 강력함을 실감했다.
모든 것을 복구한 후, 다시 인간형으로 되돌아온 드래곤은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만족했다. 이번만 특별히 네 녀석이 행했던 무례들, 전부 용서해주도록 하마.”
다른 말은 없었다. 건조한 말투로 통보한 드래곤은 자리를 떠났지만, 부분 강신의 페널티로 석찬은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확실히 부분 강신이라고 해도 후유증은 꽤 있었다. 강신처럼 전신에 격통이 오고 마력 회로가 찢길 것 같지는 않았지만 팔이 뽑힐 것처럼 아팠다. 눈도 시큰거린 건 덤.
반나절 정도가 더 지나서야 어느 정도 통증이 가신 석찬은 후들거리는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뭘 어떡해. 돌아가야지.]
눈을 털어내는 데 마력을 뿌린 석찬은 그대로 마을 방향을 향해 달리려고 했다.
그때.
“잠시만요.”
익숙한 목소리의 여인이 석찬을 불러 세웠다.
“당신은….”
이름은 모르지만 드래곤의 부하인 여인이 여전히 무미건조한 표정과 말투로 말을 이었다.
“주인님께서 모셔 오시랍니다.”
데자뷰가 느껴지는 대사와 함께, 석찬은 그녀를 따라 완전 복구된 드래곤의 레어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 봐도 신기하네.’
드래곤이 복구한 레어는 무너지기 이전과 같은, 매우 깔끔하고 정돈된 상태였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부서졌는지조차 모를 것 같았다.
잠시 후, 석찬과 드래곤은 황금으로 가득한 방 안에서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여인은 두 남자 사이에 차를 두 잔 내려놓고는 그대로 방을 떠났다.
“…….”
“…….”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드래곤은 말없이 차를 들이켰다.
“그래서 날 부른 이유는 뭐지?”
“기다려 봐라, 인간. 어이! 차 한 잔만 더 내오거라!”
드래곤의 명령에 여인이 다시 방으로 돌아오더니 차병을 통째로 놓고 떠났다.
벌컥벌컥.
차를 통째로 들이켠 드래곤은 텅 빈 병을 보고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뭐야,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 속, 드래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간 너, 혹시 나랑 같이 살 생각 있냐?”
“응?”
[응?]
전혀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석찬과 라우르가 동시에 물음표를 띄웠다.
“같이 살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
“난 네가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다니.”
“네 녀석의 힘과 재능. 그 모든 것이 일반적인 인간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거랑 같이 사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그러니까요.’
“결론은 이것이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들었고, 동거하고 싶다는 것. 생활에 대해서는 안심해라, 최고 수준의 대우를 약속하지.”
‘젠장.’
말이 통하지 않는다. 드래곤과의 대화에서 느낀 점이다.
그때 드래곤의 입에서 몹시 충격적인 말이 나왔다.
“그렇게 나와 함께 살다가, 번식을 하는 것이다.”
‘번…식?’
설마 자신이 아는 번식이 맞나 다시 한번 생각하던 와중, 드래곤이 확인 사살 했다.
“번식을 통해 우리의 아이가 태어난다면… 생각만 해도 황홀하구나.”
‘이런 씨….’
[내가 뭘 들은 거지.]
다소 충격적인 발언으로 인해 석찬의 뇌가 정지했다.
‘진짜 뭘 들은 거지… 번식? 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는 드래곤 때문에 얼굴이 자동으로 찡그려졌다.
“지금 한 말… 진심이냐?”
“나는 언제나 진심이다, 인간. 아, 설마 내 모습 때문에 그러는 건가?”
드래곤은 남자의 형상을 띠고 있는 자신의 몸을 둘러 보았다.
“흠… 확실히 인간 남자 사이에서는 번식이 되지 않지.”
“그래, 그러니까 방금 한 말은 없는 걸로….”
그때.
펑!
드래곤의 주위를 둘러싼 연기와 함께 새로운 형상을 띤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모습은….’
지구였다면 갓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만한 소녀가 나타났다. 눈매가 동그래 선한 인상을 주었고, 머리와 눈 색은 남자일 때와 마찬가지로 맑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이러면 문제없겠지, 인간?”
목소리 또한 굉장히 고혹적이어서 잘못했다간 바로 홀릴 것 같았다.
“그럼 내 의견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겠다, 인간.”
“아니 아니 잠시만, 누가 동의했대?”
“인간들 사이에서 침묵은 긍정의 표현으로 알고 있는데.”
“도대체 왜 그렇게 알고 있는 거야….”
“과거, 이곳에 쳐들어왔던 녀석들이 가르쳐줬지.”
‘쳐들어온 녀석들? 설마 후레이가 말했던 녀석들인가.’
40층 마을을 저주로 빠트린 장본인들.
“녀석들은 내가 옳은 말을 할 때마다 입을 열지 않더라고. 그래서 인간들 사이에서 침묵의 의미가 동의인 줄 알았다.”
‘젠장. 그 새끼들.’
그들이 끼친 민폐는 저주가 전부가 아니었다.
“물론 침묵이 동의의 의미로 사용될 때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냐.”
“나와 함께 살기 싫은 것인가?”
“그래.”
어떤 미친놈이 드래곤과 함께 살 길 원하겠는가.
“나는 너를 위해 많은 편의를 봐 줄 의향이 있다. 레어의 온 하인을 아까 보았던 슬라임의 외형처럼 아름답게 바꿔줄 수도 있고, 상상도 못 할 재화를 줄 수도 있다.”
“필요없… 잠깐, 슬라임이라고?”
“그래. 몰랐느냐.”
확실히 몸이 터져나가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복구되는 모습에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정체가 슬라임이었다니.
“어쨌든 나는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다. 어떠냐. 나와 살 마음이 조금은 드나?”
“사양한다.”
계속되는 사양에 드래곤은 짜증내기는커녕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석찬을 바라봤다.
“신기하구나. 인간 남자는 아름다운 여자에게 약하다고 들었는데. 너는 아닌 건가? 혹시….”
‘혹시 뭐.’
“너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냐? 그래, 그래서 이 모습에도 넘어오지 않던 것이야.”
이상하게 흘러가는 결론에 혼란이 가속화되었다.
‘저게 뭔….’
[석찬아. 너 혹시 남자 좋아하냐?]
‘라우르, 뭔 개소리예요, 또.’
[생각해보니. 저 말도 일리가 있어가지고.]
“아니, 난 여자 좋아해.”
“헌데 이 모습에 넘어오지 않는 것이냐.”
“물론 지금 네 모습은 아름다워. 내가 여태껏 본 모든 여자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니까. 하지만.”
“하지만?”
“난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랑 사귈 생각이 없어.”
[호오? 너 그런 쪽이었구나?]
‘이게 뭐 어때서요. 나쁜 건 아니잖아요.’
[그래, 그렇지. 근데 조금 신기해서. 이미지랑 맞지 않는달까?]
‘제 이미지가 어떻길래.’
[카사노바처럼 여자들 막 후리고 다닐 줄 알았지.]
‘개소리예요, 진짜.’
석찬의 말에 드래곤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잠깐만, 얼굴은 또 왜 빨개진 건데.’
“그래도 나는 너를 놓을 마음이 없다.”
“잠시만,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나야? 드래곤이면서 왜 인간이랑 맺어지려고 하는 건데?”
그의 물음에 드래곤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강한 자에게 끌리는 것은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너는 내가 만나온 누구보다 강하다. 이 층의 ‘보스 몬스터’라고 여겨지는 놈보다도 말이다.”
“그래?”
“그렇다. 40년이 넘는 삶을 살아오는 동안, 너처럼 강한 인간은 처음 본다. 그리고 앞으로도 볼 수 없을 것 같다.”
드래곤은 우울한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이 곳에 드래곤은 나 하나뿐이다. 내가 아이를 낳지 않으면, 대가 끊긴다는 소리다.”
“탑을 오르면 되는 것 아닌가? 탑을 오르다 보면 다른 드래곤을 만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드래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것인가? 드래곤은 탑을 오르지 못한다.”
“음? 왜지?”
“균형 때문이다.”
“균형?”
“그래. 우리 종족은 갓 태어날 때부터 너무나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 때문에 층을 이동하는 순간 다시 원래 살던 층으로 돌아오게 된다.”
육체적 능력은 물론, 마법에까지 능통한 드래곤은 존재 자체가 재앙에 가까웠다.
‘생각해보니 나와 싸울 때도 제대로 된 마법을 쓰지 않았어.’
드래곤이 사용했던 마력 광선들은 전부 마력을 응축해 쏘아낸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속성을 부여하지도 않았다.
‘무승부는 무슨… 아직 한참 못 미쳐.’
만약 드래곤이 제대로 된 마법까지 썼다면? 아무리 석찬이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존재라고 해도 순식간에 죽었을 것이다. 라우르가 강신한다고 해도 양패구상이 최선이지 않았을까.
“때문에, 나는 너와 교제하고 싶다. 진심으로.”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고, 그녀의 요청에 석찬은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사정은 알겠지만, 너와 함께할 마음은 없어.”
“정녕 그런 것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드래곤.
“하지만 방법을 알아볼 수 있을 지도 몰라.”
“응?”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으로 묻는 드래곤에게 석찬이 답했다.
“네가 탑을 오르지 못하는 게 균형 때문이라고 했잖아? 그럼 균형을 맞추기만 하면 괜찮은 거 아니야?”
“그거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한번 알아봐. 탑을 오르는 것 자체가 아예 막힌 건가? 시스템은 뭐래?”
무언가 제재가 있다면 시스템이 알려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내게 시스템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응? 잠시만. 그럼 탑은 어떻게 오르는 거야?”
애초에 탑은 시스템이 있어야만 오를 수 있는 것 아니던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모르겠다. 그저 태어났을 때부터 이곳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탑을 이동하는 방법도 알긴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설명을 못 하겠다.”
“못 하겠으면 안 해도 돼.”
‘라우르, 뭔가 짚이는 거 없어요?’
[글쎄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탑은 시스템이 없으면 오르지 못하는 게 맞다. 그런데 저 녀석의 말도 거짓말 같아 보이지는 않아.]
‘일단 모른다는 거죠?’
[그래. 뭐, 영혼 조각이 더 모인다면 기억날지도 모르지.]
‘하여튼, 정작 이렇게 필요할 때는 도움이 안….’
[뭐라고? 파괴 수업을 멈출 때가 되었나 보구나.]
‘에헤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 대황 라우르 님. 제가 그만 실언을….’
[됐다. 됐어.]
“인간, 부탁이 있다.”
“부탁?”
드래곤의 입에서 부탁이라는 말이 나오니 뭔가 어색했다.
“번식하자는 말은 그만하겠다. 같이 살자는 말도 더 이상 꺼내지 않을 것이다. 대신 며칠만이라도 여기 머물렀으면 좋겠다.”
“이유는?”
“오랜만에 만난 강한 인간이기도 하고, 네 녀석의 기술에 흥미가 간다. 며칠 정도만 연구할 시간을 주면 안 되겠나? 부탁한다.”
‘며칠이라….’
잠시 고민하던 석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정도면, 그래 뭐. 알았어.”
“진짜인가?”
드래곤의 표정이 한껏 밝아졌다.
* * *
시간이 꽤 흘렀다.
드래곤은 몇 번이나 기술에 대해 물어봤고, 석찬은 적정한 선 내에서 질문에 답했다.
마력 운용에 대해서는 딱히 숨기지 않았다. 드래곤 자체가 마력 운용을 근본으로 하는 생명체이기도 했고, 처음 격돌할 때부터 자신이 마력 운용자라는 걸 이미 깨달았다고 한다.
드래곤은 석찬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마력 운용법에 대한 조언도 조금씩 해주며 석찬의 수준에 맞추어 대련도 해주었다.
서로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계속되는 대련으로 두 사람은 점점 더 친해졌고, 석찬은 드래곤의 이름이 ‘탈리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며칠 후, 시간이 꽤 지난 것을 느낀 석찬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돌아가는 거야?”
“그래, 아무래도 기다리는 애들도 있다 보니. 어쨌든, 지금까지 얘기했던 거 나도 계속 알아볼 테니까. 같이 살자든지 번식하자든지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고, 알았어?”
“어, 알았다….”
“그럼 이만 가볼게, 탈리야.”
“…….”
말이 없는 그녀를 뒤로 하고 석찬은 레어를 나섰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응?”
“나도 데려가줘!”
“어딜….”
“나도 마을로 갈래. 너랑 같이.”
“그…래도 되나? 아니, 왜 가려는 건데?”
“가고 싶어졌다!”
[변덕이 또 도졌군.]
‘그렇게 간단히 설명되는 건가요?’
[쭉 말했잖아. 쟤네는 원래 그런 애들이야. 당장 저 녀석 변덕이 아니었으면 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
“흠….”
고민이 됐다.
드래곤과 함께 마을로 돌아간다라.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제발… 부탁이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애원하는 탈리야의 모습에 석찬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조건이 있어.”
“무엇인가?”
“일단 첫 번째로 절대 본체나 다른 모습으로 변형 하지 마. 무조건 인간의 모습을 유지해야 해.”
“간단한 일이다.”
“다음으로… 아무도 죽이면 안 돼.”
“나에게 대적하지 않는 이상,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해.”
그렇게 뜻밖에 드래곤과의 귀환행이 결정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