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1층. 초심자의 마을.
얼마 전에 다시금 열린 튜토리얼 졸업자들이 막 새로운 세계에 대해 알아가고 있을 때쯤.
“와하하!”
영주성에서는 성대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와하하! 벌써 파랑 등급이라니! 장하다, 우리 딸!”
알렉산더는 잔뜩 술에 취한 채 이브를 끌어안고 있었다.
처음 이브와 석찬이 영주성에 들렀을 때는 그도 상당히 놀랐었다.
몇 달 동안 코빼기도 안 비춘 딸이 살짝 밉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이브가 일으킨 하나의 마법에 의해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콰과광!
‘이건….’
기가 라이트닝.
파랑 등급의 마력 운용자들이 사용 가능한 광범위 마법 중 하나로 위력 하나만큼은 상위 마법 중에서도 톱으로 꼽히는 마법이었다.
비록 층간 페널티로 인해 그 위용이 몇 단계나 다운그레이드 된 것이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영주성 너머에 보이는 숲 한가운데가 완전히 불타 사라져 있었다.
‘드디어 도달한 건가!’
직감적으로 그녀가 파랑 등급의 마력 운용자가 된 것을 깨달은 알렉산더는 기뻐서 바로 연회를 열었다.
“사부….”
하나뿐인 제자가 돌아온 것도 모르고 말이다.
“아빠… 수염 따가우니까 조금만 떨어져 봐요!”
이브가 손에 마력을 실어 알렉산더를 밀어냈다.
“크억!”
가슴을 움켜잡은 알렉산더가 힘없이 벽으로 밀려났다.
“싸부!”
“큭. 우리 딸. 이 애비를 이렇게 밀 수 있게 되다니. 애비는 감동했다. 흑흑.”
“…진짜 사부는…”
고통의 신음을 내면서도, 오히려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이 이질적인 상황에 조금은 알렉산더를 걱정했던 진현이 화를 내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하하….”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석찬은 물을 들이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연회가 시작한 지 어느덧 두 시간. 짧다면 짧은 시간 만에 연회는 말 그대로 개판이 되어 있었다. 뭐, 애초에 네 명이 하는 조촐한 파티가 연회라고 불린 것부터가 문제겠지만, 석찬은 별로 괘념치 않았다.
애초에 이번 연회는 마력 운용에 관해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알아서는 안 될 정보들이 넘쳐나서 자신을 포함한 알렉산더, 진현, 이브 이렇게 네 사람밖에 모일 수 없었다.
‘피곤해.’
두 시간 동안 술동무를 했더니, 피곤해 죽을 것 같았다.
‘차라리 샌드웜이랑 싸우고 말지.’
지금 침대에 누우면 곧장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슥.
눈을 비비고 있던 도중, 석찬의 옆으로 누군가가 조용히 다가왔다.
“석찬 님.”
고개를 틀자, 밝은 인상의 노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찰스 님?”
찰스 데이먼. 알렉산더가 처음 초심자의 마을 영주가 됐을 때부터 그를 옆에서 보좌해온 유능한 비서였다.
연회 중간에는 밖에 나가 있었는데, 아마 슬슬 마무리될 분위기라고 생각하고 들어온 것 같았다. 실제로 진현은 이미 방으로 돌아갔고, 이브 또한 알렉산더를 피해 연회장을 빠져나가서 남은 사람은 자신과 알렉산더밖에 없던 차다.
“오랜만에 뵈었는데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하군요.”
“찰스 님께서 죄송하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주인의 잘못은 곧 부하의 잘못과도 같은 법이니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 근황 이야기나 잡담을 하며 시간을 때웠다. 그러던 와중, 만취한 알렉산더가 먼저 바닥에 쓰러졌다.
“죄송합니다. 먼저 가봐야겠군요.”
알렉산더에게로 다가간 찰스가 그를 부축했다.
“주인님. 방에 들어가시죠. 많이 취하셨습니다.”
“어? 찰스냐? 찰스! 있잖아, 우리 딸이 말야….”
“파랑 등급의 마력 운용자가 되었다고요?”
‘어?’
찰스의 말에 석찬이 정신을 번뜩였다.
‘찰스가 어떻게 마력 운용자에 대해….’
물론 알렉산더의 측근으로 몇십 년 동안 있었으니 정보에 대해 알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알렉산더는 겉으로는 조금 부족해 보여도 필요 이상의 정보는 친한 사람에게조차 알려주지 않는 치밀한 사람이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주인님께서 이렇게 연회를 벌일 일이 그거 말고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가씨도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해진….”
대화가 길어질수록 석찬은 점점 위화감을 느꼈다.
‘어떻게 저렇게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거지?’
“많이 취하셨습니다. 이만 들어가시죠.”
말을 하며 찰스가 석찬에게 살그머니 신호를 보냈다.
‘물어볼 게 많겠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언제….’
‘빠른 시일 내에 제가 한번 들르겠습니다.’
일단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찰스는 평소의 환한 인상으로 돌아와 말했다.
“그럼 이만. 다음에 뵙죠.”
“…….”
[내가 볼 때 적은 아닌 것 같다. 너는 저 술주정뱅이 녀석이 그렇게 허술할 것 같냐?]
‘아니요.’
[그럼 일단 믿어 봐. 보니까 표정 보니 얼마 안 있으면 너한테 찾아올 거다.]
‘예.’
약간의 찜찜함은 있었지만, 라우르의 말처럼 일단 찰스를 믿기로 했다. 연회장을 빠져나오자, 메이드가 달려오더니 방을 안내해줬다.
“그럼, 편안한 밤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들어오자마자 옷도 안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석찬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곤해 죽을 것 같았는데.’
찰스 일 이후로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한 시간 정도를 뜬눈으로 보낸 석찬이 벌떡 일어났다.
[크어어!]
라우르는 코까지 골며 잘만 자고 있었다.
‘바람이나 조금 쐬고 와야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영주성 성문 밖을 나서니,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보였다.
“찰스.”
“음? 석찬 님 아니십니까.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왜….”
찰스는 피우던 연초를 바닥에 버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까 전에 많이 놀라셨나요?”
찰스의 물음에 석찬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은… 그렇습니다. 어째서 찰스는 마력 운용자에 대해 알고 있는 거죠? 혹시 알렉산더 님께서 알려주신 겁니까?”
차라리 맞는다고 대답해줘라. 그렇게 빌었다. 그렇다면 머리가 아플 필요까지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찰스는 고개를 저었다.
“반만 맞았다고 해두죠.”
“반만…?”
애매한 답변에 석찬이 고개를 기웃거렸다.
“잠시 걸으실까요?”
* * *
석찬과 찰스는 어색함 속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
“…….”
한동안 서로 말없이 걷기만 하던 두 사람은 어느새 마을의 안과 밖을 가르는 벽 앞에 도착했다.
“슬슬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반만 맞았다는 말의 뜻이 뭔지.”
그 말에 찰스가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휴우… 솔직히 이렇게 빨리 이야기하게 될 줄 몰랐어요. 아니, 처음에는 당신에게 이 비밀에 대해 얘기할 날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찰스는 천천히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뭐 하는 거지?’
웃통을 벗자, 찰스의 맨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저건….’
찰스의 몸은 조각 같았다.
칠십 세도 훨씬 넘어 보이는 노인의 얼굴과는 다르게, 몸은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근육으로 가득했다.
게다가 어떤 삶을 살아온 건지, 몸 구석구석에 상처가 여럿 나 있었다.
“그 모습은….”
“놀라셨나요? 아니….”
순간, 찰스의 기운이 바뀌었다.
“놀랐나?”
그의 친절한 얼굴이 날카롭게 변했다.
‘게다가 이 살기는….’
1층의 사람이 가졌다고 하기에는 너무 짙고 방대했다. 물론 알렉산더만큼은 아니지만, 살기의 방출만큼은 석찬을 아득히 넘어섰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마력으로 살기를 방어한 석찬이 마찬가지로 살기를 끌어올렸다.
오만한 눈으로 석찬을 바라보던 찰스가 그의 살기에 눈을 번뜩이더니 살기를 거뒀다.
“…추태를 보였군. 오랜만에 이 모습을 보였더니 살기가 주체되지 않았다.”
다시 옷을 입은 찰스는 민망함에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크흠…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그래, 이것부터 말해야겠군. 나는 1층에서 처음 주인님을 만난 것이 아니네.”
“그럼 설마.”
“그래, 자네도 눈치챘겠지만, 나는 주인님이 추방되기 훨씬 이전부터 주인님을 따르고 있었다네.”
“역시 그러십니까.”
찰스의 살기를 느낀 순간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는 절대 1층에서 썩고 있을 인물이 아니다.
“혹시, 찰스 님도 96층에 도달하셨습니까?”
그 말에 찰스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96층은 무슨. 내가 전성기 시절에 도달한 곳은 89층이 전부라네.”
“89층.”
그조차도 지금의 석찬은 범접하기 힘든 아득히 높은 층수였다.
“혹시 당신도 마력 운용자십니까?”
“아니.”
“그럼, 혹시… 스킬을 사용하시는 겁니까?”
“그래. 비록 나는 마력 운용자가 아니지만, 주인님을 모시면서 어느 정도 그에 대해 알게 되었지.”
“그렇군요.”
이제야 찰스가 마력 운용자에 대해 아는 이유를 알아냈다. 그런데, 방금 이야기에서 궁금증이 하나 더 생겼다.
“찰스 님. 분명 스킬을 사용하신다 그러셨죠?”
“그래. 마력 운용자가 아닌 자들은 스킬밖에 살 길이 없지. 나도 옛날에는 스킬 하나 얻겠다고 사경을 헤맸었지. 허허. 다 부질없는 짓이었거늘.”
“부질없다니요?”
“뭐, 주인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네라면 말해줄 수 있겠지. 바로 알프레드 올가 때문일세.”
“알프레드 올가….”
사냥꾼 길드의 길드장이자 알렉산더의 친형. 그와 함께 탑을 96층까지 오른, 알렉산더가 없는 시점에서 아마 탑 최강의 사나이는 그일 것이다.
“그가 왜….”
“이것 때문이지.”
찰스가 팔에 달린 팔찌 하나를 가리켰다.
천처럼 팔목에 딱 달라붙은 팔찌였다.
“이게 왜….”
“이건 구속구라네.”
“구속구?”
“자네, 이 팔찌를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나?”
“이 팔찌라면… 아.”
생각해보니 팔찌를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영주성 안.
영주성 안에서 본 메이드들도 똑같은 팔찌를 차고 있었다.
“영주성 안의 모든 인원은 이 구속구를 찬 채 살아가고 있다네.”
그 말에 또 의문이 들었다. 보통 구속구라고 하면 움직임을 방해하는 장치. 하지만, 구속구를 차고 있다기엔 너무 잘 움직였다.
“구속구의 역할이 정확히 뭡니까?”
“탑에서는 움직임 말고도 또 구속할 수 있는 게 한 가지 있지. 바로 스킬이라네.”
“스킬… 스킬도 구속할 수 있는 겁니까?”
처음 안 사실이었다.
“마력 운용자들이 희귀하고 강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그들은 스킬 구속구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까.”
‘아아. 그렇구나.’
스킬을 사용하지 못 한다니. 이게 복싱에서 팔을 쓰지 말고 시합을 하는 것이랑 뭐가 다르다는 말이냐.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뭐, 안 불편하다면 거짓말이지. 근데, 몇십 년이 지나니까 점점 이 몸에 익숙해져서 말이야. 이제는 멀쩡하네.”
‘…….’
태연하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석찬은 느낄 수 있었다.
찰스는 슬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과거 자신과 겹쳐 보인 탓일까? 석찬마저 더더욱 우울해졌다.
하지만.
‘이렇게 궁상맞게 있을 때가 아니야.’
새롭게 다짐했다.
‘기다리십쇼, 찰스. 몇 년, 아니, 몇십 년이 걸리든.’
알렉산더와 당신들을 그렇게 만든 새끼들을 다 잡아 족치고 당신들을 구해 주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