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으음….”
눈을 뜬 석찬. 그런 그를 반긴 것은 욱신거리는 오른팔이었다.
“큭….”
찢어질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지는 오른팔은 붕대로 칭칭 감싸져 있었다.
주변을 더 둘러보니, 정신을 잃기 전에 싸우던 광장이 아닌, 마을 안에서 머물고 있던 여관 내부가 보였다.
‘왜 여기지? 나는 분명 우베란 녀석이랑 싸우고 있었는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팔 외에도 멀쩡한 곳이 없는지 온몸에서 심한 격통이 흘러왔다.
결국 움직이는 것을 포기한 석찬은 창밖에 비치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일전에 일어났던 싸움을 떠올렸다.
‘맞아. 이겼었지.’
정신을 잃기 직전에 봤던 메시지 창.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사용한 ‘그 기술’로 얻은 승리였으니 말이다.
석찬은 천천히 수개월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때는 포이그 레바돈과의 싸움이 있은 지 얼마 후.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볼까?]
“다음 단계라면….”
[벌써 잊은 것이냐? 초록 등급이 되면 내 기술을 몇 개 알려준다고 했는데 말이지….]
새로운 기술이라는 말에 석찬의 눈빛이 금세 돌변했다.
“에이, 잊어 버리다뇨. 그런데, 드디어 알려주시는 겁니까?”
[그래. 내 화신이라는 놈이 맨날 어디 가서 얻어맞기만 하는 모습을 보려니 조금 힘들어서 말이야.]
“그건… 할 말이 없네요.”
최근 대부분의 싸움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포이그 레바돈과의 2차전을 제외하면 항상 큰 부상을 동반하는 석찬이었다.
[잘 들어라. 지금부터 내가 알려줄 기술은 ‘파괴’라는 것이다.]
“파괴? 이름은 굉장하네요.”
[이름뿐이랴? 장담컨대 파괴는 전 우주를 통틀어서 가장 강력한 기술이다.]
전 우주를 통틀어서 가장 강하다는 말에 석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가장 강하다고요?”
[가장 강하지. 아직 내 영혼이 육체에 붙어 있던 시절, 이 기술로 행성 다섯 개 정도는 가볍게 소멸시켰던 적도 있었고, 파괴신 녀석이 이 기술을 보고 무척이나 탐냈으니 말이야.]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행성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가볍게 날려버린다니.
하지만, 일전에 라우르의 기억에서 봤던 그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마냥 허풍은 아닌 듯싶었다.
꿀꺽.
[그래. 내가 직접 개발한 기술이기도 하지. 배울 준비는 됐나?]
“물론이죠.”
그렇게 시작된 파괴의 수련. 탑을 오르면서 라우르의 지도를 받은 지 몇 달이 되었을까. 석찬은 파괴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래봤자 사용은 고사하고 실마리만 안 정도였지만.
라우르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했다.
[다른 신들 중에서도 이 기술의 기역 자도 모르는 놈들투성이였어. 몇 달 만에 이 정도만 해도 괜찮은, 아니 엄청난 성과다.]
라우르는 다른 곳에서는 투덜대도, 파괴에 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가르침의 수준도 매우 높았다. 그 때문일까?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르자, 석찬은 파괴의 기초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파괴를 처음 썼을 때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잊지 못한다.
쿠구궁-
파괴의 힘은 거대한 산 하나를 통째로 무너뜨릴 정도로 엄청났다.
하지만, 파괴는 그 위력이 위력인 만큼 리스크도 엄청났다.
우선 사용자에게 가는 부담.
파괴처럼 큰 힘은 당연하게도 사용자의 몸에 큰 부담을 준다. 그리고 파괴의 부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때도 팔이 뽑혀 나가는 줄 알았지.’
오른팔을 아예 움직이지 못할 것만 같은 지금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두 번째로는 바로 그 성공 확률에 있었다.
‘지금 내가 파괴를 성공시킬 수 있는 확률은 거의 30%. 아니지, 끽해야 10~20%인가?’
10번 중에 8~9번은 실패. 이 말인즉슨 파괴는 아직 실전에서 사용하기에 부적합한 기술이라는 거다.
‘성공했으니 천만다행이지….’
만약 기술은 실패하고 온전히 페널티만 받았더라면?
오싹- 오싹-
상상만 해도 온몸이 떨렸다.
‘그나저나, 역시 지금 이브의 치료 마법으로는 어려운 건가?’
석찬의 정신이 엉망이 된 오른팔로 향했다.
이브의 치료 마법은 굉장하다.
절단 정도의 위중한 부상이 아닌 이상에야 어지간한 상처는 모두 가볍게 치료할 수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 그런 이브의 마법으로도 파괴의 부담은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앞으로 파괴를 사용하는 것은 자중해야겠어.’
이번 승리는 오로지 운에 의한 것이지, 절대 실력이 아니었다.
그렇게 다짐하고 있을 때쯤,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냐?]
‘라우르?’
고개를 돌리자, 어디서 났는지 모를 선글라스를 끼고 태연하게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라우르의 모습이 보였다.
이벤트 퀘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어디 있나 했더니 놀고 있었나 보다.
‘그건 뭐예요?’
[보면 모르냐? 여기 오렌지 주스 맛있더라.]
‘뭐 마실 수 있었어요?’
[영혼만 남았어도 명색이 신인데, 이 정도는 껌이지.]
이후로 말없이 주스를 마시던 라우르가 선글라스를 걷었다. 그러자, 약간의 걱정과 분노로 물든 눈이 보였다.
[자, 말해 보거라. 파괴의 사용 이유는? 분명 내가 아직 실전에서는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조심해라. 넌 나의 유일한 화신이다. 네가 죽으면, 누가 내 영혼 조각을 모으냐? 엉?]
‘그러게요,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라우르의 표정이 조금은 온화해지는 게 느껴졌다.
‘진현이랑 이브는 어딨는지 알아요?’
[엉. 조금 전까지 너 보다가 잠깐 바깥에 바람 쐬러 나갔다.]
‘두 사람은 괜찮아요?’
[멀쩡해. 다친 놈은 너뿐이다. 아이고, 부끄러워라. 이런 놈을 내 화신이라고 받아주다니.]
라우르의 쫑알거림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유일한 친구들이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네가 붙었던 놈. 얼마나 강했냐? 얘기 좀 해봐라.]
‘아, 그 녀석이요? 어인족의 왕이라고 했는데… 라우르?’
‘어인족’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라우르의 표정이 바뀌었다.
[으음… 어인족? 왕이라고?]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인족을 아시나?’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몇천 년 이상 존재한 라우르가 어인족을 모른다는 것이 더 이상했다.
잠시 고민하던 라우르는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네가 붙었던 왕 이름이 누구냐?]
그의 물음에 석찬은 일전의 싸움에서 들었던 어인족의 왕의 이름을 떠올렸다.
내 이름은 우베. 위대했던 푸른비늘족의 13대 왕이다.
‘분명 우베라고 했어요.’
[우베?]
아무래도 모르는 눈치였다.
‘네, 푸른비늘족의 13대 왕이라고 했는데, 정말 강했어요.’
[푸른비늘족? 아, 혹시 그 우베라는 놈, 그 친구의 후손인가?]
‘그 친구요?’
[있어. 그런 녀석이.]
말을 하는 라우르의 눈에는 그리움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굳이… 물어보지는 말아야겠다.’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나저나, 그 녀석의 후손이라면 그렇게 약할 리가 없는데, 어떻게 너 같은 녀석한테 졌냐?]
‘글쎄요. 제가 생각보다 많이 강했나 보죠?’
[개소리 집어치워라. 아직 제대로 된 파괴도 못 쓰고 그렇게 골골대는 놈이 뭘 강하다고.]
‘크흠….’
[그나저나, 고작 30층에서 이 꼴이라니. 앞으로 더 빡시게 가르칠 거니까, 각오해라.]
그 말에 석찬이 씩 웃었다.
‘바라던 바입니다.’
“휴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석찬. 그때,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뜩 떠올렸다.
‘아, 맞다!’
[뭔데?]
‘전리품이요.’
[무슨 전리품?]
‘어인족 왕을 잡았잖아요. 이벤트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잡는 히든 보스 몬스터다. 히든 보스 몬스터들은 모두 그 이름에 맞게 보상도 대단했기에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과연….’
석찬은 잔뜩 부푼 마음을 가지고 퀘스트 창을 열었다. 보스 몬스터 보상을 모종의 이유로 제때 받지 못하면 퀘스트 보상 창에서 추후에 획득할 수 있었다.
퀘스트 창을 열자, 반짝거리는 보스 보상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잊힌 어인족의 왕, ‘우베’를 처치하셨습니다.]
[레벨이 10 올랐습니다.]
[엄청난 격차를 지닌 적을 처치하셨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으로 인해 모든 스탯이 10 상승합니다.]
‘오….’
[와우.]
일단 레벨이 무려 10개나 늘었다. 게다가 모든 스탯까지 추가로 10씩 더 올랐다. 게다가 여기에는 마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개꿀이다.’
더 좋은 스펙에 목말라 있던 석찬에게는 정말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보상이었다.
[하, 이런 것보다는 기술의 정확성을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한데….]
라우르가 옆에서 불평을 늘어놨지만, 석찬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보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메인 퀘스트를 클리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31층이 개방됩니다.]
‘오.’
예상외의 소득이었다.
[‘우베의 비늘’이 주어집니다.]
[‘우베의 심장’이 주어집니다.]
아쉽게도 이번 싸움으로 반파된 장비를 대신할 것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다면 좋을 것이 나왔다.
‘오랜만의 재료다.’
우베의 비늘과 심장. 우베의 비늘은 강마력을 대부분 견뎌낼 정도로 강력한 내구력을 자랑했고, 심장은 정보를 본 결과, 장비로 제조 시 장비 방어력 증가에 마력 순환에 도움을 주는 효과를 지녔었다.
‘이런 건 다 모아놔야지.’
지금 석찬의 아공간 주머니에는 많은 양의 재료가 들어 있었다. 개중에서는 일반 몬스터에게서 얻을 수 있는 흔한 재료부터, 히든 보스 몬스터에게서만 나오는 초희귀한 것들도 몇 있었다.
석찬은 아공간 주머니 안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재료를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언젠가는… 꼭 빛을 보게 해주마.’
이 재료들을 볼 때마다 몇몇 사람들은 의구심을 가지곤 했다.
‘왜 이렇게 좋은 재료들을 가지고 아직도 장비를 안 만들어?’
하지만, 수많은 재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0층 상점에서 산 서리 거인의 방어구 세트를 아직까지 쓰고 있는 이유에는 피치 못할 사정들이 있었다.
첫째는 바로 서리 거인 방어구 세트의 성능.
비록 10층에서 산 물건이라 내구도 자체는 별 볼 일 없지만, 방어력도 나름 30층의 평범한 방어구들과는 비교 가능한 정도였다.
게다가 스탯 증가 효과나 세트 효과도 30층은 물론 그 위층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엄청났다.
둘째는 바로 그의 신 라우르의 지론.
[자고로 장비빨에만 의존해서는 성장할 수 없는 법. 지금 네 장비들도 수련하는 데 좋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써온 거니까, 걍 쓰고. 앞으로 어지간한 일이 없는 이상 장비는 바꾸지 말도록.]
이 말에 대해서는 석찬도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좋은 장비에만 의존하면 언젠가는 한계를 맞이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바로 대장장이의 부재였다.
현재까지 여러 대장간을 다녀갔지만, 아직까지 석찬이 가진 재료를 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대장장이는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결국은 위층을 올라야 이 문제도 해결이 되는 것이었다.
‘뭐, 신경 쓰지 말자.’
힘겹게 재료를 모두 챙긴 석찬은 그대로 침대 위에 대자로 뻗었다.
‘오늘 하루는 푹 쉬어야겠네.’
다시금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남은 일은 내일 생각….’
누적된 피로 때문인지, 석찬은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졌다.
그렇게, 여러모로 엄청났던 이벤트 퀘스트가 끝이 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