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휘이잉-
살가죽을 베어버릴 것만 같은 칼바람에 석찬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여, 여긴?’
눈을 뜨자마자 펼쳐진 풍경은 심각했다.
부서진 건물들과 거리에 널려 있는 시체들.
‘으윽….’
살아남은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의 상태도 시체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얼마나 먹지 못했는지, 갈비뼈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으며, 팔과 다리는 젓가락을 보는 것만 같았다.
‘여긴 도대체… 뭐 하는 곳이지?’
주변을 둘러보려고 했지만, 앞을 보는 것 외에는 아무런 행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으윽….’
그렇게 움직이기 위해 온갖 발악을 하는 와중, 인기척이 느껴졌다.
탁.
‘누구지?’
궁금증이 가득 피어올랐지만, 고개가 돌아가지 않아 누군지 확인조차 불가능했다.
“아이테르?”
그 순간, 석찬의 입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어?’
게다가 그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했다.
‘이 목소리는 설마….’
“라우르. 위대하신 투신이시여.”
아이테르라고 명해진 인물의 확인 사살이 이어졌고, 그제야 석찬은 자신이 라우르의 몸에 빙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라우르… 그래 맞아, 난 분명 라우르의 기억을….’
잠시 후, 라우르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더니, 아이테르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이 사람이 아이테르?’
무릎을 꿇고 있어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등 뒤로 달린 6장의 커다란 날개가 눈에 띄었다.
‘저건….’
“천사장 정도 되는 녀석이 나한테는 무슨 볼일이냐.”
천사장. 딱 봐도 높아 보이는 직책이었다. 게다가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 기운은… 신력?’
신력. 수개월 전, 라우르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미지의 힘이었다. 마력과는 확연히 다른 이 힘은 석찬의 건틀릿에 새로운 능력을 부여해 줬었다.
‘천사장이라면 천사도 있을 거고. 설마 신들 말고 천사들도 전부 신력을 쓸 수 있는 것인가?’
고민에 빠져 있는 와중에서도, 라우르와 아이테르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다른 신들께서 노하셨습니다.”
“그 녀석들이 화난 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그들이, 무리를 지어 당신을 처단하려 하고 있습니다.”
순간, 라우르의 몸에서 거대한 힘이 피어올랐다.
“그 녀석들이? 나를?”
쿠구궁-
‘이건….’
그 힘이 어찌나 방대한지, 천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엄청나다.’
현재는 라우르의 영혼이 조각나 제대로 된 힘을 사용하지 못하지만, 과거, 온전했던 시절의 라우르는 역시 굉장했다.
단지 기운을 해방한 것만으로도 지진을 일으키다니. 심지어 전력을 내뿜은 것도 아니었다.
“라우르, 위대하신 투신이시여, 부디 분노를 가라앉혀 주시옵소서. 생존자들이 위험…합니다.”
“…….”
그 말에 라우르의 기운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하게 돌아왔고, 아이테르는 짧은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헉. 몸을 피하시거나, 그분들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모두 당신을 위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흥, 탑이라고 했던가? 난 반대다.”
‘!!’
탑이라는 단어에, 석찬의 이목이 순식간에 집중되었다.
‘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가?’
일전에 라우르가 탑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가 있었다. 그때 그는, 탑을 세우는 것을 반대하다 신계에서 추방당했다고 했었다.
‘그때 탑을 반대하는 것에 대한 이유는 제대로 못 들었는데… 이제 제대로 알 수 있는 건가.’
“■■■■■■를 위해서 탑을 만든다고? 그것도 마력도 없는 열등한 행성의 인간들을 납치해서? 어림도 없는 소리.”
‘…….’
하지만, 석찬의 기대를 배신하듯, 중요해 보이는 순간은 모두 필터링으로 대체되었다.
“어림도 없는 말은 아닙니다. 다른 신들께서는 인간의 힘을 키워주는 것만으로도 탑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고….”
“허. 그렇게 욕심 많은 양반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개소리 집어치우라고 전하거라. 지들 밥그릇 뺏기는 걸 제일 혐오하는 녀석들이 인간의 힘을 키운다? 말도 안 되지. 암.”
“…….”
그래도, 얻을 내용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탑의 존재 이유는 안내자가 말해주었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안내자는 분명 지구가 망한다고 했다. 그런데 라우르는 ‘납치’라는 단어를 내뱉었다.
두 사람의 발언 사이에 어폐가 존재하는 것이다. 신이라는 사람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고, 아이테르의 반응을 보아서는 그의 말이 진실인 것 같기는 했다.
‘왜 안내자들은, 탑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 거지?’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어쨌든 거듭 말하지만 난 반대다. 그렇게 알고 그 연놈들한테 전해. 덤빌 테면 덤비라고. 난 아무도 두렵지 않으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다음부터 만날 때는 적으로 만나겠군요.”
“그렇겠지.”
“■■■ ■■■ ■■■■■ 저는 ■■■ ■■■■ 그럼, 안녕히 계시길.”
무언가 중요한 말인 것 같았지만, 이번에도 필터링에 가로막혔고, 눈앞이 흐려지는 느낌과 함께 라우르의 기억이 종료되었다.
* * *
“으음….”
눈을 뜬 석찬은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날이 졌는지 어두컴컴한 밤거리를 가로등이 밝게 빛내고 있었다.
“…….”
하늘 위에 밝게 떠 오른 달을 보자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탑은 도대체 왜 생겨난 걸까.’
조금이긴 하지만,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보니 머릿속이 예전보다 더더욱 복잡해졌다.
예전에는 마냥 탑의 존재 의의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면, 지금은 더욱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깼냐.]
어느새 다가온 라우르가 천천히 석찬의 곁으로 다가왔다.
“라우르.”
[잘 봤지? 뭐, 아무리 내 기억이라도 몇몇 중요한 것들은 듣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예, 잘 봤어요. 아이테르였던가? 천사장이라고 하시던데. 천사들이 정확히 어떤 존재들이에요?”
[아이테르? 그건 들렸나 보네. 별거 없어. 걍 내 부하.]
“부하?”
[유능한 녀석이었지. 똑똑했고. 만약 살아 있다면 지금쯤 대천사의 자리도 넘보고 있지 않을까? 이미 됐을 수도 있고 말이지.]
“그래서, 천사라는 게 도대체 뭐냐니까요.”
[아 맞다. 천사란 말이다. 간단히 말해서 신들의 심부름꾼 같은 존재들이다.]
‘신들의 심부름꾼?’
[걍 쫄따구라고 생각해. 너도 쫄따구 같은 애들 있었을 거 아니야.]
‘없었는데요.’
[그냥 알아먹어라. 어디 보자, 어디까지가 들리려나… ■■■ 이건 들리냐?]
‘아뇨.’
[에라이 씨, 망할 놈의 시스템 같으니라고. 됐다. 말련다.]
‘예….’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네가 50층에 가면 아마 적당한 사실은 들을 수 있을 거다.]
‘50층이요? 아.’
50층.
알렉산더에게 들은 적이 있다. 튜토리얼과 0층, 문의 시험이 쭉정이를 걸러내는 과정이었다고 친다면, 50층의 시험은 둔재와 수재를 가르는 시험이라고 했다.
시스템 때문에 많은 사실을 알 수는 없지만, 50층의 시험이 굉장히 어려울 것이라는 건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 말 확실하죠? 50층 올라가면 더 많은 사실을 들을 수 있다는 거.’
[물론,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냐?]
아무래도, 슬슬 다시 탑을 오를 때가 된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일단 믿어 보죠.’
[좋아. 빨랑빨랑 탑이나 오르자고! 내 영혼 조각을 위해서!]
‘예, 예. 그러죠.’
* * *
포이그 레바돈과의 대결이 있은 이후로, 어느새 5개월이라는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쿠어어….”
머리가 세 개 달린 거대한 뱀이 쓰러지며 거대한 충격이 호수 전체를 덮쳤다.
“후- 덩치만 큰 놈이 까불고 있어.”
29층의 왕. 트리플 헤드 씨 스네이크 킹을 둘이서 상대했음에도, 석찬과 이브는 단 하나의 상처도 입지 않았다.
한 층을 수십 년 동안 군림하던 몬스터를 제법 강한 정예 몬스터 정도로 취급할 정도로 두 사람은 강해져 있었다.
“드디어 30층인가? 거기는 마음이 조금 편하겠지?”
“그러겠죠?”
“하… 제발 20층처럼은 안 해줬으면 좋겠다.”
석찬은 한숨을 내쉬며 20층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도박에서 엄청나게 많은 돈을 딴 사람들은 석찬을 볼 때마다 그를 향해 환호했다. 반대로 막대한 양의 돈을 잃은 사람들은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며, 몇몇 극단적인 사람들은 대낮에 그에게 달려들기까지 했다.
게다가 수십 년 동안 사냥꾼 길드 20층 지부 지부장을 맡던 포이그를 이긴 사람이 등장했다는 소문에 대결을 보지 않았던 사람들도 석찬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니….
관심을 받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다 보니 지칠 대로 지친 석찬이었다.
‘제발 30층은 안 그러길… 30층은 다르길….’
간절하게 빌며, 두 사람은 30층으로 이동했다.
스르르-
‘으, 어지러워.’
몇 년을 이용했는데도 도저히 익숙해질 기미가 안 보이는 층간 텔레포트를 뒤로하고, 30층 마을 앞에 도착한 석찬은 그 풍경에 감탄부터 내뱉었다.
“와.”
“와.”
이브 또한 다르진 않았다.
30층의 벽은 그동안 봐왔던 딱딱한 벽 대신 물로 이루어진 벽이었다.
물은 투명했지만,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마을 밖에서는 마을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짜 신기하다.”
“상당히 난도가 높은 마법이 걸려 있어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한 실력자예요.”
“이브, 너보다도 강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저랑 비슷하거나 조금 더 약하지 않을까 싶어요.”
지난 5개월 동안 피나는 수련 끝에, 이브는 초록색 마력의 끝자락에 다다라 있었다. 석찬처럼 일정한 동기나 깨달음만 있으면 바로 돌파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너랑 비슷하다면, 꽤 강하겠네?”
“네.”
“기대되네. 여긴 또 어떤 곳일지.”
마을마다 그 층의 지형지물에 따라 생긴 것과 특징이 아예 달랐기에, 새로운 마을을 방문할 때마다 신기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자.”
언제나처럼 등록 수순을 걸쳐 명패까지 발급받은 두 사람은 마을 내부의 모습에 한 번 더 감탄했다.
“와….”
“아름다워요.”
그렇다. 이브의 표현대로 30층 마을은 굉장히 아름다웠다.
이곳은 거대한 해변 위에 지어진 마을이었다. 건물들은 마치 동남아시아 쪽에서 볼 법한 목조 건물에, 화려한 색깔의 깃발과 포스터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물로 된 벽 또한 밖에서와는 다르게, 안에서는 밖을 훤히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20층 마을은 약간 칙칙했었는데, 여긴 완전 다르네.”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와 석찬의 등을 두들겼다.
“여길 그런 곳이랑 비교하면 안 되지!”
“누구….”
“누구냐고, 이야, 나 진짜 섭섭한데?”
‘잠깐, 이 목소리는….’
뒤를 돌아보자.
“오랜만이다. 짜샤.”
그리웠던 친구, 진현의 모습이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