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엘리자베스가 문에 걸린 봉인을 해제하는 동안, 석찬의 행복회로는 활발하게 돌아갔다.
‘방어구를 골라야 하나? 어디로 하지? 견갑? 상의? 하의?’
석찬은 아직도 특별 상점에서 구매한 서리 거인 갑옷 세트를 입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늦어도 한 층을 오르면 장비를 바꾼다는 점에서, 석찬은 굉장히 오랫동안 하나의 장비를 애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탓일까. 수리에 수리를 거듭하며 장비의 최대 내구성도 조금은 감소되어 있었고, 새로운 장비에 대한 욕구가 석찬의 내면을 가득 채웠다.
‘아니지. 포션? 포션으로 할까?’
포션은 중요한 자원이다. 1층이나 10층에는 아예 판매하지 않을뿐더러, 20층에서조차 포션이 한 번 나온다고 하면 여러 사냥꾼들이 거액을 내놓으며 포션을 사들였다.
마침 특별 상점에서 산 포션도 다 떨어졌기에, 포션 생각도 조금씩 났다.
행복한 상상을 하는 와중, 봉인이 완전히 풀렸고, 보물 창고의 문이 개방되었다.
‘음, 상쾌한 냄새.’
알렉산더의 보물 창고 이후로 두 번째로 방문하는 보물 창고. 생긴 것은 그의 것이나, 이곳이나 별다를 건 없었다. 휘황찬란한 보물들을 보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중에서 딱 하나만 고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하나입니다.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페널티고 뭐고, 당신을 어떻게 해버릴 수도 있어요.”
농담이 아니라는 듯, 엘리자베스의 손에 붉은 마력이 맺혔다.
“알겠습니다.”
그녀의 경고를 새겨들은 석찬은 보물 창고를 차근차근 둘러보았다.
‘오, 이 상의 방어력이?’
‘극상급 마력 회복 포션?’
역시 보물 창고라고 해야 할까? 물건 하나하나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석찬의 눈을 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여러 진귀한 포션들 사이에, 익숙한 이름의 녹색 포션이 하나 들어왔다.
[레플렉시아]
‘역시 이곳에도 있네.’
과거, 자신도 마셨던 적이 있는 그것 앞에 선 석찬은 말없이 레플렉시아를 바라보았다.
‘레플렉시아라면….’
이브 또한 포이그 레바돈의 독에서 멀쩡할 수 있을 것이었다.
‘솔직히 방어구는 나중에 또 구할 수 있을 거고….’
아무래도 이브의 안전 또한 자신만큼 중요했기에, 석찬의 눈에는 다른 어떤 보물보다도 레플렉시아가 가장 귀중해 보였다.
‘좋아 그럼. 이걸로 하자.’
결정을 마친 석찬이 레플렉시아를 들고 엘리자베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엘리자베스, 이걸로….”
그렇게 가져갈 보물을 확정 지으려는 순간이었다.
[잠깐만!!]
라우르의 강한 음성이 고막을 강타했다.
‘라우르? 뭐예요?’
얼떨결에 귀를 부여잡은 석찬이 당황한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헌데 라우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평소같이 나태에 찌든 표정이 아닌, 무언가에 홀린 듯한 눈빛과 함께, 쩍 벌어진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 내 조각이 하나 있다.]
‘네?’
가히 충격적인 그의 말에 석찬 또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각이라면….’
과거 6개로 찢어졌다는 라우르의 영혼 조각.
‘설마… 그중 하나?’
[긴가민가했는데 확실하다. 날 따라와라!]
그 말과 함께 쏜살같이 어디론가 날아가는 라우르. 석찬 또한 레플렉시아를 제자리에 올려둔 뒤 그를 향해 달려갔다.
“죄송합니다! 다른 걸로 골라….”
‘라우르! 어디….’
말을 하다 말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석찬을 의아하게 쳐다보면서도, 엘리자베스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헉, 뭐예요?”
라우르는 어떤 상자 앞에 서 있었고, 석찬 또한 숨을 고르며 그 상자를 바라봤다.
그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상자는 굉장히 작은 상자였다.
기껏해야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의 상자.
[여기다. 여기에 내 조각이 있어!]
이 안에 라우르의 두 번째 영혼 조각이 담겨 있다.
꿀꺽.
석찬은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이건….’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작은 보석이었다.
무색의 투명한 보석. 크기는 엄지손가락 한 마디가 채 안 되는 작은 크기였다.
‘이게 당신의 영혼 조각입니까?’
[그래, 확실하다.]
라우르의 확신 어린 대답에 석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우르의 두 번째 영혼 조각이라면.’
생각이 바뀌었다.
이 보석, 라우르의 영혼 조각이야말로 레플렉시아는 물론, 이 보물 창고 안에 있는 그 어떤 보물보다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더 이상의 생각은 필요 없었다.
“엘리자베스, 번복해서 죄송한데, 이 보석으로 할 수 있을까요?”
보석을 본 엘리자베스는 궁금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왜 그것으로 하려는 거죠? 아까 레플렉시아만 해도 포이그와의 결투에서 굉장한 우위를 취하게 해줄 수 있었고, 다른 것들도 좋은 것들인데.”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이 보석은 저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물건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석찬은 엘리자베스의 눈치를 살폈다.
‘제발….’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엘리자베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 뭘 고르든 석찬 씨의 자유죠. 근데 하나만 확실하게 말해주세요.”
“뭔가요?”
엘리자베스가 의문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그 보석이 있으면, 포이그와의 싸움에서 백 퍼센트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까? 레플렉시아나 다른 보물을 포기하면서까지 말입니다.”
그 물음에 석찬이 자신 있게 답했다.
“물론이죠. 기다려 보십쇼. 당당히 이겨 보이겠습니다.”
당당한 대답에 엘리자베스가 만족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보석으로 들고 가시죠.”
“감사합니다.”
“약속인데 감사할 것까지야. 그보다, 포이그와는 언제 싸울 생각이십니까?”
“가능한 빨리 싸우려고 합니다.”
자신과 이브의 전력은 더 이상 포이그 레바돈보다 못하다고 여길 수가 없을 정도로 강해진 상태. 여기서 시간을 끌어 또 다른 변수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흠… 그렇다면, 제가 그에게 통보하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이 직접요?”
엘리자베스가 윗옷을 챙겨 입으며 답했다.
“다른 애들은 영 믿을 수가 없어서요. 제가 직접 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자베스의 무력은 20층의 그 누구보다 강하다. 그녀 정도면 사냥꾼 지부에 홀로 간다고 하더라도 대적할 상대가 없을 것이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뭘 부탁까지야, 오히려 일이 빨리 처리되는 건 이쪽에서 환영이랍니다. 날짜는 언제로 하는 게 좋으려나, 이틀 뒤? 사흘 뒤?”
태평하게 대결 날짜를 고르고 있는 엘리자베스. 도박이라는 것의 특성상 분명 수많은 돈이 걸려 있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도 없을 터인데 유난히 밝은 그녀의 모습에 조금 남아 있던 긴장감마저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사업이라는 것은 사전 작업에도 시간이 꽤 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석찬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상관없습니다, 이미 사전 준비는 전부 마친 상태. 사람들을 모으는 것쯤이야, 대대적으로 광고를 때린다면 이틀 만에도 수천 명이 몰려올 거니 배당금 걱정도 없죠. 남은 건 당신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뿐이랍니다.”
‘이미 사전 준비가 끝났다니.’
주도면밀이라는 사자성어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손에 쥐어진 상자. 그 안에 담긴 것을 생각하며 석찬과 엘리자베스는 보물 창고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대결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 방에서 머무시면 된답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이 장치에 마력을 흘려보내 주세요~.’
머리가 새하얀 집사에게 안내받으며 손님방으로 들어온 석찬은 상자를 열어 보석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게 라우르의 두 번째 영혼 조각.’
투명한 보석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고 있자니, 라우르가 안달이 난 목소리로 닦달했다.
[빨리 사용해라, 빨리!]
“알았어요. 알겠는데.”
라우르는 잔뜩 흥분해 보석 주위를 맴돌며 석찬을 재촉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이걸 사용하려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어?]
예상외의 질문에 라우르가 벙찐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게… 잠시만.]
그렇다. 영혼 조각을 얻으면 뭐 하나, 사용법을 모르는데. 보석의 정보창도 열람해 보았지만.
[???의 ???? ?]
[???의 ????이 담긴 보석.]
그런데, 정보창은 물음표로만 가득했으며, 사용법에 대해 그렇다 할 단서조차 주지 않았다.
“아는 거 없어요? 당신 영혼 조각이잖아요?”
[흠… 어디 보자….]
라우르는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이 머리를 부여잡고 공중을 맴돌았다.
‘뭐,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필요한 것 같으니….’
침대 위로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 앉은 석찬.
머릿속으로는 과거 포이그 레바돈과의 싸움을 떠올리며,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어두컴컴한 방 안.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만이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또르륵-
잔을 든 손을 흔들며, 그녀는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올킬러 강석찬.
그를 후원하겠다며 자신이 수십 년 동안 모아온 진귀한 것들로 가득 찬 보물 창고를 개방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강석찬은 자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물건을 골랐다.
“‘그 보석’이라….”
보석의 출처가 어디였을까, 천천히 생각해보니 몇십 년도 더 전에 있던 일이 떠올랐다.
사냥 구역의 탐색 도중 한 길드원이 발견했던 어느 한 신전. 수많은 전사들의 석상이 인상적이었던 신전이었다.
엄청난 숫자의 거신상이 지키고 있던 신전의 중앙에 고이 간직되어 있던 것이 바로 석찬이 골라갔던 보석이었다.
‘왜 하필 그 보석이었을까?’
엘리자베스는 보석을 처음 만졌을 때를 떠올렸다.
“오랜만이었지, 그런 기운은….”
수십 년 동안 탑에 살면서 몇 번 느껴보지 못했던 신비한 기운. 그것은 그녀의 주인에게서나 느낄 법한 기운이었다.
‘물론 주인님에 비교하면 미안할 정도로 약했지만.’
호기심이 가는 것은 변함없었다.
본부로 돌아온 후, 모든 정보망을 통해 샅샅이 알아보았지만, 보석에 대한 정보는 전무. 그 때문에 보물 창고의 구석에 모셔두고 까먹고 있었는데 그것을 석찬이 찾아서 고른 것이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엘리자베스의 눈이 붉게 번뜩였다.
호기심에 살고, 호기심에 죽는 그녀의 감이 새로운 먹잇감을 낚아채 입맛을 다셨다.
“재밌어. 아주 흥미로워.”
강석찬.
처음에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접근한 것뿐이었는데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잘 지켜봐야겠어.’
계약만 끝나면 잊으려고 했다만, 그럴 수가 없을 듯했다.
‘오늘따라 술이 다네. 달아.’
환한 미소와 함께, 조금 남은 와인이 전부 그녀의 입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