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저, 엘리자베스 살리나스는 여러분을 지지하고 싶습니다.”
“예?”
“예?”
엘리자베스의 폭탄 발언에 석찬과 이브의 입에서 동시에 의문이 튀어나왔다.
뒷세계의 주인이라면서 ‘지지’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는 것을 아닐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저런 말을 한 것이란 말인가?
그의 의문에 엘리자베스가 설명을 시작했다.
“강석찬, 이브, 당신들은 포이그 레바돈과 결판을 내려고 20층에 온 겁니다. 맞죠?”
“맞습니다….”
“좀 전에 언급했다시피, 저는 20층의 뒷세계에서는 ‘주인님’이라는 명칭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정보와 이름값을 이용해 사업을 하나 해볼 생각입니다.”
“사업?”
“사람들 간의 결투에 대한 도박이라고 하면 설명이 되려나요?”
도박이라는 말에 석찬의 머릿속에 한 남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레이놀드 도르도르.’
10층에서 있었던 마찰로 인해 결투를 하게 되었던 남자였으며, 이 결투에서 이뤄졌던 것이 바로 도박이다.
여러 가지 수법 덕에 질 뻔했지만, 건틀릿의 봉인 해제로 결투에서 승리하게 되었고, 자신에게 배팅했던 나이르 칸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헌데 갑자기 도박이라니.”
“도박은 돈이 되죠.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들이 포이그 레바돈에게 한 번 패했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또한, 석찬과 이브가 지금까지 탑을 오르며 이룬 업적들과 이미 증명된 강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싸움이 성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그 때문에 저는 당신들이 허락만 있다면, 이 싸움을 큰 도박판으로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물론, 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여러분을 지지하면서요.”
곰곰이 엘리자베스의 말을 듣던 이브가 질문을 던졌다.
“잠시만요, 그래요. 분명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그 지부장 아저씨한테 진 사실을 몰라요. 하지만 당신은 알잖아요? 근데 왜 저희를 지지하려고 하시는 거죠?”
허를 찌르는 질문.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야, 여러분의 기량을 믿어서죠. 만약 두 분이 17층에서 싸웠을 때의 기량 그대로 지니고 계셨다면 저는 가차 없이 포이그 레바돈에게 연락을 취했을 겁니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니까요.”
“하지만, 여러분은 성장하셨어요. 그것도 놀랄 정도로 말이죠. 포이그 레바돈도 분명 수련을 하고 강해지긴 했겠지만, 제 직감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이길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따라서 전 여러분을 지지하는 것이죠. 이제 설명이 좀 되었을까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석찬은 말없이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우리가 더 승리 확률이 높기 때문에 우리 쪽에 붙었다라….’
그렇다면 만약 패배할 시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석찬이 이에 대해 질문하자 엘리자베스가 방긋 웃으며 답했다.
“여러분이 패배할 일은 없을 겁니다. 제 지지를 받는다면 말이죠.”
“그걸 어떻게 확신하냐는 말입니다.”
“만약 제 지지를 받으신다면, 여러분의 장비를 지금보다 나은 장비들로 업그레이드시켜 드리겠습니다. 무상으로 말이죠. 어때요, 괜찮은 조건 아닙니까?”
장비의 업그레이드. 확실히 괜찮은 조건이다. 하지만.
“20층을 클리어하면 특별 상점을 한 번 더 갈 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 안되면 20층을 먼저 클리어하고 장비를 구매한 뒤 싸움을 할 수 도 있었다. 따라서 장비의 업그레이드는 별 감흥이 오지 않았다.
“흠… 그런 생각이신가요?”
하지만, 석찬의 무관심에도 엘리자베스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특별 상점이라… 생각해보니 그것도 있었군요. 헌데 당신은 정녕 특별 상점을 이용할 수 있으실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예? 무슨 말씀….”
“아닙니다. 이 이상 말해봤자, 허락해주지 않을 겁니다.”
그녀의 말에 석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또 탑의 제약인가….’
일단 이 일로 확실히 알 거 같다. 엘리자베스는 위층의 존재다. 그것도 탑의 비밀을 꽤 알고 있는 상층의 존재.
그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현재 하는 말로 봐서 이 여자가 거짓말을 하는 걸로는 보이지 않는다.’
만약 특별 상점을 못 간다면? 낭패다. 게다가 장비를 무상으로 업그레이드해 준다는데 안 하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호구 아니겠는가?
“흠….”
그래도 고민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이브나 라우르 말대로 조심하지 않아서 나쁠 것은 없었고, 엘리자베스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
“정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걸 사용하시죠.”
그런 석찬에게 엘리자베스가 몇 분 전에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내놓은 종이를 건넸다.
‘이건?’
<계약서>
[갑은 을의 주최하에 ‘포이그 레바돈’과의 결투에 참가한다.]
[을은 갑에게 결투에서 쓸 장비를 무상으로 제공할 것을 약속한다. 단, 이 장비는 현재 장비보다 좋은 성능의 유니크 등급 이하 장비로 한한다.]
[을은 갑에게 사업 전체 수익의 20%를 지급한다.]
종이의 정체는 계약서였다. 하지만 마력이 느껴지는 것이 평범한 계약서는 아닌 듯 보였다.
“마력 계약서입니다. 이 계약서에 적힌 대로 행하지 않은 자는 막대한 페널티를 얻게 되죠. 예를 들면, 레벨이 떨어진다든가, 스탯이 하락한다든가.”
엘리자베스는 말을 하며 갑에 석찬과 이브의 이름을, 그리고 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어떻습니까?”
엘리자베스의 물음에 석찬이 고뇌했다. 이렇게 계약서까지 준비하면서 잘해주다니. 슬쩍 이브 쪽을 쳐다보니, 그녀 또한 고뇌하고 있는 듯했다.
이브는 몇 분 정도 생각을 이어가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계약서 효과, 진짜예요?”
“물론이죠. 증명할 방법은 많습니다.”
“계약서 효과가 진짜라면, 괜찮을 것 같네요.”
“그치?”
드디어 결정한 석찬은 다시 한번 더 계약서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장비 업그레이드 말고도 수익을 지급한다라….’
게다가 전체 수익의 20%다.
‘나쁘지 않다.’
석찬은 펜을 꺼내 망설임 없이 계약서에 사인했다. 엘리자베스도와 이브도 사인을 마치자, 계약서에서 환한 빛이 일더니 세 사람을 비추었다.
“이 느낌은….”
무언가 이질적인 마력의 침입에 석찬이 인상을 찌푸렸으나, 이내 계약서의 마력임을 깨닫고 표정을 풀었다.
“그럼, 이제 계약도 성립되었으니 정식적으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번 결투에서 여러분의 지지자가 될 엘리자베스 살리나스입니다.”
계약상 그녀는 자신들의 우군이다.
석찬은 정중하게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이브 또한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계약도 했으니,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무엇인가요?”
석찬의 물음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기웃했다.
“당신은, 위층의 존재입니까?”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서로의 믿음을 위해 꼭 필요한 질문이었다. 이브 또한 궁금했는지 엘리자베스의 답변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흠… 확실히 말씀드리지 못하겠군요. 제약을 피하려면… 이 정도가 적당하겠군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답니다.”
“예?”
“거기까지만 알고 계세요. 더 알면 다친답니다~!”
“…….”
솔직히 못 미더웠다. 의문도 커져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궁금해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 문제는 잠시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계약서에서 봤던 대로 여러분들의 결투에서 얻은 수익금의 20%가 지급될 겁니다.”
“수익금은 미뤄두고, 장비 업그레이드는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잠시 후, 엘리자베스의 방 안으로 정장의 남자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저희 길드 최고의 장비 감정가들입니다. 이들이 당신들의 장비를 살펴보고 더 좋은 장비를 물색해줄 겁니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석찬과 이브가 고개를 끄덕였고, 장비 감정가들이 그들의 장비를 살피기 시작했다.
“흠… 이 정도 수준의 갑옷이면….”
“호오? 이 건틀릿은….”
“이 지팡이, 엄청난데요?”
그들은 석찬과 이브의 장비를 보며 하나같이 감탄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서로 수군대며 열띤 토론을 펼쳤다.
“이 정도 수준의 장비보다 더 좋은 성능의 장비라면….”
“H 무구점은 어떤가?”
“거기로는 안 돼. 더 좋은 곳이….”
“경매장에 한번….”
수 분 정도 대화를 하던 장비 감정가들. 이내 그들 중 한 명이 나오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른 것들은 모르겠는데, 강석찬 님의 방어구와 건틀릿은 도저히 답이 안 보입니다.”
“답이 안 보인다?”
엘리자베스의 물음에 장비 감정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답했다.
“저것보다 더 좋은 장비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장비 감정가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처음으로 곤혹스러운 표정을 나타냈다.
“더 좋은 장비가 없다라… 확실합니까?”
“예. 전부 20층의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수준의 장비들입니다. 혹 실례가 안 된다면 이 장비들을 어디서 얻었는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10층에서 얻었습니다만….”
특별 상점이랑 0층에서 특전으로 얻었다는 타인에게 알려줄 이유가 없었기에 적당히 얼버무렸다.
“10층이라… 허….”
석찬의 말에 장비 감정가들이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나머지 장비들보다 좋은 성능의 장비를 주문하고 그들을 내보냈다.
“흠… 이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 더 좋은 장비를 찾지 못한다라… 특별 상점에서 얻은 건가 보군요.”
“비슷…합니다.”
역시 그녀에게까지 숨길 수 없었나 보다.
‘도대체 정체가 뭐야, 저 여자.’
“뭐, 그래도 지원을 약속했는데, 드릴 게 있나 찾아봐야겠군요.”
엘리자베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큰 결심을 한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강석찬 님, 잠시 절 따라오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저만 말씀이십니까?”
“네. 이브 님께서는 죄송하지만 잠시 이곳에서 머물러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다과를 내오라고 말해놓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이브는 잠시 불안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 감사합니다. 자, 그럼 강석찬 님. 따라오시죠.”
엘리자베스는 석찬을 데리고 방 옆에 있는 문으로 향했다.
책이 두 벽면을 가득 채운 방에서, 엘리자베스는 책 한 권을 펼쳐 들었다.
“갑자기 책은 왜?”
“보시면 아실 겁니다.”
까득.
갑자기 손가락을 깨문 엘리자베스. 이어서 그녀는 양해를 구하며 바늘로 석찬의 손가락을 땄다.
그렇게 두 사람의 피를 이용해 책의 한 페이지에 마법진을 그려나가는 엘리자베스.
마법진을 그린 종이를 찢은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책장의 한 면에 붙였다. 그러자 책장이 사라지더니, 문이 하나 나타났다.
“이 문은?”
설마.
석찬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놀라지 마세요. 제 보물 창고랍니다~.”
보물 창고.
익숙한 그 단어에 석찬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지원한다고 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했는데 이렇게 넘어갈 수는 없지요. 특별히 강석찬 님께는 제 보물 창고에서 마음에 드시는 장비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호오?’
그 말에 석찬의 머릿속이 빛났다.
엘리자베스는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 베일에 감싸져 있는 상층의 강자다. 비록 알렉산더보다는 못하겠지만, 수많은 보물이 있을 거다.
‘뭘 고르지?’
보물 창고에 들어가기 전이지만, 벌써부터 석찬의 머릿속은 행복회로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