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석찬 일행이 다시 탑을 오르기 시작하고 나서 다시 한 달 반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19층. 어느새 20층을 목전에 둔 석찬과 이브는 사냥에 더욱 열을 가하고 있었다.
“캬아아아!”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거대한 뱀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주먹을 휘두르는 석찬.
마력으로 한껏 강화된 그의 공격은 일격 일격이 매서웠으며, 거대 뱀은 섣불리 그를 공격하지 못했다.
쾅! 쾅!
그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거대한 뱀의 비늘에 금이 갔고, 어느새 훤히 드러난 뽀얀 속살을.
“기가 라이트닝.”
이브의 번개가 완전히 헤집어 놓는다.
그렇게 달려들었던 5마리의 거대 뱀들을 전부 처리한 석찬과 이브는 그제야 숨을 돌렸다.
“후우… 겉은 마법 내성에 속은 물리 내성이라니, 뭐 이런 몬스터가 다 있대요?”
그렇다.
거대 뱀의 비늘은 강한 마법 내성을 지녔었고, 속살은 강한 물리 내성을 지니고 있었고, 이는 무력이 조금 떨어질지언정 녀석들을 19층 최강의 생물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래, 정말 까다로운 녀석이었어.”
그것이 무려 고블린 왕이나 오크 대족장처럼 사냥 불가 판정을 받은 몬스터들이었지만, 석찬에게는 그저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법도 빨리 배워야 하는데.’
석찬의 손에서 파이어 볼이 천천히 생성되었다.
마력을 꾹꾹 눌러 담은 석찬은 손바닥 크기로 작아진 파이어 볼을 숲 아무 데나 던졌고.
휙-
콰앙!
숲의 한 부분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위력은 충분한데….’
문제는 속도.
같은 마력을 사용하더라도 마력을 사용한 육체 강화와 마법은 매커니즘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마법을 어렸을 때부터 전문적으로 배워오고, 또 계속해서 써오던 이브와는 다르게 석찬에겐 마법을 쓰는 경험 자체가 압도적으로 부족했고, 이는 캐스팅 속도에서 드러났다.
석찬의 파이어 볼은 만들어지는 데 약 10초, 또 최대 위력으로 압축하기까지 약 1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10초에서 1분. 평상시에는 짧은 시간이지만, 찰나의 순간에 승패가 갈릴 수도 있는 넘치는 전투 속에서는 길고도 긴 시간이다. 여러모로 연구는 하고 있지만 아직 실전에서 활용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있었다.
그에 비해 이브의 경우, 파이어 볼의 상위 마법인 파이어 스피어를 5초 만에 만들어냈고, 더블 캐스팅도 가능했기에, 석찬에 비해 할 수 있는 것의 범위가 굉장히 넓었다.
‘이거 쓸 바엔 강마력을 쓰는 게 더 좋겠어. 차라리 마법은 관두고 강마력만 집중할까?’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라우르가 호통을 쳤다.
[야, 뭔 소리야! 마법은 무조건 잡아야 돼!]
그는 진정한 투신의 후계자가 되려면 전투와 관련된 기술을 전부 통달할 필요가 있다고 했고, 그거는 마법도 예외가 아니었다.
[만약 지금처럼 물리 공격 내성인 새끼가 나왔는데 너 혼자면 어떡할 거야? 걍 어리바리하다 죽을 거 아니잖아?]
‘그쵸.’
[그럼 마법은 놓지 마. 그래도 잘하고 있어. 1년 만에 이 정도 한 놈은 처음 본다. 지금처럼만 해. 지금처럼만.]
그래도 라우르의 칭찬에 조금은 힘이 나는 듯했다.
‘예.’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석찬과 이브는 바로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층 이동.”
몬스터의 사체를 샌드백의 가죽 주머니에 잘 넣어둔 석찬은 눈앞에 뜬 창을 바라보았다.
[층 목록]
[100층]
…
[20층]
…
[1층]
몇 번을 봐온 층 목록 중에 유독 밝은 20층이 들어왔다.
“20층.”
직후, 눈앞이 흐릿해지며, 뱀들의 혈흔이 남아 있던 대지가 사라지고, 거대한 녹빛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20층. 포이그 레바돈이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드디어 도달한 건가.’
탑에 들어온 지 거의 1년 반. 그사이 석찬은 무려 20층에 도달해 버렸다.
가히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들어가자.”
“괜찮을까요?”
“우리가 더 강해.”
아마 마을 전체에 있는 베테랑 사냥꾼들이 전부 몰려들어도 자신에게 흠집 하나 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가 마을에 입성하자, 경비원이 미약하게 흠칫하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예상대로 쉬이 건들지는 않았다. 이것은 마을 내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저거 올킬러 아니야?’
그들은 무언가 홀린 듯 석찬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에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다.
“분위기 살벌하네.”
“저것 때문 아닐까요.”
이브가 가리킨 곳을 가보자, 벽에 붙어 있는 두 장의 종이가 보였다.
석찬은 종이를 뜯어 인적이 드문 골목길 쪽으로 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름 : 강석찬]
[이명 : 올킬러]
[층 : 19]
[상세 사항 : 짧고 검은 머리, 건틀릿, 은발의 천사와 항상 함께함, …….]
[현상금 : 10,000골드]
[이름 : 이브]
[이명 : 은발의 천사]
[층 : 19]
[상세 사항 : 은발에 백안, 마법사, 올킬러와 항상 함께함, …….]
[현상금 : 12,000골드]
그것은 그들의 얼굴이 그려진 현상금 수배서였다.
‘이것 때문에 아까 그렇게 쳐다보던 건가?’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헌데.
‘뭔 사람 하나 잡는 데 만 골드씩 쓴대?’
또 이브의 현상금은 석찬보다 20% 높은 만 이천 골드였다.
사람들의 눈이 돌아갈 만했다.
“그래도, 정신이 나가지 않는 이상 우리한테 덤비는 놈은 없지 않을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항상 투기를 발산하며 다녔다.
20층 사람들 중에 자신의 투기를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생각하던 석찬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브나 지부장이 아닌 이상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사냥꾼 길드로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타닥.
‘인기척.’
갑작스레 들린 발걸음에 석찬이 손에서 작은 마력구를 만들어냈다.
“라이트.”
불을 밝히자, 검을 든 한 남자가 보였다.
“당신은 뭡니까?”
“올킬러, 맞지?”
“제 질문에 먼저….”
“올킬러, 맞지?”
계속해서 똑같은 질문만 하는 남자.
지친 석찬이 결국 먼저 정체를 밝혔다.
“예, 제가 올킬러입니다. 당신은 누구….”
“올킬러! 죽어라!”
그러자, 곧바로 검을 휘둘러오는 남자.
하지만, 수상한 남자의 모습에 대비하고 있던 석찬이 피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뭡니까.”
“너만 죽이면, 너만 죽이면.”
남자는 아까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하며 검을 휘둘러왔다.
‘대화는 불가능한 것 같군.’
판단이 선 석찬은 미리 만들어 둔 마력구를 들고 그대로 남자의 목 뒤에 꽂아 넣었다.
“죽….”
쾅!
그 엄청난 충격에 남자의 동공이 풀렸고, 이내 바닥에 허물어졌다.
“죽인 건 아니죠?”
“기절만 시킨 거야, 기절만.”
“그보다, 자리를 피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방금 소리로 아마 사람들이….”
“이쪽에서 소리가 났어!”
“이쪽이다, 이쪽!”
이브의 말대로 소란 때문인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흠….’
저들이 모두 덤빈다고 해서 상대를 못 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살생을 할 필요도 없는 법.
“잠깐 피해 있자.”
“네, 포그.”
새하얀 안개가 골목길 전체를 뒤엎기 시작했다.
“뭐야, 이 안개는?”
“앞이 잘 안 보여!”
“지금이야, 가자.”
사람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골목을 벗어난 석찬과 이브는 마을 외곽 쪽에 있는 한 여관방을 찾아갔다.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여관 카운터에서는 꼬질꼬질한 옷차림의 주인장이 까탈스러운 표정으로 석찬과 이브를 맞이했다.
“몇 사람?”
“두 사람이요.”
“방은?”
“두 개요.”
“방 하나당 1박에 5실버.”
“일주일로 하겠습니다.”
“두 사람 해서 70실버.”
“여기요.”
석찬은 금화 다섯 개를 꺼내 여관 주인에게 내밀었다.
“잔돈은 됐어요. 식사는 조식만 제공받는 걸로 해주세요.”
“최선을 다해 쾌적한 환경에서 지내실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고객님.”
5골드라는 거금에 눈이 휘둥그레진 여관 주인은 가장 깨끗하고 좋은 방으로 석찬과 이브를 안내하고는 아침에 뵙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둘만 남은 상황에서 이브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우선 가만히 지켜만 볼 거야.”
“지켜보다니요?”
지금 상황에서 애가 타는 쪽은 지부장 쪽이다. 아쉬울 게 없는 입장에서 굳이 먼저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사냥이나 하면서 녀석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보자고.”
만약 틈이 보이면 그대로 쳐들어가고, 아니더라도 맞서면 된다.
이제 석찬에게는 이런 계획을 자신할 만한 힘이 있었다.
* * *
석찬이 20층에 도착한 지도 벌써 엿새가 흘렀다.
오늘도 어김없이 돌파를 위해 명상을 하던 석찬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입니다.”
“감사합니다.”
접시 위에는 괜찮은 퀄리티의 빵과 수프, 그리고 고기가 올려져 있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죠.”
석찬이 입막음 용도로 준 돈이 지금까지 약 30골드 남짓. 그에게는 적은 돈이지만 여관 주인에게는 몇 년 동안 뼈 빠지게 일해야 벌 수 있을까 말까 한 큰 액수였고, 이는 그로 하여금 석찬에게 큰 호감을 느끼게 하였다.
“여기 계시는 동안 아무 걱정도 마시고 지내십시오. 제가 입 하나는 무겁습니다.”
“하하, 주인장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안심되네요.”
그 이후로도 석찬은 10분 정도 여관 주인과 수다를 떨었다.
20층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여관 주인은 그만큼 20층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그를 토대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아, 그보다.”
“뭔가요?”
“혹시 탑을 올라오는 슈퍼 루키에 대해 아는 정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슈퍼 루키? 혹시 수다쟁이 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수다쟁이 킴. 김진현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이유는 뭐, 별명에서 보다시피 말이 너무 많아서 붙여진 별명.
‘그래도 별명이 붙여진 건 유명하다는 소리니까.’
좋은 것이다. 좋은 걸 거다….
여관 주인은 석찬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석찬 님이 오시기 전에 10층의 지인을 통해 들은 소식으로는, 수다쟁이 킴이 이미 10층에 도달했다는 것 같습니다.”
“벌써요?”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 역시 자신이 인정한 친구다.
‘그래, 빨리 올라와라.’
“그보다, 제가 식사 시간을 너무 지체시킨 것 같군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네, 쉬세요.”
그렇게 즐겁고 유익한 대화가 끝나고, 식사를 마친 석찬은 이브의 방으로 찾아갔다.
“이브.”
“오셨어요?”
이브의 방 바닥에는 여러 마법진들이 그려져 있었다.
전부 사냥꾼 지부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한 용도였다.
“아직 특별한 움직임은 없어?”
“네, 이상하리만큼 움직임이 없어요.”
지금까지 사람들이 없는 사냥터만 골라서 사냥해온 것과는 다르게 20층에 들어서서는 번화가에도 자주 나가고 인기 사냥터도 꽤 방문했건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포이그 레바돈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이유지.’
지부장실에서만 박혀 사는 게 아닐까? 라고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렇게 의문에 빠져 있던 와중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방에 울렸다.
“올 사람이 있어?”
“아니요. 밥은 아까 주인아저씨가 가져다주셨는데?”
똑똑.
‘누구지?’
석찬은 의문과 함께 방문을 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