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달라졌다라….’
알렉산더의 말을 들은 석찬이 몸 안의 마력을 끌어올려 보았다.
쏴아아-
‘이건….’
그러자, 그의 말대로 변화가 한눈에 느껴졌다.
‘독에 대한 내성이….’
“효과 끝내주지?”
끄덕.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내렸다가 올리는 석찬.
그 정도로 레플렉시아의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과연 보물이라고 불릴 만한 효과다.’
엄청난 효능에 석찬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거라면… 다시 붙는 것도 가능해.’
일전의 패착 요인이었던 독은 더 이상 자신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다.
그 말인즉슨, 패배는 한 번으로 족하다는 뜻.
“감사합니다. 알렉산더.”
석찬은 진심을 다해 고개를 숙였다.
“하나밖에 없던 거였다. 원래 이브가 조금만 더 크면 주려고 했던 건데….”
알렉산더가 빈 상자를 들어 보였다.
“뭐, 됐다. 여튼, 이렇게 해줬는데 또 지지 말고. 꼭 이겨라.”
“예. 반드시 이기겠습니다.”
“그래, 언제 떠날 거냐?”
‘이브를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떠나는 게 좋겠지만….’
그녀가 있는 곳은 완벽하게 가려진 상태였기에, 석찬은 한 사람을 더 보고 떠나기로 결심했다.
“뭐, 이왕 왔으니까 진현이나 한 번 보고 가려고요.”
김진현. 몇 달 만에 왔는데 안 보고 가면 친구 얼굴 보기 힘들다고 향후 몇 달은 찡찡댈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알렉산더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알렉산더?”
“어? 아, 진현이 한 번 보고 간다고?”
“예, 혹시 무슨 문제라도?”
“그게 말이다… 진현이가 지금 여기 없어서?”
“네?”
‘진현이가 없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그때, 석찬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탑을 오르기 시작한 건가요?”
그 말에 알렉산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삼 주 전엔가 떠났다. 한 30층 가기 전까지는 안 오겠다고 하더구나.”
“30층이요?”
30층이라니.
17층에 머물고 있는 자신도 여기까지 오는 데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근데 그 두 배에 가까이 되는 층인 30층에 가기 전까지 안 돌아오겠다니.
3년? 4년?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 그의 기색을 읽었는지 알렉산더가 석찬의 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괜찮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오래 걸리지 않는다니요?”
“자 생각을 해봐라. 진현이는 여기서 1년 가까이 수련만 했다. 돌파, 강마력 등등 그 과정에서 1년 전의 널 아득하게 뛰어넘은 상태고, 너와는 다르게 퀘스트 내용도 그렇게 엽기적인 게 아니지.”
“그렇죠.”
솔직히 말해서 퀘스트가 요구하는 몬스터의 양을 절반으로만 줄여줬어도 탑을 오르는 속도가 지금보다 족히 2배에서 3배 이상은 나올 것이었다.
“결정적으로, 위에 층에서 들은 정보로는 어떤 미친 격투가가 한 층을 며칠 단위로 깨부수고 다니더니 벌써 7층에 도달했다는 모양이더군.”
그 말에 석찬이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벌써요?”
“그래, 얼마 안 걸릴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나저나 너나 조심해. 잘못하면 따라 잡힐 수도….”
“그럴 수는 없죠.”
석찬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따라잡힐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었다.
‘김진현….’
라이벌에게 따라잡힌다?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했다.
‘그래, 어디 한번 와봐라.’
나는 그동안 더 멀리 나가 있는다.
“그럼, 다음에는 뭘 할 거냐? 진현이 만난다고 했지만 그 녀석은 지금 없고….”
유일한 볼일이 없어진 석찬의 결정은 단 하나였다.
“볼일도 없는데, 탑이나 다시 올라야죠. 다시 뵙기 전까지 조심히 지내십시오.”
“너나 조심해라, 너나.”
“걱정 붙들어 매세요. 그럼… 층 이동.”
시동어를 말하며, 석찬의 신영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보물 창고에는 알렉산더만이 남았다.
홀로 남은 그는 고개를 돌려 보물 창고의 구석진 곳을 바라보았다.
휘이잉-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알렉산더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스슥-
그러자, 문 옆에 있던 그림자가 일순간 흐릿해졌고, 알렉산더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콱-
무언가가 잡히며, 검은색 천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헉?”
자신의 은신이 들킬 리가 없다고 확신했었는지, 정체불명의 사내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알렉산더를 응시했다.
“어, 어떻게 날 찾은… 거지?”
지부장의 특명을 받고 석찬 일행을 수색하기 시작한 지 어느덧 한 달째.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조사 결과, 이곳 1층은 올킬러 강석찬의 절친한 친구가 있는 곳.’
이전에 탑에 오를 때도 몇 개월마다 한 번씩 내려온다고 했으니 2~3개월 정도 더 기다리면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잠복을 시작한 지 고작 1개월 만에 올킬러를 발견했으니 이 작전은 완벽히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현재 자신의 멱살을 붙잡고 있는 눈앞의 남자는 올킬러의 파트너인 은발의 천사, 이브 올가의 아버지 알렉산더 올가. 이곳 1층 시작의 마을의 영주라고 들었다.
‘고작 이런 곳의 영주 따위가 이렇게 강하다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강적의 등장에 사내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누구냐, 너.”
“그… 그걸….”
“미쉘 녀석이 보낸 거냐?”
“미쉘? 그게… 누구냐….”
80층 지부장 미쉘 그레이스. 그녀는 지부장도 아닌 고작 20층 따위의 일개 암부 따위가 알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모르나 보군. 하긴, 그 녀석이 날 죽이는 데 고작 이런 피라미 새끼 하나만 보냈을 리는 없지. 그래, 피라미가 올 정도의 일이라면 석찬이 녀석을 노리고 온 것이겠군, 맞지?”
“피… 피라미?”
그 치욕스러운 단어에 사내의 눈이 터질 듯이 튀어나왔다.
“왜, 그럼 피라미가 아니냐?”
“커헙….”
알렉산더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살기에 사내의 눈앞이 노래졌고, 바지 중앙이 뜨듯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 기운은?’
살기 하나로만 따지면, 하늘 같아 보이던 지부장조차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덜덜덜-
사내의 몸이 강풍 앞의 갈대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과거, 탑의 최강자였으며 ‘살신’이라 불린 알렉산더 올가였다.
지금, 알렉산더는 하나뿐인 딸을 키우며 오랜 평화로 잠들어 있던 자신의 본모습을 살짝 내보였다. 현재 사내에게 가해지고 있는 살기는 일전에 석찬이나 진현이 시험받았던 살기하고는 궤를 달리했다.
“그 더러운 발로 감히 내 공간에 들어오다니… 맘 같아서는 여기서 처리해 버리고 싶지만… 나의 마음은 하늘같이 넓으니, 적당히 봐주도록 하지.”
‘봐준다고?’
설마 살려주는 건가 싶던 사내는 이어지는 알렉산더의 행동에 희망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 살기를 버티면 살려주겠다.”
알렉산더는 좀 전에 쏘았던 살기보다 훨씬 강력한 살기를 뿜어냈다.
“끄르륵….”
결국은 입에 거품을 물고 의식을 잃는 사내. 그런 그를 보는 알렉산더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역시 피라미였군.”
사내를 보물 창고 밖으로 내던진 알렉산더는 침입자가 기절하며 흘러내린 오물로 더럽혀진 바닥을 바라보았다.
“더럽군.”
마력이라도 있었더라면 바로 처리가 가능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보물 창고를 아무한테나 공개할 수는 없는 법.
‘청소부한테 시킬 수도 없고… 젠장.’
잠시 후, 손수 대걸레를 들고 오는 알렉산더.
‘크흑… 쪽팔리는구만….’
바닥을 빡빡 문지르는 그의 모습을 아무도 보지는 못했지만, 왠지 모를 수치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젠장, 기분도 꿀꿀한데 끝나고 크레미 녀석이랑 대련이나 한 판 해야겠다.’
대련 시간은 스트레스가 전부 해소될 때까지가 적당할 것 같았다.
그 시각.
“뭐지….”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크레미는 왠지 모를 오한에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당겼다.
* * *
타앗.
알렉산더와 헤어진 석찬은 곧장 동굴이 있던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별일 없었겠지?’
우거진 풀숲을 지나자, 마법으로 가려진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석찬은 품에서 빛나고 있는 푸른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이브가 동굴 밖을 나가는 석찬에게 준 일종의 출입증이었다.
돌멩이를 바닥에 내려놓자 눈앞에 있던 동굴이 언제 있었냐는 듯 금세 모습을 감추고 풀과 나무가 나타났다.
“진짜 신기하네.”
두어 번 정도 더 똑같은 짓을 하자 동굴 입구에서 이브가 걸어 나왔다.
“애처럼 장난치지 말고 빨리 들어오시기나 하세요.”
“이브! 나 없는 동안 잘 있었어?”
안 본 지 오래된 것은 아니었지만, 레플렉시아를 섭취할 때 느낀 고통과 시간 때문인지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리 비운 지 얼마나 되셨다고. 잘 있었어요.”
“쳐들어온 사람은 없었고?”
“절 뭘로 보고. 당연히 없었죠.”
“다행이네.”
마법을 쓰지 않고 있었는지 동굴 안은 굉장히 어두웠다.
“좀 어둡긴 하지만, 이리 오세요.”
이브는 입구 옆에 간단하게 만들어진 돌의자로 날 안내했다.
“그래서, 어떻게 성과는 조금 있었어요?”
자리에 앉은 석찬은 그녀가 따라주는 차를 받으며 입을 열었다.
“대박이었지. 알렉산더 님이….”
레플렉시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이브는 왠지 모를 부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석찬을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레플렉시아를 주셨다고요….”
“그, 미안하다. 원래 너한테 주시려던 거 같던데….”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표정이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라고 주장하는 이브. 하지만 그녀의 손안에 있는 차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뽀르륵-
무의식중에 발산한 마력에 찻잔 안의 차가 무서운 속도로 증발하고 있었다.
‘나중에 꼭 보답해야겠다….’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꼭 레플렉시아를 구해 가져다줘야겠다고 다짐하는 석찬이었다.
그렇게 위험천만(?)했던 티타임이 끝났고, 뒷정리를 하던 석찬에게 이브가 질문을 던져왔다.
“그래서, 언제 출발할 예정이에요?”
레플렉시아까지 마셨으니 석찬은 이제 독에 완전한 내성을 지녔을 터. 그의 성격대로라면 아마….
‘가능한 빨리?’
“가능한 빨리.”
그 말에 이브가 씩 웃으며 텅 빈 동굴 내부를 비췄다.
“그럴 줄 알고 제가 짐을 미리 챙겨놨죠. 보세요.”
1년 만에 석찬잘알에 도달한 이브였다.
“오빠 물건은 안 만졌으니까 그것들만 정리하시면 돼요.”
“고맙다.”
석찬은 주변을 밝히며 동굴 깊숙한 곳에 있는, 자신의 물품이 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벽이 여러 갈래로 할퀴고 갈라진 장소에는 몇 개의 무기들과 옷가지들이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난 몇 개월 동안 동굴에 살아온 석찬이 가진 짐의 전부였다.
챙길 것도 별로 없었기에 빠르게 짐을 챙긴 석찬이 동굴 밖을 나섰다.
“다 챙기셨어요?”
“그래, 이제 가자. 층 이동. 17층.”
흐릿해지는 몸 사이로, 석찬의 눈이 밝게 빛났다.
‘두 번은 없다. 반드시 이긴다.’
그 다짐과 함께, 두 사람의 몸이 완전히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