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이브가 정체불명의 기술을 썼다고 했나, 지금?”
“예….”
“혹시 그 기술을 쓰고 나서 이브의 마력 저장소 등급이 올라간다거나 하지는 않았나?”
“그랬다고 들었어요.”
“그랬다고 들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때 저는 레바돈에게 당해 기절해 있던 상태였던 터라….”
‘기절? 그런 건가….’
그 말에 알렉산더의 머릿속에 널려있던 퍼즐 조각이 하나로 맞춰졌다.
“그 기술은 ‘강제 돌파’라고 하는 것이다.”
“강제 돌파요?”
알렉산더의 입에서 강제 돌파에 대한 설명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이브가 그렇게 위험한 기술을 썼다는 말입니까? 절 구하기 위해서요?”
“그래.”
알렉산더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몰랐어.’
이브의 설명으로는 기술의 페널티가 그렇게 엄청나다고 느껴지지 않았기에 크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석찬의 표정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라우르.’
[왜.]
‘라우르는 알고 있었죠?’
[뭐, 그 강제 돌파라는 것의 페널티 말이더냐?]
‘예.’
그 말에 라우르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음…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페널티 와중에 급하게 너 치료하고 옮기고, 꽤 고생했어, 그 녀석.]
무심한 라우르의 말에 석찬이 입술을 깨물었다.
‘근데 왜… 말해주지 않으신 거죠?’
[그 녀석이 네가 아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배려가 깊으신 분인 줄은 몰랐군요.’
[그리고 이유가 어찌 됐건 간에 강제 돌파라는 것을 하기로 결정한 건 그 녀석이야. 페널티도 모르지는 않았을 거고. 그런 일에 굳이 참견할 필요는 없잖아?]
‘…….’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저는 이해했습니다. 근데….’
어떻게 해야 눈앞의 알렉산더를 진정시킬 수 있을까? 지금 표정이 딱 봐도 얼굴에 죽빵 한 대는 갈기려는 표정이다.
고심하던 석찬의 앞으로 라우르가 날아왔다.
[잠깐만 몸 좀 빌려줘 봐.]
‘몸이요? 설마 강신?’
[그래, 잠깐이면 되니까, 빨리.]
‘강신’이라는 단어에 석찬이 반사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렉산더와 싸울 때 반강제적으로 강신을 쓴 이후, 페널티 때문에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겪었었는가.
한동안 알렉산더에게 얻어맞았던 것보다 훨씬 큰 격통에 시달렸으니.
정말이지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직접적으로 힘을 쓰는 게 아니라면 페널티는 훨씬 줄어들 거다. 그리고 나 없이 저놈 저거 설득시킬 자신 있냐?]
그런 석찬의 마음을 알았는지 라우르가 페널티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고.
‘그럼 뭐, 이번 한 번만….’
[좋았으.]
[투신 라우르가 강신을 시도합니다.]
[강신을 허가하시겠습니까?]
일전의 상황과는 다르게 이번 강신은 강제적인 것이 아닌 듯하였다.
‘허락합니다.’
[‘투신 라우르’가 화신 강석찬의 몸에 강림합니다.]
순간, 석찬의 눈빛이 완전히 바뀌었다.
눈매가 조금 더 날카로워지고, 동공의 색도 검은색에서 회색으로 바뀌었다.
“오랜만이군.”
‘저 모습은….’
일전에 한 번 저 모습의 석찬과 붙어본 적 있는 알렉산더는 그를 바로 알아보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귀하신 분이 어인 일로 납시셨습니까.”
“왜긴 왜야. 네 녀석 때문이지.”
자신 때문이라는 말에 알렉산더의 머릿속에 의문이 들었다.
‘나 때문에?’
도대체 왜? 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설마, 싸우자는 겁니까.”
“싸워?”
그 말에 석찬, 아니 라우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띨빵아. 네 머릿속에는 싸움 생각밖에 안 들었냐? 그리고 싸우려고 했으면 이미 선빵을 날렸지.”
“…….”
그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띨빵한 놈이 어떻게 95층까지 올라갔대냐, 말세다 말세.”
“크흠… 그건 그렇고, 싸움이 아니라면 무슨 일로….”
“네놈이 그렇게 살기를 뿌려대니까 ‘변론’이란 걸 조금 해보려고.”
‘변론?’
“네 딸 말이다. 사실….”
라우르는 조금 전의 가벼운 분위기와는 다르게, 차분한 목소리로 석찬에게 말해주었던 것을 포함, 모든 사실을 알려주었다.
“으음….”
알렉산더는 고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설득되었으려나?
사실 자신이 했던 말과 다를 게 별로 없어서 별 기대는 되지 않았건만….
“당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도록 하겠습니다.”
‘설득됐다?’
예상외의 반응에 석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 무슨….’
[뭐긴 뭐야. 너와 나의 차이지.
설득이 통해서 그런지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라우르.
“하지만, 이번 한 번만입니다.”
“어?”
“다음에도 비슷한 일이 있을 시, 그때는….”
“그때는?”
“녀석에게 모가지를 분질러 주겠다고 꼭 좀 전해 주십시오.”
살기가 가득한 그의 말에 석찬의 영혼이 벌벌 떨렸다.
“딸바보 녀석. 꼭 전해 주마.”
“감사합니다.”
“그럼, 조금만 더 이 상태로 있으면 녀석이 힘들어할 거 같으니… 이만.”
“들어가십쇼.”
그 말을 마지막으로.
흐릿.
석찬의 눈 색깔이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큭….’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그래도 일전에 입었던 페널티에 비하면 훨씬 양반이었다.
석찬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알렉산더를 올려보았다.
“모가지를 분지르겠다니. 꼭 말씀을 그렇게 하셔야 합니까?”
“왜, 지금 분질러줄까?”
“죄송합니다.”
“이번 한 번만이다.”
어쨌든, 알렉산더의 기분이 풀려 정말 다행이다. 만약 말리지 못했더라면… 상상도 하기 싫다.
“그나저나, 할 말 더 있다고 하지 않았냐?”
“아.”
그의 물음에 석찬은 그제야 원래 말하려던 용건을 기억해냈다.
“그게… 독 내성을 올릴 수 있는 물약 같은 게 있는지 궁금해서요.”
“독 내성? 왜. 그 지부장 때문에?”
“예. 아무래도 자연적으로 내성을 올리는 데에는….”
“시간적으로 문제가 있겠군.”
“예.”
“흠….”
잠시 고민하던 알렉산더는 팔짱을 풀고 어디론가 향했다.
“어디 가십니까?”
“따라와라.”
질문에는 답도 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알렉산더.
조금 더 지하로 내려온 알렉산더는 등까지 챙긴 뒤, 어두운 복도로 들어섰다.
‘영주성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말없이 그를 따라가 보니 거대한 문이 하나 나왔다. 문은 수많은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다.
“여기는….”
“보면 모르냐? 창고다.”
창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평범한 창고처럼 보이지만은 않았다.
‘보물 창고 같은 건가?’
알렉산더는 천천히, 잠겨 있는 자물쇠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어디 가서 여기 와봤다고 얘기하지 마라. 죽는다.”
“예.”
벌컥.
문을 열자, 쾨쾨한 냄새가 코끝을 마구 찔러댔다.
창고 안은 온갖 먼지와 거미줄 등으로 가득 차 있고, 드문드문 벌레들도 돌아다녔다.
“윽, 관리 안 합니까?”
“닥쳐라.”
그나저나, 이런 모습을 보면 보물 창고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대체 이런 곳에는 왜….’
그때 알렉산더가 들고 있던 등을 내려놓고, 무언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여기 어디쯤에….”
그가 잠시 벽을 더듬거리던 때였다.
“찾았다.”
딸칵.
무언가 작동되는 소리와 함께 창고의 모습이 변화했다.
이전의 어두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밝은 조명과 함께 수많은 장비와 금화, 물약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내가 평생을 모아온 보물들이지.”
탑을 96층까지 올라보았던 알렉산더가 모아온 진귀한 보물들. 하나하나가 감히 가치를 매길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눈독 들이지 말아라. 어차피 네가 쓰고 싶다고 쓸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니까.”
“눈독 들인 적 없습니다.”
“말은 잘해요. 어디 보자, 독 내성이라….”
알렉산더는 물약이 한가득 있는 선반 위에서 여러 가지 물약을 살펴보았다.
“이건 화염 내성, 이건 얼음… 아, 여깄다.”
그는 진한 녹색 빛을 띠는 물약 하나를 꺼내더니 석찬에게 던졌다.
“이건?”
“마셔 봐라.”
아무리 봐도 극독 같아 보이는 물약이기에 마시는 것은 꺼려졌다.
“뭘 망설여? 내가 너한테 이상한 거 준 적이라도 있냐?”
하지만 알렉산더가 마시라는데, 토를 달 수 있을 리가 있나.
석찬은 두 눈을 딱 감고 물약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으… 써.’
한약보다 수 배는 더 쓴맛에 자동으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마셨습니다. 이럼 된 건가요?”
석찬은 빈 병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알렉산더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일었다.
“그럴 리가 있나.”
순간.
찌잉-
“큭!”
극심한 두통과 함께 휘청이는 석찬의 몸.
‘이 느낌은….’
몸 안의 마력이 들끓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고통에 몸부림치는 석찬을 앞에 두고, 알렉산더가 입을 열었다.
“그 물약의 이름은 레플렉시아. 탑에 있는 몇 안 되는 극상급 포션 중 하나다.”
극상급 포션.
초급, 중급, 상급, 최상급을 넘어 최고의 등급이라고 일컬어지는 극상급의 포션. 그 말인즉슨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
“이 포션의 효과는 단 하나, 바로 몸을 모든 독에 대해 면역인 상태로 만들어주지.”
모든 독에 면역인 경지를 만들어준다. 이 효과 하나만으로 별다른 효과가 없음에도 레플렉시아는 극상급 포션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이 석찬의 귀에 제대로 들어올 리가 만무.
“크아아악!”
결국 참고 있던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 정도로 레플렉시아가 주는 고통은 가히 엄청났다.
‘으윽….’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알렉산더 또한 과거 레플렉시아를 복용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멋모르고 마셨다가 죽을 뻔했지, 그때.’
그래도, 저 고통을 이겨내야만 한다.
‘강석찬이, 파이팅.’
주먹을 움켜쥔 알렉산더가 석찬의 곁을 맴돌았다.
* * *
“커헉!”
고통이 서서히 잦아들자, 석찬은 마지막 신음 소리와 함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통을 참느라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보물 창고 내부가 서서히 시야에 들어왔다.
물약을 마신 지 도대체 몇 시간이 흘렀을까?
생각에 대한 답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알렉산더가 해주었다.
“생각보다 빨리 깨어났군. 15분밖에 안 걸리다니.”
하지만, 알렉산더의 말에 석찬은 오히려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15분밖에 안 흘렀다고요?”
체감상 5시간 정도는 바닥에서 뒹군 듯했으나, 현실은 달랐던 모양이다.
“이렇게 빠르다니. 역시 네 재능은 탐나.”
“젠장, 그보다 이런 거였으면 미리 말씀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진짜 죽을 뻔했습니다.”
그 말에 알렉산더가 약간 몸을 떨었다.
“크흠, 그건 어쩔 수 없었어. 나만 당할…이 아니라 네 녀석한테 미리 레플렉시아에 대해 말한다면 네가 안 마셨을 수도 있었잖아?”
“…뭔가 이상한 말이 들린 것 같다만. 일단 넘어가죠.”
“그, 그래, 그래. 그럼 마력을 한 번 운용해 보거라. 뭔가 확 달라졌을걸?”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