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즐거운(?) 식사 시간이 끝난 후.
“이브, 난 피곤해서 한숨 자고 올게.”
“그러세요.”
한껏 메스꺼워진 속을 다스리며, 석찬은 동굴 한 편에 설치된 간이 침소로 돌아왔다.
[괜찮냐?]
‘지금 이게 괜찮아 보이신지?’
[힘내고.]
이 순간만큼은 라우르도 숙연한 표정과 함께 그를 애도했다.
‘…….’
마력으로 어느 정도 속을 진정시킨 석찬은 침상 위에 드러누웠고.
‘잘 버텨냈다, 장하다 강석찬.’
스스로를 칭찬하며,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 *
그 시각. 20층.
“약속한 시간이 지났군.”
포이그 레바돈의 흉흉한 기세에 비서의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죽고 싶은가 보지? 내 명령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말이야.”
“하, 한 번만 용서를….”
비서는 진심으로 울고 싶었다.
그동안 1층에서 17층까지 가볼 수 있는 곳들은 전부 뒤졌으며.
‘죽을 각오로 사냥터까지 샅샅이 뒤졌건만.’
사냥터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다. 깊은 곳에서는 1급이나 베테랑 사냥꾼도 방심하면 훅 가는 곳이 바로 사냥터다.
허나 그런 위협을 동반해 수색을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것인지 올킬러와 은발의 천사는 아무 데서도 그 흔적조차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럴 것이.
애초에 석찬과 이브가 숨어 있는 곳은 여태껏 발견한 사람이 두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곳에 있던 동굴이었다.
게다가 파란색 마력으로 만들어진 위장 보호막까지 더해지니, 어지간해선 찾기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비서가 그 사실을 알 리가 만무했다.
“저 녀석을 당장 지하 감옥에 가두어라.”
“지, 지부장님!”
“닥쳐라.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어서 죽이려다가 참은 거니.”
“…….”
레바돈의 마지막 말과 함께 문 앞에 서 있던 호위들이 다가와 비서를 끌고 사라졌다.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라….’
레바돈의 미간이 좁혀졌다.
‘도대체 어디 숨은 것이냐….’
부상은 예상보다 치료가 빨리 끝나 대부분 다 나은 상태.
‘시간을 더 주면 위험하다.’
올킬러가 제대로 정신이 박혀 있는 녀석이라면 이 몇 개월 동안 실력을 더욱 끌어올렸을 것이다.
‘놈의 성장세를 봤을 때 20층에 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늦어.’
탑에 들어온 지 고작 1년도 안 된 몸으로 비록 스탯 페널티를 받았다지만, 자신과 거의 동수를 이룬 올킬러.
올레드처럼 사냥꾼 지부 상점에서 페널티 완화 물약을 사고 직접 그를 찾아볼까 고민해 보았지만.
‘안 그래도 저번 싸움으로 의심받는 중인데 여기서 또 의심받는 일을 할 순 없다.’
4개월 전 싸움 이후. 올킬러와 겨뤘다는 것은 용케 숨겼지만, 상부에서는 아직까지도 자신을 의심 중이었다.
‘젠장, 뭣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는 레바돈. 그때, 그의 곁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뭔가?”
“방금 막 처리 완료했습니다.”
주어 하나 없이 그저 처리했다는 말뿐.
하지만 그의 말에 여태껏 찌푸려져 있던 레바돈의 표정이 싹 펴졌다.
“제대로 처리한 것인가?”
“유레이 미르.”
남자의 입에서 현 10층 지부장인 사내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언제 눈치챈 건지 깊숙하게도 숨었더군요. 찾느라 애 좀 많이 먹었습니다.”
그 말과 함께 남자가 레바돈의 앞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바로 공포로 물들여진 표정이 그대로 담겨 있는 유레이 미르의 머리였다.
“좋아. 아주 좋아.”
몇 개월 전, 건방지게 자신에게 의뢰를 맡겼던 유레이 미르를 처리한 레바돈. 간단하게 말하자면 꼬리 자르기였다.
만약 상부에서 그에게 심문을 했다가 무슨 일이 날지 몰랐기에, 직속 암부들에게 미리 처리하라고 명해놨지만, 생각 외로 처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녀석이었다.
그래도 무언가 하나는 뜻대로 되었다는 생각에 레바돈의 두통이 덜해졌다.
실실 웃던 레바돈은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수고했고, 일 하나 더 할 수 있겠나?”
“뭐든지 맡겨만 주십시오.”
수개월간의 장기 임무가 끝나고 힘이 들 법도 한데, 남자는 묵묵하게 고개를 숙였다.
“날 화나게 한 애송이들이 있어. 올킬러랑 은발의 천사 듀오라고, 잘 알지?”
그의 물음에 남자의 눈가에 이채가 돌았다.
“그 썩을 녀석들 말씀이십니까?”
크레미와 그레이, 그리고 라이너까지. 소중한 암부, 그중에서도 최고 전력들을 대다수 잃게 만든 그들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덕분에 내 일도 늘어나고 말이야….’
언젠가 만난다면 꼭 복수를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마련될 줄이야.
남자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반드시 그 썩을 것들의 목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좋아. 만약 일만 제대로 처리한다면… 다음 암부장의 자리를 네게 맡기도록 하겠다.”
암부장의 자리라는 말에 남자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암부장이라….’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그럼 전 이만, 임무를 위해….”
말과 함께 사라지는 남자의 신형.
남자가 떠나간 자리.
한동안 커다란 웃음소리가 지부장실 가득 울려 퍼졌다.
* * *
또다시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가부좌를 튼 석찬은 몸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마력 스탯 350.’
이브의 경험대로, 350에 다다른 마력 스탯은 이제 늘어나는 것에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돌파.’
비록 아직 돌파를 끝마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석찬의 마음은 이전과 달리 평안했다.
‘라우르의 말대로다.’
돌파를 못 했어도 이전보다 더욱 완성도가 높아진 기술들과 강함. 게다가 이제는 파란색 마력 저장소를 앞둔 이브. 마지막으로.
‘여차하면 강신을 쓴다.’
물론 몸에 가해지는 막대한 부담 덕에 강신은 말 그대로 마지막이자 최후의 수지만, 그걸 쓴다면 승리는 확실했다.
‘이 정도면.’
확실히 전력은 레바돈을 훨씬 상회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변수라고 할 만한 건 역시….’
독.
자연적으로 몸에 내성이 쌓일 때까지 기다릴까 고민도 해보았지만, 생각해보니 좋은 수가 하나 있었다.
물약.
알렉산더에게 물어보면 독 내성 관련 물약을 몇 개 정도 구매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이브의 말에 석찬은 우선 1층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안 돼요! 밖을 나가면 레바돈의 감시망에 걸릴 수도 있어요!”
이브가 반대를 하긴 했지만.
“괜찮아. 똘마니한테 당할 정도로 약한 건 또 아니잖아?”
석찬은 이브의 걱정에 괜찮다고 답하며 동굴을 나섰다.
‘오랜만에 맡는 바깥 공기….’
숨을 한 번 크게 내쉴 때였다.
“크르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거대한 늑대들.
오크들이 부리는 다이어울프였다.
‘맞다.’
너무 오래 밖을 나가지 않아 잠시 망각했었다. 이 동굴은 사냥터 어딘가에 처박힌 곳이었고, 비록 마법으로 감춰져 있어도 주변에 몬스터들은 얼마든지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커엉, 컹!”
‘네 마리인가?’
다이어울프 성체는 두 명 이상이 같이 공격해야 승산이 있다고 알려졌을 정도로 강력한 개체였다.
하지만.
‘똥강아지 주제에… 이를 드러내?’
석찬에게는 이빨이 살짝 날카로워 보이는 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조용히 가라.”
“깨갱!”
살짝 기세를 푸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려 도망치는 다이어 울프들.
‘싱겁기는….’
잠깐의 해프닝을 뒤로하고, 석찬은 1층으로 향했다.
* * *
파앗.
오랜만에 보는 1층의 풍경을 뒤로하고, 석찬은 곧장 영주성으로 향했다.
후드를 써서 그런지 다행히도 석찬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빠르게 영주성 문 앞에 도착한 그를 경비병이 막아섰다.
“누구냐, 여기는 일반인이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경고를 보내는 경비병은 다행히도 탑에 들어온 이후 친분을 쌓아놨던 경비병 중 하나였다.
“접니다, 한 아저씨.”
“어?”
후드를 걷자 보이는 익숙한 얼굴에, 경비병이 겨누었던 창을 거두었다.
“이거, 우리 마을의 영웅님 아니신가?”
“그런 낯간지러운 별명으로 부르지 마시라니까 그러시네, 참….”
“그나저나, 오랜만에 들르네? 한 달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들르던 것 같던데.”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하하….”
다행히도 사람들은 자신이 20층 지부장과 싸웠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영주님 뵈러 온 거지?”
“예.”
“영주님 지금 대련 중이실 거니까, 대련실로 가봐.”
“감사합니다.”
“이 정도로 감사하긴 무슨.”
경비병과 헤어진 석찬은 영주성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움찔.
손을 흔드는 경비병의 그림자가 살짝 흔들렸지만, 석찬은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오랜만이에요, 올킬러 님.”
“오랜만입니다.”
익숙한 성 안의 사람들의 안부 인사를 받으며 지하의 대련실로 향했다.
“핫! 하아!”
대련실로 향하는 계단에서부터 들려오는 기합 소리.
대련실 문을 열자 진한 땀 냄새가 코끝으로 전해져 왔다.
“오호라, 이게 누구야?”
석찬을 발견한 알렉산더가 라이너와의 대련을 잠시 멈추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왔구만.”
“그 말 오늘 10번은 넘게 들은 거 같은데요?”
“그만큼 다들 반갑다는 거지.”
가족들과 함께 옆으로 다가온 라이너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에게 손을 건넸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여태까지 고맙다는 말을 못 하고 있었네. 우리 가족이 다 같이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준 점, 다시 한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네.”
라이너의 말에 그의 아내 또한 고개를 숙였다.
“저희를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빼내 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별말씀을요.”
“리아, 너도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감사합니다, 아저씨!”
갑자기 훅 들어오는 라이너의 딸.
‘아, 아저씨?’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아저씨가 아니라….”
짝!
“자자, 그쯤 하고, 갑자기, 그것도 혼자 찾아온 거 보면 용건이 있어서 온 거 아니냐.”
둘의 중앙으로 다가온 알렉산더가 석찬에게 물었다.
“크흠. 네, 사실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석찬은 알렉산더 뒤에 멀뚱멀뚱 서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보다… 잠시만 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왜? 라고 물으려던 알렉산더는 사뭇 진지한 석찬의 표정을 보고 별말 없이 사람들을 물렸다.
“자, 이제 둘밖에 없으니 말해 보거라. 용건.”
“…….”
석찬은 말이 없었다.
용건을 말하기에 앞서 이야기하려던 것이 있었는데,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 바빠. 빨리….”
‘에라, 모르겠다.’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군요.”
“죄송? 갑자기?”
“…….”
석찬은 한동안 말없이 알렉산더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브가, 위험에 빠질 뻔했습니다.”
그 말과 함께, 대련장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턱.
석찬의 어깨에 손을 올린 알렉산더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자세히 설명해 봐, 한 번.”
쿠우웅.
손으로부터 작게 전해지는 압력이 알렉산더의 심정을 대변해주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5개월 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석찬의 입에서 17층을 오른 이후로 일어난 일들이 상세히 서술되기 시작했다.
“20층 지부장의 기습….”
“마력 운용자, 독….”
“이브가 사용한 정체불명의 기술….”
그중에서 알렉산더가 유독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브가 정체불명의 기술을 썼다고 했나, 지금?”
(다음 편에서 계속)